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3화 (3/275)

3. 준비(1)

조선 시대 암군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인 인조.

그 인조의 손자로 태어난 공식이.

불만이 많은지 짧은 팔을 뒤로 하고 구시렁거리며 왔다 갔다 했다.

'시발, 뭘 하려고 해도 있는 게 없네.'

정리한 생각을 적어 놓으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도 왕손이라 종이와 먹 그리고 붓은 쉽게 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먹을 찍어 붓을 사용하기에는 벅찼고, 도면 같은 것은 붓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나뭇가지를 들고 땅에다 끄적거렸다.

'시발. 이게 다 런조 보다 못한 런도 못한 조 때문이야.'

대역에서 나오는 금필이라도 만들어 볼까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한양이라면 몰라도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에는 금필을 만들만한 장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손이라고 하지만 너무 나이가 어렸고 볼모로 잡혀 온 터라 설칠 수도 없었다.

'하! 미치겠네.'

머릿속에 든 생각은 엄청 많았지만 써먹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21세기에서 최첨단을 걷는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는데, 막상 과거로 돌아오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캑캑거리며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보니 일하는 머슴 중 한 명이었다.

"너, 이리 좀 와 보거라."

쭈뼛쭈뼛하며 다가오는 머슴.

얼굴이며 손이며 모두 시 껌정이 되어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아기씨."

"이름이 무엇이냐?"

"쌍식이옵니다."

"8월 1일생이더냐?"

"그렇사옵니다."

조선 시대 이름은 태어난 달과 날짜로 정해진 것을 대충 불렀다.

'돌쇠' 또는 '쇠돌'이는 2월 8일생이었고, 가장 흔하다고 생각한 '개똥'이는 11월 15일생인 것이다.

"어쩌다 그리된 것이냐?"

"불이 꺼져서 지피다가···."

쌍식이는 말을 흐렸다.

지금 앞에 있는 아기씨에 대한 소문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봉림대군의 큰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둘째인 원은 행동이 이상하고 너무 어른스러워 또래 왕손들은 물론 머슴들까지 피했다.

"음···. 가서 숯 좀 가져오너라."

"네, 아기씨."

"큰 걸로."

"네에···."

원이 된 공식이는 어린 나이에도 머슴들에게 자연스럽게 하대했다.

'시발, 말을 올리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그나저나 숯으로 연필을 만들 수 있을까?'

목탄 연필이란 것이 있다는 말은 들어 봤다.

하지만 써본 적이 없었다.

'그림 그릴 때 쓴다고 하던데.'

목탄은 흑연보다 진하고 반짝거리기에 소묘나 인체 드로잉 하는데 필수인 회화 재료이다.

하지만 공돌이였던 원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단지 인생에 딱 한 번 소개팅했을 때 만났던 미대 다니던 여학생이 말한 것이 기억났을 뿐이다.

그 뒤로 공식이에게 그 누구도 소개팅을 주선해 주지 않았다.

'뭐, 한번 해봐야지.'

생각보다 숯은 중국 종이인 선지는 물론 조선의 한지에도 잘 묻었다.

하지만 들고 있자니 손이 검게 변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걸 심으로 만들어 쓰려면 흑연처럼 해도 되나?'

연필을 만드는 법은 알고 있었다.

흑연을 갈아 점토와 섞은 후 금속이나 도기 통에 넣고 1,000~1,200도로 구우면 되는 간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숯을 갈아 점토와 섞어도 그렇게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날부터 머슴 쌍식이는 원의 전담 머슴이 되어 여러 가지 실험을 해야만 했다.

하던 일은 그대로 하면서 추가로 더 일해야만 했던 쌍식이.

이제 14살인 쌍식이는 불만이 많아 투덜거렸지만, 이 일로 인하여 팔자가 바뀔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단단하지는 않지만 굵게 만드니 쓸 만은 하군.'

그런데 또 문제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비싼 종잇값이었다.

먹으로 쓴 한지는 빨아서 쓸 수 있었는데, 목탄 연필로 쓴 한지는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종이를 싸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보안 때문에 이면지로 활용조차 하지 않고 잘게 갈아서 버렸던 종이.

그런 종이가 너무나 귀했다.

'남쪽이면 대나무 죽순을 갈아서 만들면 되는데···.'

문식이 덕분에 다양한 지식이 쌓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가만!"

인터넷에서 대북 제재로 교과서조차 만들 수 없었던 북한이 종이를 만들었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압록강에 널려 있는 갈대를 사용하면 되잖아.'

갈대를 잘라 맷돌에 넣어 갈아서 잿물에 넣고 펄펄 끓이면 될 것 같았다.

또다시 쌍식이의 고행이 시작되었다.

* * *

1591년생인 아담 샬이 심양관을 방문했다.

친하게 지내고 있는 소현세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북경에서 살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몇 년 전부터 심양에서 살고 있었다.

아담 샬의 눈에 신기한 장면이 들어왔다.

조그마한 아이가 질이 좋지 못한 종이에 뭔가를 그리고 적으면서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 아이의 주변에는 비싼 종이가 구겨진 채 많이도 버려져 있었다.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여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아이는 숫자를 적어 가며 계산하기 바빴다.

문자는 처음 본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분명 알파벳과 아라비아 숫자도 있었다.

"뭔지 알고 적는 거냐?"

명나라 말을 할 줄 모르는 소현세자와는 한문 필담을 나누었지만, 혹시나 해서 명나라 말로 물었다.

깜짝 놀라는 아이.

아담 샬을 보더니 밝게 웃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아이라 그런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명나라 말이었다.

"신성로마제국. 어딘지 아느냐?"

"아~!"

아이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놀랍게도 그 아이의 입에서 독일말이 나왔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너무 신기했기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독일 왕국.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제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언어는 독일어였다.

"아담 샬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얼 하고 있는 거냐?"

"간단한 기관을 설계하는 중입니다."

"기관이라니?"

"열을 받으면 혼자 움직이는 기관입니다."

"그런 게 가능하더냐?"

"해봐야죠."

아담 샬은 궁금했다.

유창하지 않지만,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아이.

게다가 신기한 기관을 만들고 있다니 놀랍기만 했다.

"내가 볼 수 있을까?"

"그건 안 됩니다."

"음···."

그럴수록 더욱 궁금했다.

언 듯 봤지만, 장인들만 할 수 있는 수치 계산까지 보였기 때문이다.

"보여준다면, 내 좋은 것을 주마."

"사업 비밀이라 안 됩니다."

"사업? 네가 사업이 뭔지 아느냐?"

대답 없이 밝게 웃는 아이.

조그만 입이 열렸다.

"신부님이시죠?"

"그렇단다."

"그럼 맹세하세요. 저와 나눈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요. 고해성사(告解聖事) 같이요."

"고해성사가 뭔지 아느냐?"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

흰 수염을 쓰다듬는 아담 샬은 침음(沈吟)을 뱉었다.

"내 약속하마."

"천주님 말고는 절대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 약속하마."

아이가 보여 준 설계도는 놀라웠다.

말한 대로 작동이 될지는 몰랐지만, 왕복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뭐냐? 그리고 비싼 종이를 이렇게 낭비해도 괜찮은 거냐?"

"아, 이것은 연필(Bleistift)이고요. 종이는 제가 만든 막지라 비싼 것이 아닙니다."

연필이라는 것도 신기했지만, 종이가 비싸지 않다니 호기심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비록 누리끼리하고 울퉁불퉁했지만, 종이라는 것은 아주 비싼 물품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네가 만든 것이냐?"

"네."

자신 있게 대답하는 아이.

제국에서도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천재 같았다.

연필을 받아 종이에 적어보니 아주 좋았다.

몇 번 심이라 불리는 검은 것을 부러트리긴 했지만, 둘러싼 나무를 깎아서 계속 쓸 수 있었다.

"이렇게 지울 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먹고 있던 하얀 것을 종이에 문대자 연필로 썼던 검은 자국이 지워졌다.

"그건 또 무엇이냐?"

"이건 떡입니다."

"떡?"

"조선의 음식입니다. 이것 대신 빵으로 해도 됩니다."

"그래?!"

값이 싼 종이.

그 종이에 쓸 수 있는 연필이란 필기구.

그리고 떡이나 빵으로 쓴 글을 지울 수 있다니.

아담 샬은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

전쟁에 져서 볼모로 잡혀 왔다는 소현세자.

그의 조카라는 아이는 분명 천재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능가하는 세상을 바꿀 천재가 틀림없었다.

아담 샬의 머릿속에 오만가지를 넘어 백만 가지나 되는 생각이 휘몰아쳤다.

"그 물건들은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느냐?"

맑은 눈을 깜박이며 쳐다보는 아이.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독점은 안 됩니다."

"독점은 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네가 만들면 내가 모두 사주겠다."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연필은 처음 본 것이라 부르는 대로 가격이 결정되었지만, 종이가 문제였다.

아무리 질이 좋지 않다지만, 종이는 종이였기 때문이다.

밀고 당기는 흥정 끝에 결국 명나라에서 쓰는 선지(宣紙)의 1/18 가격으로 결정됐다.

"선금으로 이백 냥을 보내 줄 거니 최대한 빨리 많이 만들어 주기 바란다. 할 수 있겠느냐?"

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청나라 은화 1냥이면 엽전으로 1,000문.

(명과 청은 은 1냥(37.58g) = 1,000문)

(조선은 1냥 = 100문(닢), 상평통보 기준)

엽전 5문이 쌀 1두이기에 12근(7.2kg).

쌀이 무려 1,440kg이나 된다.

단순히 계산해도 쌀 288톤을 계약금으로 주겠다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대한 빨리 만들어 보내겠습니다."

‘고객님’이란 말은 속으로 삼켰다.

사실 쌀 한 석(섬)의 무게는 도정하지 않는 상태의 벼였을 경우 200kg이다.

따라서 은화 1냥은 쌀 7가마이고 7명의 성인이 1년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다.

하지만 조선의 1냥은 달랐다.

1냥이 쌀 한 석이니 7배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과 왜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은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은의 가치가 떨어져 은 1냥은 쌀 5가마가 된다.)

아무튼 은 200냥은 아주 큰 돈이었다.

아담 샬은 기독교 전파가 목적인 선교사였지만, 천문과 역법에 능한 과학자였으며 홍이포(Culverin) 같은 무기 중개(Merchandising Trade)도 했다.

그런 그에게 이번 계약은 엄청난 이익을 안겨줄 큰 거래의 시작이었다.

소현세자를 보러온 아담 샬은 세자를 보지도 않고 바로 돌아갔다.

그에게 있어 로마 가톨릭교회에 큰 이득이 될 수 있는 종이와 연필의 중개무역이 아주 중요했기 때문이다.

* * *

심양관의 재정을 꽉 쥐고 있는 세자빈 강 씨.

청 태조 누르하치의 12번째 아들 이혁영친왕(已革英親王) 팔왕이 밀거래(면포, 표범 가죽, 수달피)를 요구하며 지원한 은 500냥으로 부를 이뤘다.

강빈은 벌어들인 돈으로 조선인 노예를 사들여 농사를 짓고 더 큰 돈을 벌었다.

그로 인해 쫄보에 찌질이인 인조의 미움을 샀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원의 말을 듣고 세자빈은 고심에 빠졌다.

철부지인 자신의 아이들과 달리 천재로 소문난 봉림대군의 아들.

그 아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은 100냥을 내놓은 것이다.

"이게 얼마나 큰 돈인 줄 아느냐?"

"네, 큰어머니."

자신을 빈궁마마라 부르지 않고 꼬박꼬박 큰어머니라 부르는 어린아이.

그 아이의 입에서 나온 요구 조건을 거부할 수 없었다.

"조선인 노예를 사들여 농장 근처에 종이 공장을 짓겠다고?"

"네, 큰어머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선교사 아담 샬과 계약을 했고 그에게 선금을 받았다고 했다.

값싼 종이를 만든다고 하는데, 아마 아담 샬이 알려준 것이겠지.

그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생긴 게 다른 만큼 생각도 다른 서양인이라 하지만 어린아이와 계약을 하다니.

고심 끝에 강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남편인 세자와 자신이 원하던 일이기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알겠다. 그리하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큰어머니. 그런데 이건 비밀입니다. 소자의 어머니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세자와 봉림대군은 수시로 청에 불려 다녔기에 심양관의 모든 관리는 강빈이 맡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인조의 견제로 인해 묘소조차 가보지 못한 강빈.

슬프고 우울한 나날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찾아온 봉림대군의 아들.

그 아들은 심양 남쪽 80리 밖에 있는 농장 근처에 종이 공장을 세우고 종이와 연필이라는 것을 만들어 냈다.

비록 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워낙 싸고 사용하기에 편리했기 때문에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

'혼자 먹으면 탈 나지.'

막대한 돈이 들어오자 원은 그중 일부를 뿌렸다.

물론 직접 하지 않았다.

세자빈 강 씨를 이용해서 청나라 관리들을 매수했다.

아버지 봉림대군의 이름으로 인조에게도 상납했다.

이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 된 원.

아예 심양 남쪽 100리 밖에 있는 종이와 연필 공장에서 기거했다.

물론 원해서 그리된 건 아니었다.

1644년(인조 22년) 5월.

청이 산해관을 넘어 명나라를 멸망시키자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부부도 모두 북경으로 끌려갔다.

정치적 영향력이란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어린아이.

뿌려 놓은 뇌물과 청나라 흠천감 최고책임자인 아담 샬의 지원으로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원은 조선의 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현대의 개성 공단 북서쪽을 가리키던 원이 말했다.

"이곳 땅을 모두 사들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사장님."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상단의 이름을 '조선전력공사'라 했고, 자신을 사장님이라 부르게 했다.

그리고 모든 상품에는 '번개'를 표시하도록 했다.

'흑연(黑鉛, Graphite)은 중국, 인도 다음으로 한국에 가장 많이 있는 것이지.'

어린아이답지 않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씩 웃는 원.

그 모습을 본 쌍식이는 어린 사장님이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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