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2화 (2/275)

2. 그럴 수는 없어

황제의 휘는 연(棩), 초명은 원(遠)이다.

효종 현인대왕의 맏아들이고, 인조 명숙대왕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효숙 경렬 명헌 인선왕후 장씨(張氏)이다.

명나라 숭정(崇禎) 14년(1641년) 2월 4일(己酉) 축시(丑時)에 청나라 심양(瀋陽)의 질관(質館)에서 황제께서 탄생하셨다.

을유년(1645년)에 비로소 본국으로 돌아온 황제께서는 어릴 때부터 남다르셨다.

세상 만물을 보는 데 있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고, 가름하는 데 있어 명확하셨다.

같은 해 소현세자가 죽어 효종 대왕이 차 적자로서 왕세자에 책봉되자, 황제 역시 원손(元孫) 칭호가 올려졌으며, 기축년(1649년)에 왕세손 책봉례를 거행하셨다.

그해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사위하자 황제께서도 왕태자 칭호가 올려졌다.

* * *

인조 23년(1645년) 5월.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그중 어깨가 근육 깡패나 다름없는 젊은 사내가 말을 타고 있었다.

그의 품에는 이제 말문이 트여 보이는 조그마한 아이가 안겨있었다.

"아버지."

"힘드냐? 힘들면 가마를 타거라."

"아닙니다. 소자 아버지께 할 말이 있습니다."

"무얼 말이냐?"

"소자 커서 반드시 아버지의 소원을 이뤄드리겠습니다."

"허허, 내 소원이 뭔지 알고 하는 소리냐?"

아이는 조심스레 아주 작은 손가락을 펴더니 북쪽을 가리켰다.

"네, 바로 벌(伐)이시죠."

"이놈! 말조심하거라."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사내의 말에 아이는 더 작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소자 이 말은 오직 아버지께만 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조심, 또 조심하거라."

"네, 아버지."

행여 구설에라도 오를까 늘 언행에 신중한 봉림대군은 자신의 큰아들인 원(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년 초, 형님인 소현세자를 따라 한양을 가려고 했을 때, 따라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어린 아들.

심양으로 돌아가 보니 엄청난 일을 벌여 놓았다.

독일 출신 예수회 선교자이자 로마 가톨릭 회 사제인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과 지내면서 종이와 연필이란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4살밖에 안 된 어리디어린 꼬마 아이가 심양관(瀋陽館)에 일하던 머슴들을 시켜 만들어 낸 가격이 아주 싼 종이와 그 종이에 쓸 수 있는 연필(鉛筆).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

그 돈으로 노예 시장에 굴러다니던 조선인들을 사들여 해방하고 일부는 황해도로 보냈다.

봉림대군은 뒤를 바라보았다.

잘 먹어서 그런지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사람들.

대부분 아들 원이 설립한 조선전력공사(朝鮮電力公社)의 사원들이다.

무슨 상단 이름이 그러냐고 물어봤지만, 그저 웃기만 하던 아들.

자신의 자식인데도 알 수 없었다.

아들 원은 참 이상한 아이였다.

두 돌이 될 때까지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던 아이.

울지도 않았다.

그런 아이가 세 돌이 지나자 조그만 입으로 조선어는 물론이고 명나라 말까지 알아듣고 척척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어린아이 특유의 중얼거리는 소리였지만, 내용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아는 듯했다.

늘 혼자서 뭔가를 생각하던 아이.

말이 늦어서 처음엔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너무 잘해서 탈이다.

도통 알 수 없는 하나뿐인 아들.

소현세자의 자식들은 물론 친누나와도 놀지 않았다.

아내인 장씨조차 난감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하는 말마다 너무 심오하기에 괴리감을 느꼈다.

아마 선교사인 아담 샬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아닙니다."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보는 아들.

꺼내는 말마다 놀라게 했기에 궁금했다.

"할 말 있으면 해 보거라."

아들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할바마마를 조심하십시오. 소자는 할바마마가 무섭습니다."

"본적도 없지 않으냐?"

"듣는 귀는 열려있습니다."

봉림대군은 울긋불긋한 근육으로 다져진 어깨를 움직여 아들을 꼭 안아 주었다.

그 자신도 아버지인 조선의 왕이 무서웠다.

이미 소학(小學)을 통달한 아들은 어찌 알았는지 명심보감(明心寶鑑)은 물론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나오는 구절까지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신동을 넘어 천재(天才)라고 소문난 아들.

아들의 말대로 따르던 형님이 변을 당했다.

입술이 피가 나도록 꽉 깨문 봉림대군.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어쩌면 네가 진짜 내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르겠구나.'

소현세자와 달리 봉림대군은 조선을 짓밟은 청나라를 증오했다.

그러기에 다툰 적이 많았는데 그 모습을 아들인 원이 보았나 보다.

막연하기만 했던 북벌(北伐).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라 불리는 아들 원이 있다면 말이다.

"내 너를 꼭 지켜주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봉림대군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나라 조선을 위해 아들 원을 아버지인 조선의 왕으로부터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속내를 터놓는 아들.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아들이 말한 계획대로만 된다면 북벌은 꿈이 아니었다.

명나라를 집어삼킨 청나라도 서양의 대포 앞에서는 몸을 사렸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무서운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아들의 말.

믿고 싶었다.

원의 방에 빼곡히 쌓인 서양 서적을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봉림대군은 원이 세 돌이 된 가을날이 떠올랐다.

심양관 한 곳에서 나뭇가지를 들고 바닥에 뭔가를 적고 지우면서 구시렁거리던 아들.

'런조라니, 무슨 말이냐?'

'서양 말인데 달린다는 뜻입니다.'

'네가 어찌 서양말을 아느냐?'

'아담 샬 신부님께 배웠습니다.'

본 적이 있었다.

세자인 형님이 존경하는 서양 종교의 신부라는 아담 샬과 아들 원이 대화하는 모습을.

명나라 말이 아닌 처음 들어본 소리라 무심코 넘겼는데 천재라고 불리는 아들은 어느새 서양말도 잘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시발이라니?'

말이 정확하지 않아서 욕을 하는 건지 명나라 말로 배고프다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들 원은 혀 짧은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똥 시(屎)에 다스릴 발(撥)자입니다.'

'똥을 다스려?'

'네, 아버지. 똥을 잘 다스리면 염초를 만들 수 있을 데, 이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자 다른 방법이 없나 생각 중이었습니다.'

화약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재료인 염초.

그런 것을 어린 아들은 벌써 알고 있었다.

'이것도 아담 샬이 알려 준 거겠지.'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고관의 대우를 받는 아담 샬.

그는 서양 말을 할 줄 아는 아들을 참 예뻐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적도를 건너 어느덧 의주(義州)로 들어섰다.

해가 지기 시작한 석양은 아름다웠지만, 형님인 소현세자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봉림대군의 슬픈 눈에서 붉은빛이 어른거렸다.

* * *

의식이 돌아온 공상식.

처음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모든 것이 흐릿했다.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고 해도 울음소리 비슷한 것만 나왔다.

작아져 버린 신체.

발버둥을 치려고 해도 근육이 없어서인지 쉽지 않았다.

'다시 태어난 건가?'

분명 문식이와 2차로 노래방을 가고 있었는데 그 뒤로 기억이 없다.

'아, 맞다. 횡단보도.'

문식이를 구하려고 뛰어갔는데.

'죽었나 보군. 그런데 여긴 어디야?'

초점이 맞지 않는 눈.

고도 근시처럼 모든 게 흐릿하니 잘 보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 수 있었다.

진짜 다시 태어났다는 걸.

'기억을 그대로 갖고 태어나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사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주변을 살폈다.

벽돌과 목조로 된 건물.

'중국인가?'

분명 엄마로 보이는 여인이나 주변 사람들의 복장은 사극에서 보았던 조선 시대 복장인데 건물은 아니었다.

아무튼 문식이가 말하던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환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이 오기로 했는데···.'

진짜 같이 왔다고 해도 문식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나 있을까.

쌍둥이로 태어났다면 몰라도 불가능해 보였다.

이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심한 사투리 같은 한국말과 중국어가 들렸다.

처음에는 뭔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중국 심양이란 곳에서 조선의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이네.'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은 대군으로 불렸고, 그의 형은 세자였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문식이가 했던 말들이 정확히 떠올랐다.

그 기억들이 떠오르자 흩어진 조각들이 맞춰지듯 상황이 파악됐다.

'이곳은 청나라 수도였던 심양이니···. 설마 내가 현종이야?'

조선 왕 중 외국에서 태어난 왕은 현종이 유일하다.

그런데 바로 그 현종 같았다.

'조선의 십팔 대 왕인 현종으로 태어나다니···.'

선명하게 떠오르는 문식이의 말 중에서도 현종의 생애가 어땠는지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한국사 선생님인 문식이도 현종에 대해서는 거의 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아는 건 상복 가지고 1년을 입냐 3년을 입냐 따졌던 예송논쟁(禮訟論爭)뿐이었다.

한국사 시험에 나오기에 그냥 외웠던 예송논쟁.

그것 말고는 현종의 생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아, 맞다. 하나 더 있었지.'

문식이의 말이 떠올랐다.

조선왕 중 유일하게 부인이 한 명만 있었다는 현종.후궁조차 두지 못했다.

'아마 명성왕후였지.'

명성황후라 부르는 민비와 비슷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 전국 토지를 대부분 소유한 민씨 일가와 그 추종 세력들.

그로 인해 조선의 생산성은 개판이 되었고 끝내 망해 버렸다.

그래서인지 명성이란 말 자체가 싫었다.

추후 아내가 될지도 모르는 명성왕후.

성격이 지랄 같아서 현종이 후궁도 둘 수 없었다고 구시렁거리던 문식이의 말.

'시발, x됐네.'

문식이의 말에 의하면 조선의 왕질은 3D를 넘어서 최악의 직업이었다.

그런데 후궁을 둘 수도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명성왕후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

그러려면 뭔가 두각을 나타내야 했다.

부모가 정해준 혼처와 결혼 해야만 하는 조선 시대.

그 시대에서 삶의 낙이 뭐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거 없었다.

다행히 어려서 그런지 언어 습득이 아주 빨랐다.

듣는 즉시 기억이 되었고,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입으로 내뱉는 것이 잘되지 않았다.

'구강 근육이 문제네.'

전혀 발달하지 않는 구강 근육.

그래서인지 말을 하기는커녕 뭘 먹어도 자꾸 흘리고 침까지 나왔다.

'쪽팔리게.'

아장아장 걸을 수 있게 되기까지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사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먹고, 생각하고, 자고, 싸고.

끝없이 반복되며 조금씩 힘이 생겨났다.

천만다행인 건 문식이 덕분에 찾아봤던 수많은 기초 과학 지식들.

그 지식들이 모조리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다는 거였다.

생각을 정리하며 공상에 빠지다 보니 별생각이 다 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세계를 정복해봐?'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런도 못한 조가 문제야.'

조선 최고의 병신 왕이라는 인조.

선조처럼 튀지도 못했다.

그런 인조가 할아버지라니.

암담했다.

전생의 기억이 없다면 분명 존경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친할아버지이니.

하지만 전생의 기억이 생생했기에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정이란 것도 전혀 없었다.

대신 가끔 날 안아 주고 예뻐해 주는 큰아버지인 소현세자가 불쌍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구나.'

이제 막 혼자 똥오줌을 가릴 수 있게 되었다.

대단하다고 기특하다고 찬양 일색이었지만, 소현세자를 구할 힘도 방법도 없었다.

문식이의 또 다른 말이 떠올랐다.

소현세자가 왕위를 이었다면, 조선이 그리 쉽게 망하지 않았을 거라는.

개방적인 사고가 가능했던 소현세자.

볼모로 심양에 있을 때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

'물론 세자빈 강 씨 때문이지.'

공식이의 기억을 가진 원은 똑똑하고 야무지고 경영에 천재였던 큰어머니인 강빈을 존경했다.

강빈은 벌어들인 돈으로 노예로 끌려온 조선 백성들을 사서 심양 남쪽 농토에서 농사를 짓게 하거나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청나라와 관계도 좋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에 인조의 미움을 샀지.'

병신 같은 자신보다 똑똑한 아들과 며느리를 보고 시기와 질투 때문에 내쳤던 인조.

'아니 죽였지.'

할 수만 있다면 소현세자를 살리고 그냥 왕족으로서 무위도식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 시발!'

딱 2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어렸기에 아쉬웠다.

'어쩔 수 있나. 내가 해야지.'

문식이의 말처럼 왕이 될 수 있으니 세상 한번 뒤집어 보고 싶었다.

'발전기만 만들면 돼!'

곧 있으면 전열함이 등장하는 시대다.

'아니, 벌써 나왔나?'

이런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건너뛸 게 많았다.

단계를 밟아 가려다간 북벌은커녕 제일 싫어했던 x선비들과 논쟁이나 하다가 다시 돌아온 인생을 끝내게 생겼다.

"안돼! 그럴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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