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220화 (220/221)

220. 자격지심 (1)

만 명.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였다.

아마 음반업계 역사상 최대의 숫자가 아닐까?

물어봤더니, 그렇단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결코 흔한 일이 아니고.

물론 대부분의 투자금이 소액이었다. 그러나 모인 금액까지 소액이라 부를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FE 인베스트먼트처럼 회사에 직접적으로 투자한 이들을 모두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억 소리 나는 투자금.

그리고 만 명이라는 상징적인 숫자.

홍보담당자 주재윤에겐 최고급 재료들이 준비된 셈이었다.

그가 도마 위에 칼질하듯 키보드를 두드리며 맛 좋은 보도자료를 만드는 동안,

나는 나머지 직원들과 둘러앉아 짧은 회의를 가졌다.

“투자자들 이름이 적힌 책자를 같이 주는 것도 좋지만, 그럴 거면 아예 책자가 패키지인 건 어때요? 왜 토익책 같은 거 보면 뒤에 CD 붙어있듯이요.”

여직원의 말에 김지희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그거 괜찮다며 노트에 끄적거린다. 그림 잘 그리네.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넣고, 뒤에 커버를 벗기면 CD가 나오는 식으로 어때요?”

“괜찮은 것 같은데요?”

사실 잘 모르겠다. 미술엔 젬병이라. 그래도 평범한 CD 케이스보단 확실히 나은 것 같아서 눈치껏 맞장구만 치는 중이다.

그렇게 내가 참관만 한 두 여자의 아이디어 회의가 끝났을 때쯤엔 주재윤의 요리도 끝이 나 있었다.

“네, 한 기자님. 이메일 보내드렸는데, 보셨나요? 아이구, 역시 빠르시다니까?”

셰프가 주방에서 나와 설명하듯, 윤활유를 바른 혀로 맛깔난 부연설명까지 마쳤다.

보도자료들이 여기저기 쏘아졌다.

그게 신호탄인 것처럼 언론들은 앞다투어 퍼트려댔다.

자연스레 대중들의 관심이 쏠렸고, 관심이 관심을 불러 모았다.

여직원이 뜸을 들인다며 팔짱을 끼고 있다가 잠시 후 패드를 들어 올렸다.

그물처럼 퍼진 기사들에 먹음직스러운 반응들이 잔뜩 걸려 올라왔다.

-실제로 앨범을 찍어내서 준다고 하니, 앨범 사는 셈 치고 사면 절대 후회 없을 듯. 게다가 한정판이나 마찬가지잖아! 지금 투자하러 갑니다.

-기로 프로듀서가 TKM 나와서 처음으로 내는 곡이라 앨범으로 가지고 있으면 분명히 가격 오를 듯!

-여기도 되팔렘이 또······.

-근데 노래 진짜 궁금하다. 레이블 만들고 첫 곡이니 칼을 갈았을 거 아냐. 뮤지션은 과연 누구일까?

-그니까, 대체 누구한테 곡을 주는 건데?

-신인일까? 아니면 우리가 모두 알 만한 사람?

-자, 투자하고 옴. 돈 줬으니 이제 발표 좀 해줘라! 아무리 사전 투자라지만 우리가 누구한테 투자한 건지는 좀 알자고!

“반응 너무 좋네요.”

여직원이 산뜻하게 말했고, 김지희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근데 다들 가수 공개하라고 아우성인데요. 이거 막상 공개했더니 사람들이 실망하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기로 프로듀서가 다 생각이 있겠지! 하면서 넘어갈 것도 같은걸?”

“그러면 다행이긴 한데······.”

주억거리는 김지희를 보던 여직원이 내게 말했다.

“근데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발표를 하는 게 좋긴 하겠어요. 늘어질수록 괜히 기대감만 커지고, 이러다 갑자기 팍 식을 수도 있고요.”

무슨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등 떠밀리듯 기자회견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이제 고작 윤 교수가 서한빛을 보는 첫날이었다. 발성이란 게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것도 아닐 텐데······.

‘당장 서한빛에 대해 공개하기엔 앨범 공개일과의 텀이 너무 커질 것 같은데 말이지.’

조급함을 버리고 마음의 여유를 갖기로 한 게 출근 5분 만에 끝났다.

조급함을 주섬주섬 주워 몸에 끼얹는 중이다.

내 회사는 좀 다를 줄 알았더니. 오히려 그래서 더 부담이 큰 것도 같다.

‘어쩔 수 없지.’

곡이야 빠르게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공백을 채울 뮤지션이 한 명도 없잖나.

머리를 긁적이는데, 여직원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맞다, 서윤 씨 오늘 계약하러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계약서 뽑아 놔야 하는데!”

그러더니 자신의 자리로 향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깨달았다.

아.

한 명 더 있긴 하구나.

#“선글라스가 점점 자라는 거 같은데요?”

내 말에 소파에 앉던 하서윤이 피식 웃었다.

“얼굴이 작아지는 거 아닐까요?”

할 말을 잃고 눈을 돌렸다. 그녀와 함께 온 매니저가 보였다.

스포츠머리를 한 그가 쭈뼛쭈뼛 작업실을 둘러보며 자리에 앉는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에게 집중했다.

“따라서 TKM을 나오신 거예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죠, 하하···.”

세상 공허한 웃음이 작업실에 울렸다.

그의 밍밍한 대답에 하서윤이 눈을 흘겼다.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라고 했어? 피디님! 저만 계약해도 되요. 이참에 나도 영하고 센스있는 매니저 한 명 두고 싶은데 가능해요?”

하서윤이 빽빽대는 동안, 매니저는 그 나름대로 당황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서윤아, 너 어떻게 나한테······대표님!”

복작복작. 난리도 아니다.

내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 참, 저번에도 여쭤보려 했는데 밖에 밴이 주차되어 있더라고요. TKM 나오셨을 텐데 저 밴은 어떻게···.”

“제 밴입니다!”

“합격입니다.”

직원 한 명 더 뽑았다.

스펙이 좋더라고.

“그거 내가 뽑아준 거잖아!”

옆에서 하서윤이 난리를 치는 동안 계약서 두 묶음이 테이블 위에 얹어졌다.

“흐음~.”

하서윤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유심히 살피는 사이, 매니저가 슬그머니 내게 말을 걸어왔다.

“대표님 앨범 투자 얘기로 떠들썩하던데요. 벌써 만 명 가까이 모였다고요?”

“그렇더라고요.”

“하하, 그 대단한 걸 무슨 남 얘기하듯 말하시네요. 그럼 앨범은 언제쯤 내실 계획이세요? 다들 엄청 기대하는 눈치던데. 이럴 때 빨리 내는 게 타이밍도 좋잖습니까.”

사람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한가 보네.

“그렇긴 한데······아무래도 신인이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요. 조금 난감해졌죠.”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고갤 돌렸다.

계약서를 낱장으로 휙휙 넘기는 하서윤이 보였다.

하서윤도 뭔가 이상했는지 계약서를 슥 내리며 눈만 드러냈다. 날카로워 보이면서도 오묘한 매력을 풍기는 눈이 나를 빤히 본다. 얼마 안 가 찌푸려졌지만.

“또, 또 그 표정. 아주 상습적이야.”

내 표정이 대체 어떻길래 지난번부터 저럴까.

고갤 돌려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친 내 얼굴을 살펴봤다. 그냥 난데?

다시 시선을 돌리자 붉은 입술을 깨문 하서윤이 보였다.

그 모습이 어딘가 간질간질 애타 보이는 건 착각이었을까?

“피디님 카드가 뭐 걔밖에 없어요?”

“네?”

하서윤이 팔짱을 꼈다. 다리를 휙 돌려 꼬았다. 턱이 살짝 올라간다.

마침내 ‘나라는 카드가 여기 있잖아?’라는 표정까지 완성한 그녀가 말꼬릴 올렸다.

“나 정도면 조커 아닌가?”

거부할 수 없는 카드인 건 확실했다.

#간활한 웃음을 흘리던 하서윤이 떠나고.

나는 건반 앞에 앉아 커피를 축내고 있었다.

곡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해오던 서한빛의 멜로디 작업에서 잠깐 벗어나, 이번엔 하서윤의 곡이었다.

그녀의 멜로디는 여전히 내가 마지막으로 작업했을 때와 같았다.

그게 이젠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진 않지. 멜로디 의존증에선 벗어난 지 오래니까.

들리면 좋겠지만, 들리지 않아도 작업을 못 할 건 결코 아니었다.

‘물론, 못 할 게 아니랬지 쉽게 할 수 있단 건 또 아니고······.’

영감이란 게 그렇게 쉽게 뚝딱 나올 리가 없잖나.

흐음.

서한빛의 멜로디를 작업하다가 갑자기 선회해서일까.

발라드와 댄스. 장르가 전혀 다른 두 곡을 동시에 작업하려니, 뇌의 성능도 쪼개진 느낌이다.

댄스곡의 뼈대라 할 수 있는 베이스에서부터 시작하려는데, 시작부터 진도가 안 나간다.

‘명확한 기준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래서 정한 게 고작 F 키.

키 하나 정해놓고, 플렛 하나 붙여놓고.

또 한참을 고민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주변을 서성이다 다시 자리에 앉기를 반복했다.

이럴 때 윤태영이라도 있으면 세상 든든했을 텐데.

그는 앤 더글라스와의 작업 이후로 베이시스트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찾는 곳이 많아져 미국에서 개인 활동이 한창이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내려놨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 괴롭히지 말고 생각해 내자, 장기로.’

키 같은 거 말고.

곡을 관통하고 주제음들을 뽑아낼 수 있는 기준.

뭐가 있을까?

하서윤을 떠올렸다.

이젠 자연스럽게 그녀가 가진 음색이 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식은 커피를 툭 털어놓고 트랙 대신 인터넷 창을 띄웠다.

사람을 기준으로 삼기 어렵다면.

‘그 사람이 가진 다른 걸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음악적인 영감이 필요하다고 해서, 꼭 소리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한 게 너무 편협한 생각은 아니었을까?

곧장 하서윤의 춤을 검색해 닥치는 대로 틀었다.

순간순간, 흠칫 놀랄 정도로 농염한 몸짓들이 섞여 있어 괜스레 민망해지기도 했지만 꿋꿋이 다 보았다.

나는 이미 그녀의 노래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시야를 넓히니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모여 기준이 되었다. 뼈대가 되었고, 베이스가 되었다. 탄력이 붙자 살을 붙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빈 커피잔을 무심코 들었다가, ‘아 맞다 다 먹었지’라며 내려놓기를 십 수 번.

손끝에서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서윤밖에 갈 수 없는.

그녀밖에 부를 수 없는.

멜로디.

그녀의 테마(Thema)였다.

#“우리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쵸?”

투명한 아넬형 안경을 쓴 여기자가 준비해온 선물을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와, 감사해요. 저 이 브랜드 차 즐겨 마시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타잔들한테 물어봤죠.”

제인의 팬클럽 이름인 타잔을 언급하며 여기자가 쾌활하게 웃었다. 제인도 굵은 웨이브 머리를 넘기며 덩달아 유쾌하게 웃었다.

“아마 가요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을 것 같아요. 음원 절대 강자라고 불리는 제인이 컴백한다는 소식이 있었으니까요.”

“하하, 그런가요?”

“에이, 모르신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남들 다 아는데 본인만 모르는 트루먼 쇼, 사토라레 뭐 이런 건가요?”

“그렇다기보단······.”

머뭇거리던 제인이 작게 웅얼거렸다.

“더 대단한 분이 준비 중이니까요.”

“네?”

여기자의 말은 일부만 맞았다. 그녀의 말처럼 지금 기획사 A&R팀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TKM까지 마찬가지로 긴장하고 있진 않았겠지.

장 피디님.

그 사람이 레이블을 만들었다.

투자도 받았겠다, 곧 곡을 낼 거다.

‘너무 기대돼···!’

이번엔 대체 누구의 목소리를 빌려서, 어떤 노랠 들고나올까.

사실 ‘브릿지’ 이후에 몇 번이고 그의 곡을 다시 받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동시에 그와 같은 작곡가가 되고 싶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더 열심히 작곡했다.

그의 곡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성장하는 듯했던,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그 느낌을 되새기며.

그런 곡을 만들기 위해서.

“이번 앨범은 전체 자작곡이라는 얘기가 있던데 정말이에요?”

여기자의 물음에 제인이 끄덕였다.

“네, 전부 제가 작사, 작곡했어요.”

“크, 너무 기대되는데요? 얼른 듣고 싶어요!”

“저도 얼른 들려드리고 싶네요.”

“그럼 저희가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요?”

“글쎄요. 아직 후반 작업이 좀 남아서요.”

“에이, 그러지 말고 저한테만 귀띔 좀 해주세요.”

이어지는 앙탈에 제인이 옅게 웃었다.

“그러면 선물까지 받았으니까. 대략적으로만···.”

“네, 네!”

여기자가 들뜬 얼굴로 귀를 가져갔다.

곧 제인의 조그마한 입이 벙긋거렸다.

*<음원 절대 강자, 제인. 전곡 작사, 작곡한 앨범으로 5월에 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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