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219화 (219/221)

219. 최약체 (3)

선글라스로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단발머리 여자가 검은 밴에서 내렸다.

트렌치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캠퍼스를 가로지른다.

새까만 선글라스가 가리지 못한 부분은 백옥처럼 하얗다.

코트 자락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다리도 마찬가지.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풍기는 아우라가 말해주고 있었다. 모델이나 연예인. 혹은 그와 비슷한 업을 가진 여성일 것이라는.

남녀 할 것 없이 시선이 몰려들었다.

여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도 그건 여전했다.

오히려 복도가 좁아 더 많은 이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감탄하길 반복했다.

마지막 한 사람만 빼고.

“그렇게 오랄 땐 안 오더니, 갑자기 무슨 일이야? 청개구리 병 아직도 못 고친 거야?”

교수실.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여교수가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를 단번에 알아보곤 톡 쏘아붙였다.

책을 꺼내던 중이었는지 책장에 다가선 손에는 소리의 이해라는 두툼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느긋한 목소리가 교수실에 울려 퍼졌다.

“고칠 생각이 없다니까요. 교수실 좋네요?”

“나 교수 되고 처음 왔다는 걸 네 입으로 실토하는구나?”

여전히 쌀쌀맞은 대답 뒤로 여교수가 물었다.

“머리 잘랐네?”

“춤출 때 거슬려서 잘랐어요. 근데 뭔가 힘이 안 나.”

“네가 삼손이니?”

어이없어하는 여교수를 보며 선글라스를 벗는 하서윤. 그녀가 매력적으로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커피 캐리어도 내려놓았다.

“난 카푸치노만 먹는 거 알지?”

“그래서 그것만 안 사 오려 했어요.”

“싸가지 하곤.”

여교수도 책을 도로 집어넣으며 그녀 앞에 앉았다.

“얼마 전에 제인이 왔다 갔는데.”

카푸치노를 집어 들며 여교수가 툭 던지듯 말했다. 하서윤은 돌 맞은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고.

“걘 왜 왔대요?”

“왜 왔냐니. 제인이는 자주 온다. 너나 이유가 있어야 오지.”

“곧 앨범 나온다던데 그것 때문이겠죠.”

“내가 방송국 피디도 아니고, 와서 뭐 득 볼 게 있다고.”

“학생들한테 홍보?”

물고 늘어지는 하서윤을 보며 여교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 천재는 시기와 질투 속에 사는 거지.”

불편한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 아슬아슬한 탑에 여교수가 돌 하나를 더 얹었다.

“노래 많이 늘었더라.”

“아니, 오랜만에 만났는데 제인이 얘긴 왜 자꾸 하시는 거예요? 아직도 우리가 보컬트레이너랑 연습생이에요?”

“네 얘기야. 너 노래 많이 늘었다고.”

“······.”

“아님, 음향 기술이 말도 안 되게 발전했던지.”

“쌤!”

빽 외치는 하서윤을 보며 여교수가 한쪽 손을 휘적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장난이다. 그 정도로 발전했으면 보컬 트레이너들 다 죽어야지. 그래서 누구야?”

“뭐가 누구예요?”

“널 성장시킨 사람 말이야. 나도 못 했던 걸 해낸 게 도대체 누구냐고.”

순간, 하서윤은 분명히 누군가 떠올랐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그 흐릿한 얼굴이 아른거렸다.

대답은 결국 다른 게 튀어 나갔지만.

“···노래?”

“하?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그래 봤자 나랑 띠동갑 한 바퀴밖에 차이 안 나시면서. 누가 들으면 할머닌 줄 알겠네.”

삐죽거리는 하서윤을 보며 여교수가 뭔가를 계산했다.

“변한 시점으로 보면 재작년, 기로 프로듀서의 노래를 불렀던 때 맞지?”

“······.”

“표정이 왜 그래?”

“뭐, 뭐가요.”

“흐응, 이쪽도 흥미로운 이야기일 것 같네.”

음흉한 눈빛을 쏘아대던 여교수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 얘긴 차차 듣기로 하고. 그래서 왜 온 건데? 이유가 있어야만 오는 제자 년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해요.”

사무실로 찾아온 윤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과거 TKM에서 보컬트레이너로 활동해 제인과 하서윤을 키워냈던 여자.

캐스팅 박 팀장이 허구한 날 자기가 키웠네 어쨌네 하고 다녔지만, 진짜 그녀들의 재능일 빛나게 만든 장본인.

최고의 보컬 트레이너였던 그녀의 단호한 말에 나도 조금 주눅이 들었다. 노래를 만들 줄만 알지 부르는 것엔 한참 모자라는 지식이었으니까.

문득 서한빛을 이 자리에 안 부른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실망 어린 표정이 선하게 그려졌거든.

“그렇군요···.”

아쉬운 목소리가 나갔다.

그럼에도,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절절했다. 가창자가 못 부를 멜로디를 들려줄 리 없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애초에 불가능한 현상인 멜로디잖나.

불가능 따위야······.

“근데 해보죠.”

“네?”

갑자기 풀린 빗장에 갸웃거리는데, 윤 교수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져 하서윤에게로 붙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게 가능할 수 있다는 걸 최근에 봐버려서.”

어리둥절한 하서윤을 보며 윤 교수가 피식 웃는다. 그리고 다시 날 보며 말했다.

“그러니 해보죠. 3옥 라가 불가능해도 지금보단 훨씬 나은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직접 들어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일단 녹음 된 것만으로도 잘못된 버릇들이 너무 많아. 어디서 배운 거야 대체?”

“JME이라던데요?”

옆에서 하서윤이 툭 말했다.

“음원 조작하는 놈들 답네. 연습생들을 제대로 키울 생각은 안 하고 하여튼.”

윤 교수도 툭 받아쳤고.

둘의 핑퐁게임은 역시 누군갈 욕할 때 제대로 빛이 났다.

퍽 닮은 사제지간이었거든.

두 사람의 욕을 느긋하게 듣고 있는데, 갑자기 윤 교수가 고개를 홱 돌려날 보더니 입술을 열었다.

솔직히 움찔했다. 좀 전까지 걸걸한 욕들이 나오던 입이라.

“아 참.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당연히 페이 얘기이려나? 했는데, 의외로 전혀 다른 게 튀어나왔다.

이건 뭐랄까, 마치······청탁?

“얘 좀 받아줘요.”

“네?”

윤 교수가 가리키는 하서윤을 보았다.

사전에 얘기가 된 건 아닌지 하서윤조차도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다음 대목에선 얼굴이 벌게지기까지 했다.

“대표님한텐 얘가 필요 없을진 몰라도, 얘한텐 대표님이 필요하니까.”

#“웬 청탁.”

하서윤이 원 튠 레코즈 계단을 내려오며 윤 교수에게 말했다. 앞서 내려가던 윤 교수가 멈춰 서서 웃었다.

“좋아한다며.”

“네? 무, 무슨 소릴! 누가 누굴 좋아해요!”

“네가 기로 프로듀서 노래를.”

“아?”

“왜 발작이람. 그래서 여기서 활동하고 싶다고 그러지 않았니?”

“···그, 그랬죠. 노래 때문에.”

“근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더워서요. 와, 덥네. 더워.”

“아직 쌀쌀하구만 뭘. 어째 겨울이 점점 더 길어져.”

윤 교수가 능글맞게 웃었다. 하서윤은 그녀에게 농락당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괴랄한 표정이 되어갔고.

“이제 자주 보겠네?”

“피해 다닐 거예요.”

“찾아다닐 거야.”

“바쁘신 분이 퍽이나.”

“애 한 명 가르치는 거로 뭘. 걔가 너처럼 지랄 맞으면 모를까.”

날카로운 스매시로 핑퐁게임의 승자가 된 윤 교수가 손을 시크하게 올렸다.

“간다?”

윤 교수의 차에 시동이 걸렸다.

하서윤은 가만히 서서 그 차가 천천히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러다 조금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밴에 올라탔다.

#솔직히 윤 교수가 틀렸으면 좋겠다.

서한빛이 말도 안 되는 성장으로 멜로디를 완벽하게 소화해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윤 교수가 트레이너로서의 역할을 잘해줘야겠지.

이게 무슨 아이러니람.

어쨌든, 반 시름쯤은 던 것 같다.

하서윤의 말마따나 윤 교수가 못 하는 건, 국내의 모든 보컬 트레이너들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얼마가 걸리든, 일단은 그녀를 믿고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기 위해서 독립했잖나.

지금이 안 된다면 방법을 찾을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가지려고.

“어, 장 대표님! 안녕하세요!”

마스크를 썼다. 그런데도 알아봤다는 건···.

“네, 안녕하세요.”

TKM 직원이란 얘기지.

아직 망원동 근처에 집을 구하지 못해 청담동에서 출근하고 있다. 차도 없어서 이렇게 도보로.

그러다 보니 TKM 직원들과 중간중간 마주치는 일도 흔했다. 나름 시간대를 피한다고 피했는데, 이놈의 회사는 일을 안 하는지 직원들의 외출이 자유롭다. 덕분에 마주칠 때마다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

두어 번 낯익은 직원들과 인사를 하고.

얼른 집하고 차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건대입구 방향의 지하철에 올라탔다.

만석이라 기둥 하나를 부여잡고 자리를 잡았다.

먼 길이지만 지루할 걱정은 없었다. 들어야 할 노래는 차고 넘치니까.

어디 즐거운 음악 감상을······.

“JME 관계자들 줄줄이 구속됐네. 이 새끼 봐라. 팔에 문신까지 새기고.”

조금만 있다가 해보자.

나와 같이 지하철을 탄 남자들의 목소리에 자연스레 귀를 기울였다.

“매니저들 중에 그런 쪽에서 생활하던 사람들도 많다며.”

“맞아, 팬들한테 주먹질해서 뉴스 나오기도 하고 그랬잖아.”

“그 와중에 JME 대표는 미국에 있었다더라. 사업 확장하려고. 완전 날벼락 맞았네.”

“사업 확장하려다가 축소하게 생겼네.”

“사재기 논란 이거, 트릴로지가 해외 어디 레코드 회사랑 손잡고 해외 진출한다는 기사가 나오자마자 터진 거잖아.”

“부리나케 입국해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는데, 이게 수습이 될만한 사건이냐.”

“또 모르지 이러다 시들시들해지면 어영부영 넘어갈지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누군가는 얘기한다. 적어도 음원 사재기에 한에선 피해자가 없지 않냐고.

개소리지.

차트에서 한 순위씩 밀리고, 심지어는 차트에 들었어야 했는데 들지 못한 뮤지션들이 있잖나.

그리고 그들의 정성 어린 곡들을 듣지 못한 우리도 피해자일 테고.

“그나저나, 난 이거 증거 터트린 사람이 궁금하더라.”

“JME 내부 관계자는 아니란 얘기가 있던데?”

“그냥 그렇게 한 말이겠지. 보복당할 수도 있고 하니까.”

“자랑스러워할 일인데 숨겨야 한다니. 참······.”

그것 때문에 숨기는 건 아닌데 말이지.

저런 말에 뿌듯해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씁쓸할 뿐이다. 음악계를 망치는 종양 같은 놈들이 이제야 발견된 게.

덕분에 오늘은 노래 대신 생각을 좀 하다가 지하철에서 내렸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직원들이 꽤나 분주했다. 앨범 패키지에 관한 얘길 하고 있었다.

디지털 싱글인데 웬 앨범 패키지냐?

적어도 투자자들에겐 실물 앨범을 선물로 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김지희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일종의 기념품이었다.

“따로 책자를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겠네요. 패키지 안에 다 넣는 건 안 될 것 같네요.”

“뭐가요?”

다가가 질문을 던지자 시선이 몰려들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요. 근데 무슨 일 있어요? 심각해 보이는데.”

“그게······.”

김지희가 옆에 있던 종이뭉치를 들고 다가왔다.

“투자자 목록이랑 투자금 정리 내역이에요.”

“어쩐지 무겁네요.”

“어쩐지가 아니라 정말 무거운 거일 거예요. 거의 만 명인데. 이래선 패키지에 이름을 새기는 건 힘들겠어요.”

“진짜 많긴 하네요. 사전 투자가 만 명이면······.”

잠깐.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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