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최약체 (2)
잔잔하게 찍히던 음표가 풍랑을 만난 것처럼 출렁이더니 어느 순간 크게 도약했다.
여자 평균 음역인 3옥타브 도를 훌쩍 뛰어넘는 높이.
고음역에 타고난 이들이 두성이나 가성을 쓴다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정도였지만 문제는 직후부터였다.
이제 시작이라는 듯 점점 더 올라가는 멜로디. 천장이 보이는 족족 깨부수며 올라간 멜로디가 끝끝내 하이(High)를 찍었다.
3옥타브 라.
그것도 5초 이상 끌어야 하는.
그야말로, 마의 구간.
헛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내가 뭘 만든 건가 싶어서.
아니, 멜로디가 나한테 대체 뭘 만들라고 시킨 건가 싶어서.
후렴의 주된 음들을 애초에 이렇게 픽스한 건 멜로디잖나. 물론 거기다 매운맛 소스를 첨가한 건 나지만.
“이건 하서윤도 못 부르겠는데?”
그녀를 떠올린 건 무시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뮤지션들 중 가장 안정적인 고음을 구사하기 때문이었지.
그렇담 제인은 가능할까?
잠깐의 고민 끝에 느릿하게 주억거렸다.
‘가능할 것 같긴 하네.’
물론 샌프란시스코에서 함께 작업했던 그때의 제인이 아닌, 지금의 제인이라면 말이지.
이러니 기대 안 될 수가 있나.
지금의 제인 정도는 되야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노래를 그 어린 여학생이 부른다는 게 날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더듬더듬 목소리를 기억에서 찾아내 돋구어 봐도 노랠 부를 땐 어떤 음색을 낼지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단지 예전보다 더 예민해지고, 정확해진 청력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이러니 더 미치지.’
완성된 멜로디 트랙을 몇 번이고 반복재생하다가 기어코 또다시 작업실을 나섰다. 카운터에 있던 여직원이 날 보더니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은다.
“그러다 문 닳겠어요.”
푸스스 웃으며 냉장고 쪽으로 다가섰다.
문이 열렸다.
냉장고 문 말고, 사무실 문이.
“저···아, 안녕하세요.”
조심스레 열린 문 사이로 앳된 얼굴이 나타났다. 지난번처럼 화장이 짙지도, 마스카라가 번져 있지도 않았지만, 분명히 그 여학생이었다.
나와 여직원의 시선을 동시에 받은 여학생이 쭈뼛거리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그···제가 누구냐면···.”
“어서 와요!”
#“놀랐죠? 우리 대표님이 좀 충동적이에요.”
여직원이 따뜻하게 데워진 허브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감,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서한빛에게서 눈을 못 떼고 있는데, 여직원이 내 쪽에도 잔을 올린다.
자연스레 시선이 내려갔다.
“저 커피라고 했는데요?”
“캐모마일이 심신 안정에 좋아요.”
“제 심신이 어때서···.”
“어떻긴요. 지금 애 잡아먹을 것 같은데요?”
서한빛을 보았더니 딸꾹질하듯이 흠칫 놀랜다. 내 몸은 어느새 달려나갈 것처럼 앞으로 쏠려 있었고.
‘아···.’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뒤로 물렀다.
그러자 여직원이 싱긋 웃으며 트레이를 들고 나갔다.
“그럼 건설적인 대화 나누세요~.”
둘만 남은 작업실에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서한빛은 아직 이 상황에 적응이 안 되는 듯 계속 내 눈치를 봤다.
나름대로 건설적인 할 말들을 머릿속에 정리하고서 입을 뗐다.
“잘 왔어요. 우리 본 적 있는데, 기억나요?”
그러자 서한빛이 몹시 창피한 사람처럼 시선을 피하고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한다.
“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하긴, 그랬지.
이치구는 성나서 날뛰고, 서한빛은 울어서 마스카라까지 번지고.
주억거리며 다음 말을 준비하는데, 서한빛이 할 말이 남았는지 말을 이어갔다.
“엄청 고민했어요. 와도 되는 건지. 괜히 왔다가 왜 왔냐고 창피당하는 건 아닌지.”
“제가 와달라고 했는 걸요.”
“솔직히 믿기 힘든 얘기였으니까요. 그냥 일개 연습생일 뿐이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프로듀서님께서 손을 내미셨다는 게. 게다가 말한 사람이 종운 오빠기도 했고···.”
아무래도 내가 보낸 파랑새가 문제였나 보다. 머리가 노라니까 노랑새인가? 아무튼.
나도 별수 없었다. 걔 아니었으면 서한빛이란 이름을 찾는데도 꽤 애를 먹었을 테니까.
그리고 결국 이렇게 오긴 왔으니 다행···.
“종운이 오빠가 진짜 산업 스파이였을 줄이야.”
···산업, 뭐?
황당한 표정으로 끔뻑였다.
할 말을 잊고 그러는 사이, 서한빛이 우물쭈물하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저 할 말 있어요!’라고 외칠 것 같은 표정으로.
조금 더 기다리자, 그녀가 말했다.
“제가 정말 주제 넘는다는 거 아는데, 불러주셨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얼른 잡아야 하는 기회인 것도 아는데, 그래도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뭘 그렇게까지나···아무튼, 들어볼게요. 얘기해봐요.”
멋쩍은 건 둘째치고, 방금 그녀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 궁금해 귀를 기울였다.
“혹시, 걸그룹 만드세요?”
“아뇨?”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비장하기까지 한 서한빛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진다. 그걸 보며 나는 조금 궁금해졌고.
“왜요? 걸그룹은 싫어요?”
“싫다기보단······제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어요. 사실, JME에서 나온 결정적인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거든요.”
서한빛이 속내를 털어놨다.
원래는 하고 싶은 음악이 있었고, 그걸 위해 준비 중이었는데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고. JME라는 대형 기획사라는 이름과 주변의 푸쉬에 연습생으로 들어갔지만 결국 캐스팅 때 했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그렇게 원치 않는 걸그룹을 할 수는 없어 JME를 나온 거라 한다.
얘기를 들으며 끄덕거렸다.
“안 어울리긴 하죠.”
이 와중에도 힘있게 들려오는 멜로디가 말해준다. 이걸 아무리 그럴듯하게 편곡해도 댄스곡, 특히나 아이돌 곡으로는 확실히 무리지.
무심코 한 말에 서한빛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제 노래 들어보셨어요?”
“아뇨.”
“제 춤을 보셨나요?”
“아뇨.”
“그럼 제 어떤 점을 보고 여기로 부르신 거예요?”
그녀가 당차게 물어왔다.
난 세차게 당황했고.
멜로디가 들려서?
쩝. 항상 해결책이 되지 않는 진실이지.
생각을 속을 삼키며 괜스레 캐모마일 티를 한 모금 머금었다. 심신의 안정이 필요한 것 같아서.
대답이 없자 서한빛이 지레짐작해서 물어왔다.
“척보면 척, 이런 건가요?”
“비슷···해요.”
척 들으면 척 정도 되려나.
뒷머릴 긁적이며 말했다.
“곡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게 서한빛 학생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이번에도 조금 믿기 힘든 표정이다. 하긴, 노랠 들어본 적도 없다면서 자기 곡에 어울릴 것 같다니. 내가 말해 놓고서도 이런 모순이 없네.
더 이상해하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제일 자신 있는 거로.
“이럴 게 아니라 어떤 노랜지 한번 들어볼래요?”
*잠시 후,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았다.
가득 올려져 있는 장비들을 신기한 듯 뜯어보던 서한빛이 화면이 틀어지자 가만히 기다린다.
얼떨떨해하는 표정은 어느새 기대와 설렘, 그리고 긴장 같은 것들로 버무려져 있었다.
트랙들이 모두 불어와 지고, 곧바로 노래를 틀었다.
멜로디와 코드 정도만 잡혀있는 스케치.
이것만으로 서한빛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거다. 미완성일지라도 이건 그녀의 멜로디, 그녀의 테마니까.
저 봐, 벌써부터 얼굴빛이 달라지잖아.
이번엔 마스카라가 아닌,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후렴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짙어진다.
이제 곧 후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기대하며 느긋하게 턱을 괴는데, 갑자기 서한빛의 표정이 급변했다. 얼굴색이 변하고 입꼬리가 착 가라앉는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주 몹시 실망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 얼굴로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중간중간, 서한빛의 얼굴색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그 와중에도 결코 밝아진 적은 없었다.
더욱 어두운 표정으로 이따금 뭔가를 확인하듯 입을 벙긋거릴 뿐이었다.
마침내 노래가 끝이 났다.
어떻냐는 질문을 잊은 나에게 오히려 서한빛이 먼저 입술을 달싹였다.
“이거······.”
치덕치덕한 목소리다. 아쉬움이 그득한.
“멜로디는 완전히 완성된 건가요?”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뇨, 너무 좋았어요. 듣는 내내 꿈만 같을 정도로요. 근데······.”
근데?
“제 음역대가 아녜요.”
뭐?
그녀의 표정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곧바로 다른 의문이 덮쳐왔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직후, 서한빛의 노랠 들었다. 알아야 했으니까. 얼마나 음역대가 다른지.
이치구와 여러 일이 있는 동안, 그토록 듣고 싶었던 노래.
역시나 음색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1급수 계곡물처럼 맑았고, 폭포처럼 힘 있었다. 다만, 음역만큼은 그녀의 말대로였다.
모자랐다. 그것도 한참이나.
‘키를 낮춰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키라는 게 노래방에서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내리기 어렵다는 게 아니다.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진달까.
곡의 흐름 자체가 조금씩 달라져 버리고, 그건 결코 작곡가의 의도라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아?’
무려 멜로디가 들려준 음들이다.
근데 멜로디가 들려온 당사자가 그걸 못 부른다니.
답안지를 보고 다시 문제를 봤는데, 답이 객관식 안에 없는 것 같이 혼란스럽다.
내 경험상, 멜로디가 들리는 조건 자체에 당사자의 부를 준비도 포함되는 것 같았는데······그게 아니었던 건가?
그때, 모니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서한빛의 노래가 멎었다.
“말도 안 돼요.”
녹음된 노랠 들은 하서윤이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고개를 저었다.
찌푸려져 있던 인상은 펴졌지만, 아직 황당함은 남은 표정으로 날 본다.
“너무 버겁게 부르잖아요? 근데 이 키 그대로 가겠다고요?”
“연습을 하면 바뀔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요?”
“열심히?”
“그게 무슨···뭐, 반 키 차이 나면 이해라도 하죠. 지금 하이가 4키나 차이 나요. 게다가 곡 자체 난이도가 정말 괴랄해서 호흡도 딸리고요.
애가 절대 노랠 못 부른다는 건 아녜요. 이 나이에 이 정도라니, 오히려 타고 났어요. 근데 이건 곡이 문제잖아요. 애를 세기의 천재 뭐, 그런 거로 본 거예요?”
그러게. 내가 서한빛을 그렇게 봤나 보다. 세기의 천재마냥.
그래서 실망했고. 서한빛 앞에선 그렇지 않은 척을 하기 위해 애를 썼었다.
“······.”
대체 왜일까. 이번 멜로디는 오류가 있었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그냥 키를 낮춰?’
이건 피하고 싶었다. 이미 해봤는데 너무 느낌이 달라지더라고. 원하던 그림이 아니었다.
그럼 어쩌지?
어떻게 해야···.
“그 표정 못 보고 있겠네.”
갑자기 하서윤이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내 표정이 어땠길래?
기껏해야 고민하는 얼굴이었겠지.
미간 좀 구기고, 눈살 좀 찌푸리고.
근데 그게 그렇게 보기가 싫었나?
저렇게 박차고 일어날 정도로?
황당해서 올려다보는데, 하서윤이 더욱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와줄게요.”
“네?”
“도와준다고요. 그러니까···그, 그 얼굴 좀 펴요! 못 보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