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214화 (214/221)

214. 악연일까, 기회일까 (4)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햇빛이 들어와 만든 그림자들이 어느새 성큼 이동했을 때쯤.

커피 대신 물을 네 번이나 비운 남자가 긴 이야기를 마쳤다.

조금은 후련한 입꼬리였고, 여전히 참담한 눈빛이었다.

스물넷. 김준호란 이름을 가진 학생의 시선이 내 앞에서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의 마지막 말들이 귀에 남아 맴돌았다.

‘도움받을 곳이 어디에도 없더라고요.’

‘그래도 작곡을 하는 사람들은 내 얘길 들어주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커뮤니티에 올렸어요. 그런데 그마저도 잘 안 돼서 정말 아무도 내 얘길 들어주지 않는구나 싶었는데······.’

‘대표님이 들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괴었던 턱을 풀었다. 얼얼하다. 이를 하도 꽉 물어서.

나는 그가 느꼈을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 사람은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고, 나는 아무것도 못 하게 될 것 같은 기분.

사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고 어리숙해서, 그래서 당할 수밖에 없는 덫이었다.

‘후우······.’

최대한 소리 안 나게 한숨을 토해냈다. 얘길 듣는 내내 빛바랜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다 바짝 긴장한 김준호의 얼굴을 보고 얼른 표정을 풀었다.

또 녹음실 안에서처럼 보였으려나.

입꼬릴 애써 말아 올리며 김준호에게 말했다.

“혹시, 작업 파일 보여줄 수 있어요?”

“······네?”

“비교를 좀 해보고 싶은데. 어떤 식으로 짜깁길 했는지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물론 원치 않으면 안 보여줘도 괜찮고요.”

당혹스러운 시선이 나를 향한 것도 잠시, 김준호가 여길 들어 온 지 한 시간 만에 처음으로 힘 있는 목소릴 냈다.

“아녜요! 당연히···당연히 보여드릴 수 있죠. 클라우드에 저장도 되어 있어요.”

거기에 나도 덩달아 힘있게 답했다.

“잘됐네요. 그럼 지금 볼까요?”

우리는 곧장 책상으로 자릴 옮겼다.

땀에 젖은 손을 자신의 맨투맨 티에 슥슥 닦아내고 마우스를 잡는다.

그게 묵직한 돌덩이라도 되는 것마냥 힘겹게 자신의 파일을 내려받는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요.”

“그게 잘 안 되네요. 프로듀서님께 노랠 들려드리는 것만으로도 안 믿기고, 떨리는데, 작업 파일까지 보여드리다니······정리 좀 해 놓을걸. 정리도 제대로 안 돼서 트랙도 뒤죽박죽일 텐데······.”

“어후, 그러게요. 심하네.”

화면이 떠오르자마자 내가 장난스레 던졌다.

그 말에 맞은 개구리···아니, 김준호가 우뚝 멈췄다. 얼굴은 울상, 죽상을 넘어서 초상이다.

뮤지션에게 작업 파일은 부끄러운 부분이지. 보름쯤 방치한 침대 밑이나 옷장 안처럼.

내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에요. 이 정도면 엄청 깔끔한데요?”

그냥 하는 소리라 생각했는지 표정이 여전했다.

“안 믿네. 내 작업 파일 열어서 진짜 뒤죽박죽이 뭔지 보여줘요? 깜짝 놀랄 텐데?”

그제야 웃는 김준호를 뒤로하고 노랠 틀었다.

이미 들어본 적 있는 노래라고 해야 하나.

확실히 부분부분 현 차트 1위인 트릴로지의 싱글 곡과 유사한 점들이 보였다.

다른 노래들까지 전부 해부하면 뭔가 더 보이는 게 있을 것 같다.

어느 정도 듣다가 스페이스 바를 경쾌하게 눌렀다. 노래가 멈췄다. 나는 고갤 돌려 김준호를 보았고.

무슨 오디션 보러 온 것 같은 표정이다.

합격, 불합격을 외쳐야 할 것 같은걸.

내가 팔걸이를 툭 쳤다.

“오케이. 한 번 해봅시다.”

“네? 뭘요?”

눈을 껌뻑거리는 김준호.

커피잔을 들다 말고 모니터에 떠오른 작업 파일을 가리켰다.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 도와줄게요. 곡 찾아와 봅시다.”

“저, 정말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다.

끄덕이자 더 황당한 질문이 돌아왔다.

“왜요? 아니, 그러니까······대표님이 왜 저같은···.”

분명 도와준다고 불렀는데, 왜냐니.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김준호가 진정될 때까지 웃기만 했다.

글쎄. 왜일까.

머릿속에선 이유랄 것들이 떠올랐다.

내가 당한 일이라서? 어느 정도는 맞겠지.

복수 할 기회라서? 그것도 조금은 맞을 거고.

하지만 확실한 건, 그런 것들이 전부는 아니란 거다.

‘내가 이걸 원했었지.’

누군가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때의 내가 간절히 바랐었지.

눈앞의 김준호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비록 난 그런 사람을 못 만났었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쉽진 않다는 말씀이죠? 네, 맞아요. 그게 아쉽더라고요. 그렇죠. 알겠습니다. 궁금한 점 있으면 또 연락드릴게요.”

여직원이 저작권 전문 변호사와의 전화를 끊었다.

기다리던 시선들이 쏟아졌다.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김지희와 주재윤이었다.

그들도 이 상황에 부당함을 느꼈는지 상당히 전투적인 표정들이었다.

“뭐라셔요?”

“역시나야. 고지의무위반이나 저작권 침해 같은 거로 문제 삼을 순 있지만, 어려운 상황인 건 확실하다네.”

여직원의 밋밋한 대답에 두 사람의 표정이 푹 죽었다.

“하아, 답답하네요. 진짜.”

김지희가 가슴을 쳤다.

주재윤은 홍보담당자답게 다른 쪽으로 계산을 돌리고 있었다.

“이럴 땐 공론화가 가장 효과적이긴 할 텐데요.”

“그러기엔 JME 이미지가 요즘 너무 좋지 않아요?”

“그건 그래요. 며칠 전엔 트릴로지가 자기들은 인성교육부터 성교육까지 받는다는 얘길 예능에서 했는데, 그것도 반응이 엄청 좋았더라고요. JME 소속은 믿고 덕질해도 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주재윤이 바람에 너풀거리든 끄덕였다.

옆에 쭈그려 앉아 통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던 여직원도 거들었다.

“실제로 사고 친 연예인이 없기도 하지. 하물며 저작권 문제 같은 건 깨끗했고. 그게 없는 건지 없앤 건진 몰라도.”

“자칫 성급하게 터트렸다간 반대로 김준호 씨한테 역풍이 불 수도 있겠네요. JME에서 다른 큰 사고가 같이 터져준다면 모를까.”

주재윤이 입안이 텁텁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생수를 깠다.

김지희도 한 통을 거의 다 마시더니 은근히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뭔가 정의의 사도라도 된 것 같네요.”

“그니까.”

여직원이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찬다.

“그 친구 이야긴 안타깝긴 한데, 솔직히 우리라도 피디님을 말려야 하는데 말이지. 투자도 쭉쭉 진척이 있는 마당에 이런 일에 휘말려서 좋을 게 없잖아. 곧 제대로 레이블 시작한다고 보도자료까지 낼 건데.”

하지만 막상 반대할 생각은 없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옮았어, 옮았어.’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게 칭찬처럼 들리는지 배시시 웃는 주재윤과 김지희였다.

종이에 마침표를 찍고 허리를 편 여직원이 피디님께 가져다드리겠다며 대표실 겸 작업실로 향했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에게 김지희가 물었다.

“근데, 피디님은 뭐하고 계세요? 아까부터 한 번을 안 나오시네.”

이에 여직원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가보니까, 무슨 곡 작업을 하시는 것 같던데?”

“에? 갑자기요?”

“그러게. 저작권 얘기하다가 갑자기 웬 곡 작업이신지 모르겠네?”

#다음날.

이치구가 기꺼운 얼굴로 맞은 편에 앉았다.

표정이 짜증 나게 밝다. 여전히 사근사근거리고.

“미리 연락을 주고 오셨으면 식사자리라도 대접해드렸을 텐데요.”

큰일 날 소릴. 누구 먹다가 체하라고.

“얼른 얘기가 하고 싶어서요.”

“하하, 생각이 금방 끝나셨나 봅니다? 하긴, 고민만 계속해봐야 뭐하겠어요. 생각이 많아지면 될 일도 안 된다니까요? 안 그래도 제가 정말 좋은 조건을 준비했는데, 들어보시겠어요?”

“일단 제 얘기부터 하죠.”

“네? 아, 네. 대표님 먼저 얘기하세요.”

이치구가 살짝 당황해하며 끄덕였다.

내가 팔짱을 끼고, 턱을 긁적였다.

곤란하다는 듯이.

“제가 이상한 얘길 들어서요. 트릴로지의 싱글 곡이 훔친 곡이었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치구가 몸을 들썩였다. 표정은 사나웠고, 눈빛은 이글거렸다.

“누가. 누가 그래요?”

예전의 나는 이 모습이 그렇게 무서웠다.

하긴 누구라도 간이 쪼그라들 법하지.

근데 오늘은 내가 그 누구라도가 아닌가 보다.

“제가 그랬나요?”

덤덤하게 물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이치구가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풀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제가 흥분을 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기엔 얘기가 너무 자세하던데요. 신빙성도 있어 보이고.”

“예?”

또다시 이치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핸드폰을 슬며시 올려놨다.

“뭐하시는······.”

뭐하긴. 노래 틀지.

버튼을 누르자 노래가 흘러나왔다. 김준호가 가지고 있는, 그가 만든 원곡들.

당황한 이치구가 뭔가를 말하려 했고, 내가 얼른 손을 들어 막았다.

들어야지. 이거 어제 내가 열심히 작업한 건데.

김준호의 곡들을 악기 하나, 마디 하나 단위로 분해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악기들을 입혀봤다.

리얼 드럼을 하우스 드럼으로, 일렉 기타를 SAW 리드로, 건반을 브라스 밴드로. 그랬더니 재밌는 결과물이 나오더라고.

여전히 김준호의 곡이었다. 하지만 악기 구성이 완전히 달라지고, 유사한 마디가 반복되면서 꼭 전혀 다른 곡처럼 들렸다. 그리고 달라진 곡은 마치······.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지 않아요? 나한테만 트릴로지 싱글 곡이 들리나?”

가뜩이나 비슷한 부분들이 더욱 유사해져 있었다. 누가 들어도 ‘어?’ 할 정도로.

이치구의 표정이 볼만했다.

여전히 당혹스러워 보였고, 한편으론 이 상황이 불쾌한지 목에 핏대가 서 있었다.

그러다 퍼뜩 주변을 둘러본다.

오늘도 어김없이 라운지에 날 앉혔다는 걸 깨달은 거다.

이미 이쪽이 시끌시끌하니 몇몇 시선들이 계속 방문 중이었다.

“대표님. 일단······일단, 미팅룸으로 가시죠.”

“아깐 여기가 좋으시다더니.”

“아니, 그게 아니라······.”

붉어진 얼굴을 보며 사뿐히 일어났다.

“뭐, 그러죠. 회사 내에서도 비밀이 많으신 분 같은데.”

“······.”

그는 대답 대신 서둘러 움직였다. 말없이 복도를 걸어 도착한 미팅룸. 문이 닫히자마자 이치구가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밀었다.

“뭡니까.”

“뭐가요?”

“어디서 그런 이상한 얘길 듣고 와서 이러시는 거예요?”

“이상한 얘기가 확실한가요?”

“당연하죠···! 그딴 소릴 해대는 관종들이 한 둘인 줄 알아요?”

“제가 아는 건, 김준호 씨 한 명이라서요. 관종도 아닌 것 같고.”

내 말에 이치구의 표정이 한층 더 솔직해졌다. 앞에서 사근거리던 그 얼굴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 새끼가 대표님을 찾아갔어요?”

“제가 불렀죠.”

“하! 무슨 상황인가 했더니.”

이치구가 한 발짝 물러나며 빙글 몸을 돌렸다. 벽 쪽을 보며 헛헛하게 웃는다. 그리고 다시 날 보았을 땐 표정관리가 잘 된 얼굴이었다.

“대표님, 저희 약점 잡으려고 그러셨어요? 그러시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좋은 조건 제시했을 텐데요.”

이런 거였냐는 듯 웃으며 묻는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나도 슬쩍 장단을 맞춰 췄다.

“그쪽 조건이 저한테 좋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요.”

“이야, 대표님 무서운 사람이셨네. 근데 아쉽게도 그 문젠 저희 약점이랄 것도 없어서요. 법적으로도 이미 다 해결된 문제라···. 그래도 그거랑 별개로 대표님이 원하시는 조건을 들어보겠습니다. 저희도 대표님이 필요하거든요. 말씀해 보시죠.”

흔쾌하다 못해 유쾌할 지경이다.

아주 다 들어줄 기세네.

내 조건이 뭔 줄 알고.

“일단, 트릴로지와는 작업 안 합니다.”

“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아, 오해하실까 봐서 하는 말인데 아예 JME이랑 작업을 할 생각이 없단 얘기에요.”

“대표님?”

“그리고 훔친 곡도 제자리로 돌려놓으셔야 할 것 같은데···.”

“이 봐요.”

날 선 말투가 으르렁거렸다.

“장난해요?”

“그런 거로 보입니까?”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던 눈빛을 보며 나도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예전에 하지 못했던 얘길 비로소 꺼냈다.

“곡 주인한테 돌려줘요. 안 그럼 라운지에서 떠들었던 것보다 더 시끄러워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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