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악연일까, 기회일까 (3)
“기로 프로듀서 만났다면서?”
상석에 앉은 중년 남자가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JME 엔터테인먼트의 매니지본부 본부장.
이미 그의 귀에까지 들어간 사실에 이치구는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론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다.
“네. 지금이 트릴로지를 제대로 띄울 절호의 기회인 것 같은데, 기로 프로듀서 곡을 받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JME 본부장의 짙은 눈썹이 슬쩍 올라간다. 덩달아 그의 시선도 이치구에게로 올라갔다.
“그래서, 준대?”
“생각을 좀 해보겠답니다. 독립한다고 한창 바쁠 때 아닙니까.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 보였습니다.”
“그럼 결국 확정은 아니란 거네?”
JME 본부장이 말꼬릴 올리며 눈살을 찌푸리자 이치구가 얼른 답했다.
“그쪽에서 만족할만한 조건을 고민 중입니다.”
“그래?”
이치구의 대답에 JME 본부장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주억거렸다.
“뭐, 아이디언 나쁘지 않았어. 성사만 된다면야 국내 최고 프로듀서를 등에 업게 되는 거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은데. TKM 나온 후 첫 작업이란 화제성도 최고일 거고. 근데 어찌 됐든 성사가 돼야 말이지. 그치?”
“꼭 좋은 결과 가져오겠습니다.”
눈을 빛내는 이치구를 보며 JME 본부장이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고갤 들어 올렸다.
“아. 중국 쪽은 어떻게 됐어?”
“잘 마무리 지었습니다.”
JME 본부장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흡족한 표정으로 그가 칭찬했다.
“일 점점 더 잘하네.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이치구가 깍듯이 인사를 마치고 본부장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꾹 참았던 미소가 터져 나왔다.
머릿속에 그렸던 것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성공이 코앞에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이 바닥이나 저 바닥이나 별다를 거 없다니까.’
몸으로 구르고, 더러운 꼴이 넘쳐 흐르는 음지 생활이나.
고상한 척하면서 뒤에선 온갖 추잡한 일들이 일어나는 연예계나.
그에겐 매한가지처럼 보였다.
‘어쩔 땐 오히려 그때가 더 깨끗했던 것도 같다니까?’
얼굴이 벌게져라 웃던 이치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복도를 걸어 자신의 방이 있는 2팀 사무실로 들어서자 직원들이 인사를 해온다.
대충 손을 휘적거리며 방으로 들어서는데, 실장이 얼른 뒤따라 들어왔다.
“팀장님.”
“어, 그렇지 않아도 너 부르려 했는데. 한빛이 걔 연습생 그만둔대서 내가 잘 타일렀거든?”
“뭐라고요?”
“1억 내면 나갈 수 있다고, 흐흐.”
황당한 표정의 실장을 보며 이치구가 음흉하게 웃었다.
“아무튼, 주변 연습생들 시켜서 슬쩍 떠보라 해. 이제 어쩔 셈인지. 아직도 나갈 생각인 건지.”
“네, 알겠습니다.”
“오케이. 그래서 넌 뭐?”
이치구의 물음에 실장이 들고 있던 패드를 들어 올렸다.
“그······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기다려봐. 갑자기 담배 땡기니까.”
이치구가 곧장 창가로 향하더니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열어젖혔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치익. 불이 붙고, 깊에 한 모금 빨아들인 이치구가 메케한 연기를 내뱉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뭔 일이길래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야?”
패드를 받아든 이치구가 거드름을 피우며 화면을 읽어내려갔다.
작곡가들 커뮤니티에 올라온 꽤 긴 글.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대형 기획사 팀장이 자신의 곡들을 훔쳤고, 그걸로 앨범까지 냈다는 이야기.
“와, 시발 이렇게 익숙할 수가. 이거 내 얘기지?”
장난스레 묻는 것 같지만 눈빛은 서늘했다.
실장은 바싹 긴장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을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움찔거리는 실장을 뒤로하고, 이내 험악한 표정을 만든 이치구가 거칠게 패드를 내려놨다. 대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 개새끼가······.”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던 이치구가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소릴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너 계속 음악 하면서 살고 싶으면 입 닥치고 조용히 있으라 했지? 너가 좋아하는 곡이나 쓰면서 살면 될 거 아냐. 그 곡들이 그렇게 아까워? 곡 꼴랑 몇 개 때문에 아예 업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해줘?!”
#작업실을 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모두가 한데 모여 업무와 씨름 중이었다.
아직 간판도 없는 레이블에 무슨 일이 그렇게 많겠나 싶지만, 오히려 더 바쁜 것 같다.
아더 레이블에서 하던 일과는 관계없이 투자자와의 연이은 미팅으로 관련 자료를 정리하느라 모두가 골머릴 쌓고 있었다.
작게 헛기침을 하자 시선이 모였다.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들을 보니 괜스레 미안해지네. 심지어 지금 일감을 더 가져왔으니······.
내가 입을 열려는데, 여직원이 먼저 갸웃거렸다.
“피디님 표정이.”
“네?”
“녹음실 들어가셨을 때 표정인데요? 혹시 화나셨어요?”
끙. 화가 나긴 났지.
그게 왜 녹음실 들어갔을 때 표정이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뇨, 별로요?”
가늘어진 눈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바쁜 거 아는데, 부탁이 좀 있어서요.”
“네, 말씀하세요.”
“저작권 관련 법들이랑, 그쪽에 오랫동안 일하신 변호사분 좀 수소문해 주세요. 그동안 있었던 사례들도 있으면 더 좋고요.”
“왜요? 누가 피디님 곡 표절했어요?”
옆에 있던 김지희가 벌컥 물어왔다.
표절?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곡들을 교묘하게 짜깁기했으니까.
물론 이번엔 내가 당한 게 아니지만.
“제 얘긴 아녜요.”
“휴, 다행이에요. 깜짝 놀랐네.”
김지희가 안도하자, 주재윤이 미팅 자료를 파일에 꽂으며 얘기했다.
“표절 말고 저작권 쪽으로 가요계에서 가장 큰 사건은 그거 아녜요? 조필서님이 본인이 작사, 작곡한 곡 20개를 무더기로 빼앗겼었던 거.”
여직원이 기억난다는 듯 아아, 소릴 내며 끄덕거렸다.
“나도 깜짝 놀랐었어. 그 노래들이 다 계약서 한 장으로 넘어갔다는 게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거잖아. 꽤 오래전 일인데, 이제야 밝혀진 것도 황당하고.”
“말이 안 나와서 그렇지 아마 아직도 그런 일 엄청 많을걸요? 이제 막 업계에 뛰어든 작곡가들 등 처먹는 거죠. 특히나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하는 중소 기획사들은 더더욱 그런 짓 많이 할 거고요.”
소, 중, 대할 것 없이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이 죄다 썩을 놈들인 건 사실이지만, JME는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기획사란 말이지.
더 괘씸하네.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모니터에 떠오른 글을 다시 읽어내려갔다.
‘판박이야. 그냥 내가 겪은 그대로. 분명히 이치구 짓 같은데······.’
예전 나의 상황과 완전히 똑같았다.
대형 기획사란 이름에 끌려 뭣도 모르고 계약서를 쓰고, 곡을 죄다 가져다 바치고, 쓸 게 없다는 답변을 들은 후 몇 달 뒤에 내 곡들이 짜깁기 된 노래를 듣게 된 것까지도.
이러면 법에 아무 문제가 없냐고? 변호사를 찾아가지 왜 이런 곳에 글을 올리냐고?
글을 쓴 사람도 분명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알아보고, 돌아다니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겠지.
힘들다. 내 곡이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빈약하니까.
설사, 그 근거를 인정받는다고 하더라도 끝이 아니다.
이치구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철두철미한 놈이라 이 문제에 대한 안전장치까지 마련해 두었었다.
주재윤이 말한 조필서의 사례와 비슷하지.
임시로 저작물을 양도한다는 계약서.
단순히 곡을 잠시 빌려주는 거라 생각하고 사인하는 순간, 함정에 걸려든 거다.
그 사인 하나로 작곡가는 법적 싸움에서 이길 확률이 희박해진다. 당연히 그 희박한 싸움에 희망을 걸 돈도 없을 테고. 어찌어찌 일을 키우더라도 기획사를 고소한 작곡가라는 꼬리표가 따라오겠지.
그런 것까지 모두 생각했을 때 밀려오는 답답함이란 이루어 말할 수가 없을 거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고민이 계속된다.
돕고 싶은데, 도울 수 있을까?
일단 연락을 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라도 들어볼까?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새로고침을 눌렀다.
댓글이 달렸을까 싶어서 그랬는데, 갑자기 게시물이 삭제되었다는 창이 떠올랐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것까지 똑같네.”
이치구는 바로 전화를 해왔다.
그리고 온갖 협박을 늘어놨다.
그중에 가장 무서웠던 건 음악을 꿈도 못 꾸게 만들어버린다는 얘기였고.
나는 결국 게시물을 지웠었다.
생생한 기억이 머릿속을 때린다.
그때의 감정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듯한 느낌이다.
'이걸, 누군가가 또 느끼고 있겠지.'
이쯤 되니 고민이 무색해졌다.
#20대 중반 정도의 젊은 남자가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게시물이 삭제되었습니다]
-라는 창을 차마 끄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침대로 무너지듯 누웠다. 얼굴은 창백했고,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북받쳐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당장 내리지 않으면 고소든 뭐든 하겠다는 이치구의 말은 그저 그런 협박처럼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댓글 하나 달리기도 전에 게시물을 지웠다. 눈앞이 깜깜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 또다시 이치구일까, 발작하듯 일어난 남자는 전화나 메시지가 아니란 것에 안도하며 알림을 확인했다.
작곡가 커뮤니티를 통해 온 쪽지였다. 자신을 작은 레이블의 대표라고 소개하며 도와주고 싶다는 의사를 보내왔다.
분명히 기다리던 연락인데.
막상 받으니 의심부터 든다.
이치구의 연락이진 않을까? 이것조차 사기라면?
상대방이 남긴 번호를 핸드폰에 찍어놓고, 한참 동안 망설이던 남자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깐의 신호음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들려오는 목소리.
-여보세요?
이치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었다.
그 밑에 사람에게 시켰을지도 모르니······.
-혹시, 작곡 커뮤니티에 글 올리신 분이신가요? 곡을 도둑맞으셨다던.
상대가 먼저 자신을 알아봤다.
당황한 남자가 어버버하는 동안, 상대는 이미 확신해버린 말투였다.
-맞나 보네요. 그럼······.
다음 순간 들여오는 질문에 남자는 소름이 돋았다.
-JME 이치구 팀장인가요? 곡 뺏어간 사람이?
#몇 시간 뒤.
남자는 마포구에 위치한 3층짜리 건물 앞에 섰다.
아직 간판도 없는, 인터넷에 검색도 안 되는 레이블.
전화 한 통만 믿고 와도 되는 거였을까? 전화한 사람은 이치구라는 걸 어떻게 안 거지? 게시글엔 이름 같은 건 다 뺐었는데?
계단을 오르는 내내 깊어지던 의심이 문 앞에 서니 더욱 짙어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왔으니까.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생각보다 내부는 넓었고, 깔끔했다.
살짝 놀란 얼굴로 두리번거리자, 카운터에 있던 여직원이 다가왔다.
“대표님 연락받고 오셨죠?”
이미 올 걸 전해 들었는지 아무렇지 않게 안쪽으로 안내한다.
남자는 바짝 긴장한 채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여직원이 문고릴 돌리는 순간까지도 남자는 여길 온 게 잘한 선택이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열린 문으로 들어가자,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생각들이 일순, 싹 사라져 버렸다.
“왔어요?”
마침 전화통화를 마친 이곳의 대표가 그를 반겼다. 부드러운 미소로.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놀랐다. 그것도 엄청.
차라리 이치구가 ‘이 새끼 잘 걸렸다’라는 얼굴로 와있더라도 이 정도로 놀라진 않았을 것 같았다.
“기로 프로듀서님?”
알지만. 누가 봐도 그였지만.
그럼에도 남자는 물어봤다.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이라서.
“절 안다니, 제가 사기꾼이 아닌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겠네요.”
여유롭게 웃으며 대표가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요, 얘길 좀 듣고 싶어서 연락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