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악연일까, 기회일까 (2)
마스카라가 눈물에 번져 눈 주위가 거뭇거뭇해진 여자가 날 본다.
아직 미성년자인 것 같지.
꽤 성숙해 보이는 외모지만 특유의 젖살이라고 해야 할까. 앳된 구석이 엿보였다.
은유란이 아무리 동안이더라도 어른의 분위기가 나는 것과는 반대로.
내가 자신을 보는 게 느껴졌는지 눈이 방황한다. 움츠러드는 그녀를 보며 내가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덩치 큰 그림자가 그녀를 은근히 가리며 내 앞에 섰다.
“죄송합니다. 제가 누군지 몰라 뵙고······뒤에 있는 얘가 저희 연습생인데 말을 너무 안 들어서요. 적당히 훈육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저도 예민해져서 그만 프로퓨서······아니, 대표님께도 실례를 범했네요.”
꾸벅 숙여지는 머리.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묘한 감정이 머릴 스치고 지나갔다.
“그나저나, 평소에 정말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이야. 이거 우연이 기가 막힙니다. 아무래도 인연인가 봅니다, 하하.”
악연이겠지.
옆에 있던 여학생을 언제 쥐잡듯이 잡았냐는 듯, 사람 좋은 웃음을 장착했다.
그럴수록 짜증이 치밀어 고운 말이 안 나간다. 오는 얼굴이 곱지 않았거든.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웃을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예?”
내 시선이 정신 사나운 이치구의 팔뚝을 넘어 여학생에게로 향했다. 이를 눈치챈 이치구가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능숙하게 웃음으로 넘겼다. 어느새 손엔 명함 한 장이 들려 있었고.
“아, 소개가 늦었네요. JME 엔터테인먼트 매니지먼트 팀장 이치구라고 합니다.”
“네, 많이 늦으셨네요.”
“······아하하, 그러게요. 죄송합니다.”
관심 없다는 듯 느릿하게 주억거렸다. 여전히 시선은 여학생에게 향한 상태로.
내 반응에 두 어 차례 헛기침을 한 이치구가 은근하게 묻는다.
“이 앞 건물이 JME 사옥입니다.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라도······.”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여학생을 보았다.
멜로디는 멎었다. 그녀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고. 정신이 없어 제대로 듣지 못했지.
“괜찮아요?”
“네······.”
힘없는 목소리 뒤로 힘찬 멜로디가 들린다.
예전처럼 짧게, 듬성듬성 배열되어 들리는 음들.
한음 한음이 모두 엄청난 고음이다.
이 정도면 제인이나, 하서윤보다 음역이 높을지도 모르겠는걸?
내가 이치구를 무시하며 자신을 보자 힘겹게 눈알을 굴리는 여학생. 난처해하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똥 씹은 표정이 급격하게 정화되는 광경을 보여주는 이치구.
그게 참 마음에 들어 입꼬릴 끌어올렸다.
“뭐라고 하셨죠?”
#커피잔이 앞에 놓였다.
예전에도 이 잔이었나? 모르겠다. 커피잔이 거기서 거기지.
“흐음······.”
날 데려온 이유는 짐작이 가는데, 왜 이 사람 많은 라운지인지 모르겠네.
잔을 들어 올리며 주변을 훑었다.
여기저기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다.
아, 이래서인가?
슬쩍 이치구를 봤다. 그도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걸 의도하는 듯한 과장된 움직임도.
‘많은 게 달라졌네.’
과거 이맘때에도 난 JME에 와 있었다.
정확히는 저 복도를 따라 쭉 들어가면 일정 간격으로 있는 작은 미팅룸에.
내가 도둑질당한 내 곡들에 대해 따지자, 이치구가 주변 눈치를 살피며 나를 미팅룸으로 데려갔었지. 얼굴색을 바꾸고 협박만 줄줄이 늘어놓던 이치구의 모습이 떠올라 헛웃음이 나왔다.
“예전에 거리악사 보니까 커피 자주 드시던데, 맛은 괜찮으세요?”
“네, 이런 맛이었던 것 같네요.”
대형 기획사는 커피도 맛있구나, 했었지.
“······?”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의 이치구를 보다가 내가 말했다.
“아까, 그 연습생은 무슨 잘못을 했길래 팀장님께 혼나고 있던 겁니까?”
“아, 그게······자세한 건 회사 내부사정이라 말씀드리는 게 좀 어렵겠네요.”
연습생 훈육에 회사 내부사정이라.
그냥 얘기하기 싫다는 거다.
도움이 안 되네. 그래 줄 거라 기대도 안 했지만.
“대표님, 아더 레이블 나와서 독립 준비 중이시라는 얘길 들었는데, 어떻게, 잘 준비하고 계십니까?”
대표님 소리가 사근사근하다.
내게 곡 좀 더 가져와 보란 말을 할 때처럼.
“잘은 모르겠고. 차근히 준비 중입니다.”
“그러십니까?”
형식적으로 되물은 그가 슬쩍 의자를 당겨 앉는다. 본론이 나올 예정인가 보다. 어디 들어나 볼까?
“아시겠지만, 저희가 이번에 새로 준비한 신인이 대박이 났잖습니까? 2주째 차트 1위!”
“그, 트릴로지라는 보이 그룹이요?”
“네, 맞습니다! 혹시 노래 들어보셨나요?”
“들어 봤죠.”
이치구가 더 바짝 다가온다. 부담스러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어떠셨어요?”
“괜찮더라고요. 특히 곡이 좋았어요.”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자 이치구의 입꼬리가 찢어질 것처럼 올라갔다.
“녀석들이 제 담당입니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좋더라고요.”
“다행이네요.”
“그렇죠. 다행이죠. 그래서 이 타이밍 놓치면 아쉽겠다 싶어서 후속곡을 냈으면 싶은데 말입니다. 이왕이면 이번엔 저희 전속 작곡가 말고 더 이름 있는 분한테 곡을 받고 싶어서요. 딱 그런 차에 제가 귀인을 만났네요.”
“그 귀인이 전가요?”
“그렇죠! 우리고 저희 쪽도 대표님에게 귀인이 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독립하시면 이게 참 많이 필요하실 텐데, 저희가 또 작곡가들한테 금전적으로 아낌없는 회사라서요.”
개뿔이.
이치구가 엄지와 검지를 동글게 말며 크게 웃었다.
그 모습에 또다시 JME 직원들이 힐끔거린다.
저들 눈엔 우리가 친해 보일까 그게 걱정이다. 그건 싫은데. 같이 일하는 건 더더욱 싫고.
“생각 좀 해보죠.”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생각해야지.
트릴로지나 이치구의 제안 등에 대해서 말고.
멜로디가 들려온 그 여학생에 대해서.
이치구가 한사코 배웅을 해드리겠다며 따라 왔다.
거추장스러운 혹···아니, 암 덩어리를 달고 다니는 것 같다.
그러다 내 시선이 멈췄다.
“어?”
“왜요?”
이치구의 시선이 나를 따라갔다.
그곳엔 남자애 하나가 서 있었다.
4년 전과는 달리 눈에서 독기가 빠진 듯한.
4년 전과 마찬가지로 머리는 샛노란.
최정아가 일하는 카페에서 진상을 떨었던 그 남학생.
그쪽에서도 날 봤는지 꽝꽝 얼어버린 상태다. 툭 치면 부서질 것 같은 표정으로.
“오랜만이네?”
“안, 안녕하세요.”
우리의 인사에 이치구가 놀라며 물어왔다.
“종운이를 아세요?”
“예전에 단골 카페에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와하하, 그런 우연이. 야 인마, 왜 얘길 안 했어. 대표님 뵜으면 얘길 해야 할 거 아냐.”
“그게······.”
눈동자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린다.
딱히 안쓰러운 건 아니지만, 대신 답해줬다.
“그러기엔 너무 오래전이었어요.”
“아, 그렇습니까?”
나는 종운이라는 남학생을 보았다.
녀석의 시선이 바닥을 긴다. 여기서 내가 그때 얘길 했다간 아주 곤란해질 테니까.
그게 4년이나 된 얘기더라도, 이치구에겐 나한테 그랬다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
그때를 떠올리니 당시 최정아의 표정까지 떠올라 더 혼을 내고 싶어진다.
‘근데, 저 얼굴을 보니 차마 말이 안 나오네.’
여전히 안쓰럽진 않다.
다만, 의미 없게 느껴졌다.
자신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름대로 자신감 넘치던 녀석의 눈빛이 어느새 탁해질 대로 탁해져 있었다.
“······.”
더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하, 나. 건방진 새끼.”
손톱보다 더 작아진 장기로의 뒷모습을 보며 이치구가 이를 꽉 물었다.
놈의 말투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거슬렸다. 예민함의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노골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왜 나한테 지랄이지?
-하는 생각이 만나는 내내 솟구쳤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쩌겠나.
아쉬운 건 이쪽인데.
‘시발···거지 같아도 곡 하나만 받자.’
그동안, 본부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별짓을 다 해왔다.
겨우 여기까지 올라왔고, 이제 다음 단계로 올라서기 위해선 그만한 성과가 필요했다.
팀장으로서 첫 단추는 트릴로지의 싱글로 멋지게 끼웠으니 이제 두 번째 단추를 끼울 차례.
이 바닥이 항상 그렇듯, 두 번째가 더 중요했다. 첫판은 운으로 치부하지만, 두 번째부턴 그게 곧 실력이니까.
그렇기에 트릴로지의 정규 앨범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특히나 앨범의 간판인 타이틀이.
그때 때마침 나타난 게 장기로였다.
‘이건 기회야.’
그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잘근잘근 씹으며 불을 붙였다.
뿌연 연기가 그의 얼굴을 덮었다.
이윽고 흩어지는 연기 속에서 비릿하게 웃고 있는 이치구의 얼굴이 나타났다.
#물에 젖은 채로 차에 올라탄 기분이다.
찝찝해.
그런 상태로 사무실에 들러 창밖 하늘만 보고 있는데, 김지희가 물어왔다.
“JME에 가셨었어요?”
고갤 돌렸다. 그녀를 보며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는 기자한테 연락이 왔어요. 피디님 이번에 JME랑 콜라보 하시냐고.”
“소문 참 빠르네요.”
하긴, 이치구가 라운지에서 다 들으란 듯이 그렇게 얘길 해댔는데 안 빠르면 그게 이상한 거지. 이것도 노렸을 거고.
“우연히 가긴 했었는데, 커피만 마시고 나왔어요.”
“누구랑요?”
이번엔 주재윤이 흥미를 느꼈는지 몸을 돌려 물어왔다.
“이치구라고-.”
동시에 주재윤의 표정이 찌그러졌다.
“그 사람이죠? 연습생들 관리하다가 이번에 트릴로지를 포함한 몇몇 애들도 같이 맡게 된 팀장?”
“알아요?”
“유명하잖아요.”
유명?
“질 안 좋기로.”
바로 납득해 버렸다.
소문 정확하게 잘났네. 이래서 내가 연예계 소문을 신빙성 있게 볼 수밖에 없다니까.
“보니까 썩 양질의 사람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나까지 동조하자 김지희가 궁금한 얼굴로 주재윤에게 물었다.
“왜요? 어떤 사람인데요?”
“인상파고, 문신 많고, 덩치 크고, 입 걸고, 연습생들한테 폭력적이고.”
하나씩 추가될수록 김지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일 하다 온 사람이냐며, 전직 깡패냐며.
그때 프린트물을 잔뜩 들고 들어온 여직원이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평범하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그녀가 으쓱거리며 덧붙였고.
“안 그래요? 연예계에 그런 사람 한 둘 아니잖아요?”
우리는 그녀의 말에 어느정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맞지.
그런 사람 한 둘 아니지.
이치구나 길성혁 같은 놈들이 기획사마다 한 트럭씩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단지 우리가 신경을 못 쓰거나, 안 쓰고 있을 뿐.
사실 찾아낸다고 다 잡아낼 수 있을 것도 아니고.
그냥, 신경꺼야 할까.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도 아니잖아?
작업실로 돌아와 푸스스. 한숨 섞인 바람 소릴 내쉬었다.
미래가 바뀌었잖나.
이번엔 일어나지도 않은 일.
애초에 만나지 않고 넘어가려 했던 일.
그러니 그냥 이렇게 지나가도 될 일.
곡 달라고 연락이야 오겠지.
거절하면 된다. 지가 뭘 할 수 있겠어.
아쉽다며, 다음엔 꼭 함께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굽실거리겠지. 오늘처럼.
오늘 복수를 한 것 같았다.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작은 통쾌함까지 느꼈다. 그런데······.
뒷맛이 씁쓸하다.
비단 멜로디 때문만은 아니었다.
“······.”
뒤로 젖혀있던 의자를 세웠다.
책상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인터넷 창을 띄웠다.
아주 예전의 기억.
내가 억울한 마음에 하소연했던 작곡가들의 커뮤니티.
난 뭐라고 썼더라?
JME를 검색했다. 별 내용이 없었다.
이치구도 쳐봤다. 아무 내용도 없었다.
괜히 안심된다. 입안의 쓴맛이 옅어진다.
아무 문제 없나 보다.
난 이제 그냥 멜로디가 들려오는 그 여학생에 대한 생각만 하면 되는 건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쳐본 마지막 키워드.
하얀 화면에 검색 목록이 뜨는 순간, 나는 숨을 들이쉰 채로 멈췄다.
[곡을 도둑맞았습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느릿하게 마우스를 움직인다.
게시물 쪽으로.
입을 비집고 기어이 욕지기가 나온다.
“젠장······.”
착각이었다.
미래는 바뀌지 않았다.
단지, 대상만 바뀌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