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악연일까, 기회일까 (1)
“또 연락 드리죠.”
예상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성 대표가 사무실을 떠났다.
FE 인베스트먼트면 캐피탈 업계에서도 꽤나 알아주는 회사라던데, 잘된 일이겠지?
말하는 뉘앙스를 보면 잘 모르는 업계라 신중한 것 같았다.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사업 외의 곡 작업이나 홍보, 유통구조에 관해서도 얘길 나눴지.
오히려 그런 점이 마음에 들긴 했다. 아는 척을 하며 가르치려 들지 않아서. 회사의 주인인 양 굴 생각도 없어 보이고.
‘뭐, 두고 볼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을 매듭짓고 배웅을 마친 문 앞에서 뒤돌아섰다.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내 작업실로 꾸며진 방에 다가섰다. 당장 내 얼굴을 거울로 보면 물음표들이 가득할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작업실이 엄청 넓어졌네요?”
문을 열고 들어간 작업실엔 하서윤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소파에 다리를 꼬고 늘어져 있던 그녀가 날 보고 입꼬릴 올렸다. 단발이 찰랑거린다. 오랜만에 봤더니 도도함이 한계치까지 올라가 있는 것 같다. 조심해야지. 저럴 땐 덩달아 예민하니까.
“네, 사무실 겸해서. 근데 왜 온 거예요?”
“말했잖아요. 오디션 보고 싶어서 왔다고.”
그래, 그랬지. 난 그게 이상해서 물은 거고.
“오디션을 왜 본다는 건지······.”
“여기 들어오고 싶어요.”
“네?”
“들어오고 싶다고요, 여기에. 소속 연예인으로.”
그녀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내가 잘 못 들었나?
하서윤이 내 레이블에?
“TKM 계약 기간 끝났어요. 재계약 하지 않기로 했고요. 법적 문제 될 거 전혀 없고, 깔끔해요.”
내 표정을 보고 혹시나 모를까 덧붙인 것 같은데, 이미 그건 아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모르겠나. 장안의 화제인데.
여성 뮤지션 트로이카, 제인, 하서윤, 최정아가 전부 TKM 소속이었는데, 그중 한 명의 계약이 만료되었다니 업계가 떠들썩했다.
업계 사람들끼리 모이면 무슨 애피타이저처럼 꼭 튀어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더라. 거기에 디저트는 내가 계약이 끝나 새로운 레이블을 준비 중이란 주제였고.
아무튼, 소문이 무성했다.
솔라톤에서 그녀의 몸값에 50억을 제시했다더라, 아니다 55억이라더라. 그것도 아니다. 다른 기획사들과 경쟁 때문에 60억까지 부른 상태라더라.
계약금이 아무리 비밀리에 붙여진다 해도 업계 내에서 도는 소문이니 꽤 신빙성 있는 얘기일 터.
그러니 다른 건 다 차치하고 ‘나 60억 없는데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서윤은 매끄러운 턱을 치켜들고 내게 물어왔다.
“소문 들었죠?”
“어떤 소문이요?”
“솔라톤, ENB, 퍼스트를 비롯한 여기저기서 지금 연락이 엄청 와요. 나 데려가려고.”
“그런데요?”
동그란 눈이 찌푸려진다.
왜 말귀를 못 알아듣냐는 듯.
“그런데요 라뇨. 그런 제가 지금 여기 왔잖아요.”
허. 유지은이 4차원적으로 미쳤다면, 하서윤은 제대로 미친 것 같다.
가만있어도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사람이 여길 찾아와 오디션을 운운한다는 게 그래야만 가능한 일 같거든.
“저 60억 없어요.”
“누가 달래요? 그거 안 받아도 평생 돈 걱정할 필요 없어요.”
“흐음······.”
“나 영입하기 싫어요?”
답답하다고 윽박지를 것 같았는데 볼륨이 훅 작아졌다.
설마 섭섭해하나?
“싫은 게 아니라, 하서윤 씨 걱정을 하는 겁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미국 진출이란 악수를 피했나 했더니 여길 찾아왔잖나. 아직 이름도 안 정해진, 아무것도 없는 이 작은 레이블에.
내 걱정을 알 리 없는 하서윤이 작게 중얼거린다. 섭섭함은 가신 얼굴로.
“내 걱정을 왜 자기가 한데.”
할 만하니까 하지.
자신이 빗겨나간 미래를 읊어줄까 하다가 말았다. 안 그래도 날 이상하게 보는 여자인데 그 얘기까지 하면 신고를 하든 인터뷰를 하든 뭐라도 하겠다 싶어서.
“왜 여깁니까? 앞으로의 커리어를 생각하면 TKM에 계속 있어도 됐고, 다른 대형 기획사로 가는 것도 괜찮지만, 무조건 여긴 아닐 텐데요?”
“무조건 여기여야 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이번엔 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서윤이 그런 날 보며 어울리지 않게 자박자박한 목소릴 냈다.
“노래가 즐거워져서, 그래서 여기여야 했다고요.”
위에서 아래로 흐르던 눈이 다시 올라와 날 본다. 그리고 다시 또 아래로. 괜스레 헛기침하고, 얼굴엔 붉은 기가 물든다.
그 일련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자 하서윤이 못 참고 물었다.
“뭐, 노래 불러드려요? 아님, 춤이라도 출까요?”
“됐어요. 잘 하는 거 뻔히 아는데 뭘.”
푸스스 웃으며 내가 말했다
“생각 좀 해볼게요, 진지하게.”
하서윤이 지독하다면서 눈을 흘겼다.
깨알 같은 어필과 함께.
“그리고 60억이 아니라, 65억이에요.”
#“오빠, 피아노 들려줘.”
콧소리 잔뜩 섞인 목소리가 악기 매장에 울렸다. 같이 온 남자가 뻘쭘해 하며 고개를 내젓자 여자가 더욱 졸라댔다.
“사람도 별로 없어. 얼른 쳐주라~진짜 멋있던데?”
결국, 헤벌쭉해져 건반 앞에 앉은 남자가 물었다.
“뭐 쳐줄까?”
“음~그거 있잖아, 그거. 기로 프로듀서가 작곡한 거!”
“아 한울 노래?”
“맞아, 한울 거였던 것 같아!”
남자가 피식 웃었다.
가수보다 작곡가로 기억되는 노래라니.
‘그거 첫 코드가······Dm7이었지?’
손가락을 건반 위에 얹었다.
이윽고 전주가 울려 퍼졌다. 듣기만 해도 감탄사가 나올 법한 감미로운 선율.
남자는 어느새 심취해선 연주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안 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눈알을 굴렸다.
‘멋짐’이라고 적힌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야 할 여자친구가 보기는커녕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선율이 늘어지다 뚝 끊겼다.
“뭐야, 쳐보라 그래서 쳤더니 뭐 하고 있어.”
“어?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저 사람 기로 프로듀서 같아서. 맞지, 맞지?”
“뭐? 어디?”
“저기 마스크 쓴 사람! 눈이 비슷한데?”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니 웬 마스크를 쓴 사람이 바로 앞에 놓여진 악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남자는 그를 찬찬히 훑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뭐야, 아닌 것 같구만. 저런 눈 겁나 흔해.”
“아닌데, 맞는 거 같은데? 딱 눈이 저렇게 생겼었어. 확실한데···.”
연신 갸웃거리는 여자.
남자의 시선이 마스크 쓴 사람에게서 툭 떨어졌다.
폭탄의 심지처럼 한껏 가늘어진 눈.
그가 여자에게 따지듯 물었다.
“야, 근데 너 다른 남자 눈에 뭐 그리 관심이 많냐?”
*“흐음···.”
예전부터 궁금했던 악기가 있었는데, 뮤튜브 영상을 아무리 봐도 해소가 안 돼서 매장으로 찾아왔다.
일반 키보드와는 달리 한음 한음 누르는 게 아니라 터치하듯 연주하는 키보드.
건반이 실리콘으로 되어있어 밀어내듯 연주하면, 현악기처럼 음을 자연스레 이동시킬 수 있는 신기한 녀석이었다.
간만에 아이처럼 설레는 것 같다. 멋진 장난감을 봤을 때의 느낌이랄까.
천천히 팔짱을 꼈다.
‘사면 도움이 되겠지? 그럴 거야. 암, 그렇고말고.’
그러고서 사야 하는 이유들을 떠올린다. 무궁무진하다. 이걸 안 사면 큰일 날 것처럼 사야 하는 이유들이 넘쳐난다.
합리화의 시간이 끝났다. 고민의 승자는 뻔하지.
“이거, 하나 결제해 주시겠어요?”
다들 이렇지 않나? 나만 그래?
직원이 카드를 가져간 사이, 걸음을 옮겨 다른 악기들도 구경했다.
크로노스, 스테이지, 포르테, 몽타주 등등 값비싼 장비들이 눈을 돌아가게 한다.
업라이트 피아노 앞에서 꽁냥거리던 커플이 갑자기 싸우지 않았더라면 추가로 뭐하나 더 샀을지도.
‘왜 악기점을 와서 싸우고 그러나······.’
지갑을 지켜준 은인들에게 혀를 차며 매장을 나섰다. 건반은 퀵으로 받기로 했다. 택배는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 얼른 차도 사야겠다. 앞으로 필요할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것 같은데.
다시 사무실로 향하는 길.
한적한 거리로 나오자마자 마스크를 벗었다. 신선한 공기가 한 움큼 들어왔다. 날씨도 꽤 따뜻해졌다. 어느 가게 사장님의 센스인진 몰라도 거리에선 봄이 올까요가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현이 사무실 구경 시켜달라고 난리던데. 조만간 한 번 보긴 봐야겠네.
‘그나저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역시나, 결국,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어렵네.’
원하는 바가 있어서 독립하긴 했는데, 막상 시작하려니 뭐부터 해야 할지 선택이 어렵다.
함께 작업하고 싶은 뮤지션이 나타나길 마냥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찾으러 나갈까? 하서윤은 또 어떡하지. 멜로디는 아직 안 바뀌었던데. 만약 내가 곡을 만들어주면 하서윤의 멜로디도 내가 만든 대로 변하려나? 최정아 때처럼?
굽이치는 물줄기처럼 생각이 두서없이 휘몰아쳤다. 뇌가 둥둥 떠서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는 것 같다.
그럼에도 예전처럼 조급하진 않았다.
하고 싶은 게 많아도, 이젠 그걸 감당할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까. 천천히 해나가면 되는 거지.
천장이 탁 트여있는 것처럼, 생각이 자유롭다.
불확실한 노선 위에 올라섰지만 어느 때 보다 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진해져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어느새 낯익은 길로 접어들었다.
아직 사무실은 거리가 좀 있는데, 내가 여길 언제 왔더라?
기억을 돋구며 거리를 훑는데 불쑥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돌아보니 두 남녀가 대치 중이었다. 그중 남자는 잔뜩 흥분해선 윽박지르고 있었고.
오늘따라 싸우는 커플이 많네.
아닌가, 커플이라기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걸음이 느려졌다.
여자가 울음에 잡아먹힌 목소리로 뭐라 뭐라 하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흐느낌을 비집고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와의 거리에 비해 지나치게 선명하고 큰 멜로디가.
얼마만의 멜로디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새로운 사람에게 들린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지. 근데, 지금은 멜로디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와 심장을 쳤다.
벌컥거리는 소리가 귀 안에서 울린다.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봐요, 갈 길 가지 뭘 그렇게 쳐다 봅니······.”
험악한 소리가 내 쪽으로 넘어왔다.
내가 빤히 쳐다보긴 했다.
멜로디가 들리는 여자가 아닌, 양팔에 문신이 그득한 저 남자를.
남자는 목소리만큼 험악한 표정으로 내게 뭐라고 하려다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기로 프로듀서님?”
언제 봤다고.
과거로 돌아온 이후로 처음 보는 사이인데.
날 언제 봤다고.
“······.”
내 안면의 근육들이 전부 굳는 것 같다. 표정이 싸늘해지는 게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반면,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은 어느새 활짝 펴지고 있었다.
무슨 귀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수년 동안 만들었던 내 노래를 도둑질한,
내가 음악을 포기하는 순간까지도 치를 떨었던 그 얼굴로.
“와하하! 기로 프로듀서님 맞으시죠?”
JME 매니지먼트 팀장 이치구.
이번엔 마주치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예전 인생의 악연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그것도.
새로운 멜로디 옆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