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투자판을 뒤집는 건 (1)
“마포구 망원동 415-62요.”
택시에 올라타 주소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아더 레이블 건물을 훑었다.
1층에서 테이크아웃한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손을 데워주고 있었다.
‘나 이제 차도 없구나.’
그것만인가. 집도 옮겨야겠지. 이제 청담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아더 레이블에 쌓여있던 일들을 모두 끝내니 이제 내 할 일들이 가득 찬 옷장마냥 발등에 쏟아진다.
‘그나마 이거라도 준비해놔서 다행이지.’
택시에서 내려 3층짜리 작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외장 콘크리트까지 발려 깔끔하다.
1층을 차치한 스케이트보드 가게가 주황빛 조명들을 화려하게 켜놔서 그런지 더 세련되어 보인달까.
아니면 그냥 팔이 안으로 굽는 거던가.
남의 사무실 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콘크리트 발린 외부 계단을 올랐다.
매끈하게 도색된 2층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니, 인테리어가 아직 끝나지 않은 텅 빈 사무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공기가 차갑다. 어째 밖보다 여기가 더 서늘하다. 거기에 매캐한 공기까지 덮쳐와 창문부터 열었다.
‘뷰는 진짜 마음에 드네.’
고즈넉한 길거리가 눈을 편안하게 한다.
파라노마 사진 찍듯 시선을 돌려 내부를 훑었다.
안에서 바로 3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복층구조라 천장이 높다. 덕분에 평수보다 훨씬 넓어 보이고.
슬슬 견적을 내볼까?
‘녹음실 개수에 맞게 믹서 세 개랑, 마이크는 음색에 맞게 사용할 수 있게 여분도 준비해야 하고, 악기 녹음용도 필요하겠지.’
‘연습실 오인페랑 마이크도 필요하지. 그리고 노트북이랑···마스터 건반도 몇 개 배치해야겠네···.’
‘연습실 PA 스피커랑 아날로그 믹서는···.’
방음 공사만 딱 끝난 텅 빈 방들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안에 채울 가구나 장비들을 체크 했다.
예상은 했지만 1차 적으로 완성된 표를 보며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꼭 필요한 것만 넣은 것 같은데, 이것만 해도 억 소리가 여러 번 날 것 같지.
‘인테리어 공사 잔금이랑 합치면······.’
평생 숫자와는 담을 쌓은 머리라 과부하가 걸려 지끈거리는 것 같다.
이마를 짚고서 홀로 나왔다.
창가에 서서 흘러드는 바람을 쐬며 머리를 식히고, 몇 번이고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럴수록 새롭다.
머리가 좀 아프긴 해도, 그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호기심이랄까. 기대감이랄까.
지금까지처럼 기반이 잘 다져진 튼튼한 길도 아니고, 이미 누군가 닦아 놓은 화려한 길도 아닌,
오롯이 처음부터 만들어갈 새로운 길.
그 길 위에서 만날 뮤지션들이 궁금하고.
그들과 만들 노래들이 기대된다.
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쓸어 올린다.
기분 좋은 고양감을 느끼며 다시 한번 사무실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음악 하고 싶다.
얼른.
#코를 덮는 구수한 냄새.
진한 육수가 보글보글 끓는다.
한 수저 떠서 후룩 먹으니 엄마표 된장찌개가 확실하다.
“진짜 맛있다.”
출처 확인과 감상평을 마치고 숟가락을 바쁘게 놀렸다.
이제 살 것 같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허기를 달래놓자, 그제야 부담스러운 눈빛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취조를 할 기세로 두 분이 나란히 앉아있다.
“이럴 거면 그냥 같이 드시죠?”
“아냐, 아냐. 배불러.”
엄마가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그럼 계속 그렇게 지켜볼 거냐고 묻자 불편하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거기다 대고 뭐라 할 수 있겠나.
고개를 저을 수밖에.
“······.”
눈칫밥이란 게 이런 건가 싶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
좋은 회사, 높은 자리 내팽개치고 사업 시작하는 아들내미가 얼마나 답답하실까.
숟가락을 뒤적거리며 죄송하단 말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두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수고했어.” “수고했다.”
“······.”
말문이 막혔다.
콧등은 시큰거리고.
죄송하다는 말이 죄송해진다.
10년을 돌아와서도 나는 부모님을 잘 모르는구나.
이들의 침묵은 항상 걱정이 아닌, 응원이었는데.
“······감사해요.”
시선을 된장찌개로 빠트렸다. 지금 내 표정이 저 뭉개진 두부와 비슷할 것 같아서.
잠시 후, 내가 괜찮은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을 때쯤.
괜스레 헛기침하시던 아버지가 물었다.
“그래서, 새 사무실 인테리어는 얼추 다 되었고?”
“네. 오늘 다녀왔는데 방음 공사만 남았더라고요.”
“그거 돈 엄청 깨졌지? 내가 가서 해도 된다니까?”
아버지의 너스레에 엄마가 콧방귀를 뀐다.
“어이구야, 그럴 힘 있으면 우리 밭에 정자나 하나 만들어 달라니까.”
“밭이 천 평 만평 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정자야 정자는.”
엄마의 눈길을 피하며 투덜대는 아버지.
한참 동안 눈을 흘기던 엄마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안방에서 뭔가를 가져왔다. 그리고 식탁 위에 턱 하니 내려놓는다.
“······.”
“뭐냐고 안 물어보냐?”
팔짱 낀 아버지가 슬쩍 물어왔다.
어쩐지 기대하는 눈빛으로.
“뭔지 보이는데요?”
이리 보나 저리 보나, 통장 그 자체구만.
“야, 그래도 드라마에선 ‘이게 뭔가요?’ 하면서 놀라고 눈물도 흘리고 그러던데.”
“에휴, 애한테 뭐라는 거야. 누가 보면 우리가 모은 돈 주는 줄 알겠어. 자기가 번 돈 도로 돌려주는 것뿐인데.”
엄마의 말에 아버지는 민망한지 헛기침으로 대답했다.
통장을 빤히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거······.”
“안 받는다는 소린 하지 마라. 그러면 내가 내일 당장 은행 가서 계좌 이체로-.”
“잘 받을게요.”
“···응?”
엄마의 붕 뜬 표정을 보며 내가 쿡쿡대고 웃었다.
“생각보다 회사를 차리는 게 돈 들어갈 구석이 많더라고요. 대신 돌려주시는 건 절대 아니에요. 이미 드린 거니 이건 부모님 돈이죠.”
어차피 어떻게든 주실 분들이다.
그러니 나도 괜히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그러니 투자로 받을게요.”
“투자?”
“네, 투자요.”
끄덕이며 웃었다.
“제 첫 투자자님들이세요.”
그 말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활짝 웃는 부모님.
나는 쑥스러워 삼키려던 말을 다시 꺼냈다.
사실, 이미 예전에 해야 했을 얘기였다.
“예나 지금이나 항상.”
#여수에서 일주일 푹 쉬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 사이, 인테리어는 모두 끝이나 가구들을 하나, 둘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컴퓨터를 비롯한 전자기기들까지 들어와 어느 정도 일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을 무렵, 나는 직원을 뽑기 위해 공고를 올렸다.
그리고 대망······까진 아니어도 왠지 모르게 들뜨게 되는 면접날.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저 면접 봐야 하는데요?”
오늘 막 배송 온 회의 테이블 앞에 익숙한 얼굴들이 쪼르륵 앉아있다.
“알죠. 저희도 그것 때문에 왔는데.”
여직원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양옆에 앉은 김지희과 주재윤도 웃음으로 긍정적인 사인을 보내왔고.
“어서 면접 시작하세요.”
뻔뻔함에 말도 안 나오네.
나름 미리 생각해둔 질문들이 다 날아가 버렸어.
그래서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아니, 오늘 출근 안 했어요?”
“네.”
당당도 하셔라.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딱 그런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여직원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오늘뿐일까요. 앞으로도 안 해요.”
“설마······.”
“그때 얘기 드렸잖아요. 품고 있던 사표를 내야 할 때인 것 같다고.”
설마하니 그게 진담이었을 줄이야.
날 놀리는 줄 알고 몇 번이나 되물었는데, 대답은 한결같았고 몹시 진지했다.
게다가.
“이성원 피디님한테도 얘기 드렸는걸요.”
이건 또 뭔 소리야.
“여기 면접 본다는 걸요?”
설마하니 물은 질문에 끄덕이는 머리들.
“업계가 은근 좁아서 거짓말해봤자 금방 들통나요. 그리고 사표 보시자마자 눈치채신 것 같던데요, 뭘. 응원까지 해주셨어요.”
“대체 무슨 응원을······여기 합격하라고요?”
“네. 도너츠 주시던데.”
잠시 넋을 잃은 동안, 앞에선 저들끼리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근데 이 피디님 은근 말 많으신 것 같죠?”
“그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지, 평소엔 고개만 끄덕이시면서 통 얘길 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완전 달라지셨어.”
“회의도 솔직히 장 피디님보다 길어요.”
“맞아, 맞아. 그래도 말이 없으신 것보단 지금이 훨씬 나아 보이더라고.”
“아무튼, 생각보다 잘 하실 것 같더라고요. 안심했어요.”
“······.”
대표직 단 사람 걱정을 왜 사표 쓰고 온 댁들이 하나.
그 황당한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주재윤이 불쑥 물어왔다.
“근데, 저희 면접 시작한 거예요?”
“네, 그리고 방금 끝났어요.”
“와, 두근두근. 합격인가요?”
양심도 없지.
*다음날.
양심 없는 직원들이 줄줄이 출근했다.
“여기가 내 자린가 보네.”
여직원이 입구 바로 앞에 있는 카운터에 핸드백을 얹으며 웃었다.
김지희는 창가로 다가가 거리 풍경을 보며 감탄하고 주재윤은 책상들을 훑는다.
“아무 데나 앉아도 돼요?”
“편한 대로 하세요.”
나는 살짝 포기한 심정으로 끄덕였다.
그 얘길 듣고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은 김지희가 물어왔다.
“저희 뭐부터 하면 될까요?”
“아 참, 저 그거 가져왔어요.”
주재윤이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고르다가 번뜩 뭐가 떠올랐다는 듯 커다란 쇼핑백을 들었다.
그 안에서 나오는 건 액자였다. 다보로 벽에 다는 프레임 없는 유리 액자.
안에 든 건 영국 NME에서 선정했던 ‘올해가장 기대되는 아티스트’의 이름들이었고.
당연히 내 이름엔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거···아더 레이블에서 떼왔어요?”
“에이, 설마요. 제가 그렇게 양심 없진 않아요.”
없던데.
“이거 올해 새로 나온 거예요.”
“······아?”
“따끈따끈한 신상. 이번에도 피디님 이름이 들어가 있네요. 지난번 보다 훨씬 상단에.”
주재윤이 모르셨죠? 라는 표정으로 흥얼거리며 이리저리 대본다. 그리고는 이미 위치까지 다잡아놓고 내게 묻는다.
“이거 걸어도 되죠?”
이들이 가진 능력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뽑았고, 결과는 보다시피.
정신없지. 산만하고.
그리고······.
‘즐겁네.’
작은 사무실에 여러 사람들이 복작거리니, 이젠 공기가 차갑지 않았다.
#“바쁜 사람 붙잡고 뭐 하는 거야.”
고급 세단에서 내린 남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같이 내린 민머리 남자에게 말했다.
운전 기사에게 여기서 대기하고 있으란 말을 전한 민머리 남자가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남자를 달래듯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뭐, 나 좋으라고 데려온 줄 알아? 같이 좋자고, 같이 잘 살자고 그러는 거지.”
“말하는 게 딱 그건데. 다단계 사짜들.”
“에헤이, 내가 자네한테 뭐 옥 장판이라도 팔아오랄까 봐?”
민머리 남자의 다소 징그러운 아양에도 남자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작은 건물로 향했다. 스캔하듯 쭉 훑어본 남자가 툭 던지듯 말했다.
“나 엔터 쪽은 전혀 몰라.”
“아무리 몰라도 장 대표는 알 거 아냐. 기로 프로듀서. 던컨. 빌보드 1위. 몰라?”
“관심 없어.”
“에잇, 끌려왔든 어쨌든 같이 와놓고 이러기야? 자, 자. 약속 시간 됐어. 얼른 들어가자고.”
민머리 남자가 목석같은 남자의 등을 떠밀었다.
잠시 후, 두 남자가 장기로의 새 사무실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