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이번엔 내가 데리러 올게요 (2)
“유 대표님 시원시원하시네. 붙잡고 협박하고 난리 나면 어쩌나 했는데, 오히려 기획 팀장님더러 도와주라고까지 하시고.”
학준이 형이 빈 소주잔을 내려놓고 웃었다.
그리고 마른안주를 질겅거리며 물어왔다.
“그래서 투자 관련해선 얘기 많이 나눴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데, 하나 딱 결정해서 그것만 하기보단 다양하게 투자받아보려고.”
“오~짜식. 멋있다. 예전에 우리가 얘기했던 대로 진짜 네 회사를 갖게 되네.”
내가 주억거렸다.
“형도 그때 얘기한 것처럼 노랠 부르고 있고.”
“그러게. 못 부를 뻔했는데, 평생 그렇게 놓고 살 뻔했는데. 네가 덕분이다.”
“형이 잘해줬지.”
“흐흐, 그것도 맞지. 내가 좀-.”
“웃기지. 예능에 최적이야.”
“임마, 뮤지션한테 그거 실례야.”
“지난번 방송 보니까 요즘은 웃긴다는 말이 더 듣기 좋다더니만 뭘.”
“얘가 예능을 다큐로 받아들이네. 그러다 음악방송 나가면 노래밖에 없어요, 하는 거지.”
널따란 거실에 웃음소리가 채워졌다.
그 사이, 몇 가지 요릴 뚝딱 해온 학준이 형 동생이 쟁반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래서, 사무실은 구했어?”
“몇 개 봐둔 정도?”
“위치는? 가격 장난 아니지?”
옆에서 학준이 형이 고갤 흔들었다.
“야, 모르는 소리 마. 계약금에 대표 월급까지 받은 애야. 돈 쓸 시간도 없이 일했으니 옆 건물까지 사고도 남을걸?”
그 정돈 아니고.
“뭐, 월세니까 크게 부담스러운 금액은 아닌데. 인테리어랑 안에 장비 채울 생각 하니까 그게 엄청나더라고.”
형 말처럼 모아둔 돈이 적진 않다.
계약금에 대표로서의 월급까지.
저작권료를 제외하더라도 꽤 큰돈이 매달 차곡차곡 쌓여왔으니까.
“하긴 돈 들어갈 구석이 많겠네. 방음 공사까지 생각하면, 어후. 요새 작은 방 하나 하려 해도 수천씩 들어간다는데······아예 이참에, 저작권료 통장 부모님께 달라고 하면 안 되냐?”
“그건 싫어. 드린 돈을 왜 다시 달라고 해.”
“그러냐. 아~내가 TKM 소속만 아니어도 투자하는 건데. 뭐,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다만.”
“그래도 빌보드 1위까지 찍은 프로듀서신데,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없을까.”
옆에서 동생이 거들었다.
나도 그게 희망 사항이긴 한데, 투자는 또 다른 문제라고들 하니까.
뚜껑은 열어봐야 알겠지.
“그나저나, 우리 중에 계약 기간이 딱 맞아 떨어지는 사람이 한 명도 없네. 태영이 형만 계약 기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니 하고 있는 작업 끝나면 너 따라갈 거고······슬슬 소속 뮤지션도 캐스팅 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님, 벌써 구해 둔 거야?”
“아냐. 아직 한 명도.”
학준이 형이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니야? 웬만한 뮤지션들은 좋은 곡도 곡이지만 소속사 자체를 더 비중 있게 보더라고. 홍보 빨이란 게 무시 못하잖냐.”
“여유롭다기보단, 그냥 내가 정말 같이 작업하고 싶은 사람을 찾고 싶어서.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 기성이든, 일반인이든 상관없이 자유롭게.”
“하긴, 그러려고 나가는 건 아는데······.”
옆에서 형이나 잘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참 사랑스러운 아우라며 헤드락을 걸었다.
결국, 항복을 받아낸 학준이 형이 헥헥대며 소주를 물처럼 마셨다.
그리고 술기운이 오르는 듯 가쁜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거기, 예능 잘하는 뮤지션도 필요해지겠지?”
#최정아와 학준이 형을 시작으로 천천히 내 선택을 알리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이미 들은 게 있었고, 예상도 어느 정도 했던 터라 유별난 반응은 없었다.
대신 ‘가슴에 품었던 사표를 드디어 낼 때인가’라며 퇴사의 꿈을 꾸는 이들은 있었지.
대기업 때려치우고 스타트업을 간다는 건데, 실제로 그렇게 할 사람이 있겠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넘어갔다.
그다음은 박경호였다. 마침 뉴욕에 갈 일이 있어 그의 촬영 현장으로 향했다.
내가 봤었던 그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한층 더 커진 스케일의 현장에서 박경호를 만날 수 있었다.
“동욱이한테 어렴풋이 얘긴 들었어요.”
박경호가 자신의 매니저를 가리키며 말했다.
슬쩍, 박경호의 얼굴을 살폈다.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어둡진 않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박경호가 말을 이어간다.
“지금까지 저희 길을 닦아주셨잖아요. 이제 피디님도 피디님의 길을 가셔야죠.”
“고마워요.”
“물론······.”
박경호가 덧붙였다.
“그 길이 언젠간 제 길과 합쳐지는 날이 꼭 왔으면 좋겠네요.”
역시 동굴 같은 목소리다.
오늘따라 많이 울리네.
#LA 시내에 고급 아파트.
괴상한 소리가 나는 초인종을 누르자 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사장 놈이요.”
문이 벌컥 열렸다.
배달 음식이라도 도착한 듯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서 있는 유지은.
그녀가 재잘재잘 물어왔다.
“뭐예요? 한국 아니었어요?”
“마침 뉴욕에 일이 있어서 여기도 들렀어요.”
“뉴욕에서 LA가 지나가다 들릴 거린 아닌데? 무슨 일 있어요? 그만큼 내가 보고 싶었다거나······.”
“유란 누나도 같이 있죠?”
“끙. 나 보러 오신 거 아니구나?”
“맞아요. 지은 씨 보러 온 거.”
입맛을 다시는 유지은에게 말하며 레드리시의 연습실로 들어갔다.
이건 뭐 월리를 찾아라도 아니고.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나머지 멤버들과 은유란, 그리고 서울의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도 유지은의 목소릴 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진짜 피디님이시네?”
“거 봐. 지은이가 저런 징그런 애교 섞인 목소릴 내는 게 피디님밖에 더 있······욱.”
이병국이 꼬꾸라졌다. 유지은의 주먹에.
삽시간에 대화 상대를 잃은 기성운이 혀를 찼다.
“어떻게 넌 매번 처맞으면서 배움이 없냐.”
“푸흐, 마치 네 피아노 실력 같지.”
“지난 공연에 절었던 게 누구더라.”
“그건 스틱이 부러져서···!”
티격태격하는 레드리시와는 달리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은 차분한 표정들이었다.
이들도 결코 조용한 타입은 아니었는데, 레드리시 옆에 있으니 상대적 소심쟁이들처럼 보인다.
“시끄럽진 않아요?”
“시트콤 보는 것 같아서 재밌어요.”
은유란이 웃으며 말하자, 서울의 와인도 킬킬댔다. 나도 동감이긴 했고.
어쨌거나 서로 친하게 어울리며 잘 지내고 있으니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저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그때 유지은이 물어왔다.
“그래서 진짜 왜 오신 거예요?”
*들뜬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레드리시는 전혀 몰랐다는 얼굴이다. 현재 턴투더레이블 소속 뮤지션이나 마찬가지인 위탁 상태이니 들은 게 없겠지.
반면,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은 대충 짐작한 얼굴들이었고.
“파멸의 조동아리······무슨 일 있냐는 말은 왜 해서······.”
붉게 염색한 머리칼을 앞으로 쏟아낸 채로 중얼거리던 유지은이 소리쳤다.
“이러면 제가 성공해서 돌아갈 곳이 없잖아요!”
“왜 없어. 피디님이 새로 차리실 레이블에 들어가면 되지.”
이병국의 말에 유지은이 눈을 빛냈다.
“아! 우리 얼마나 계약 남았지? 해지하자.”
“위약금은?”
“물면 되지!”
빚을 내겠네.
“네 돈으로 물어주는 거······욱.”
또다시 배를 부여잡는 이병국을 보며 말했다.
“안 돼요. 설령 계약을 좋게좋게 해지한다고 해도 레드리시, 유란 누나, 그리고 서울의 와인을 감당하기엔 제가 만들 회사가 너무 작아요. 지금 여러분 다 미국 활동에 집중해야 할 때인데, 그렇게 되면 미국 활동은 꿈도 못 꿀걸요.”
레드리시는 유명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물망에 오르고 있고.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도 예전의 레드리시가 그랬듯 크게 성장하고 있는데.
지금 갑자기 미국 활동을 접는다?
말도 안 되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유지은을 보며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은유란이 물어왔다.
“그럼 얼마나 걸려요?”
“네?”
“저흴 감당할 만큼 레이블이 커지는데, 얼마나 걸리냐구요.”
시선들이 모였다.
글쎄. 얼마나 걸릴까.
모르겠다. 애초에 TKM처럼 크게 키우기 위해, 혹은 주식 상장을 위해 만드는 레이블이 아니잖나.
오히려 커지면 음악에만 집중하기 어려워지겠지.
하지만 내게 모여든 시선들을 보니 겨우 잠재웠던 욕심이 꿈틀댄다.
방법이 없을까?
규모가 큰 레이블이 아니더라도 내 앞의 대단한 뮤지션들을 케어할 수 있는 방법이?
침을 세 번쯤 연달아 삼켜 더 이상 삼킬 것도 없을 때, 입을 열었다.
“서둘러 볼게요. 그리고.”
모두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말했다.
“이번엔 내가 데리러 올게요.”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항상 대표보단 프로듀서로서의 일들에 무게가 치중해 있었다면, 이번만큼은 정반대였다.
음악은 잠시 미뤄두고 대표로서의 업무에 집중했다. 인수인계도 그중 하나였고, 나는 내 후임으로 이성원을 추천했다.
줄곧 좋은 성적을 내기도 해왔지만, 그보단 앞으로 그의 능력이 더 빛을 발할 것이기에.
그의 능력은 여러모로 미래에게 검증받은 셈이었다.
메가 히트곡 Daylight의 작곡가가 될 것이고. 그 후 독립해서 큰 레이블의 사장님이 될 테니까.
유재완 대표도 생뚱맞게 TKM의 프로듀서가 들어가는 것보단 그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는지 내 추천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간이 쏜살같이 내달렸다.
나의 거취에 대한 예측과 추측들이 사실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기삿거리로 쓰기엔 더할 나위 없는 내용이다.
내 독립을 알리는 기사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묵묵히 내 일을 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끝에 섰다.
“노래 좋다. 전부다. 너희 각자의 색도 확실하고.”
웃으며 내 옆에 나란히 앉은 둘을 바라봤다. 앞으로 아더 레이블을 책임질 작곡가 둘.
“이제 정말 흠잡으려 해도 잡을 게 없어.”
서기영이 맥없이 끄덕거린다.
오나연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피디님은 작업할 때마다 색이 바뀌시잖아요.”
“난 그렇게 배웠거든.”
멜로디한테.
“그리고 각자에게 맞는 방법이 있는 거니까.”
실제로 서기영이나 오나연의 곡을 즐겨 듣는 사람들은 뮤지션 상관없이 그들 곡을 찾아 들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들의 색은 강하고 중독성 있었다. 이런 장점을 두고 나를 따라 한다는 건, 매력적인 향수가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버리는 꼴이지.
그러나 내 말에도 오나연의 표정은 풀릴 줄 모른다.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님을 나도 알고 있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려 올라오는 시선들.
“또 보자.”
각기 다른 표정으로 애써 참는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말했다.
“차트에서 봐요.”
내가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네.”
*직원들과 인사까지 모두 마치고서, 홀로 나왔다. 카운터에 서 있던 여직원이 턱으로 앞을 가리킨다.
위이이이잉.
커피머신이 맹렬히 돌아가고 있다.
1.5 리터 페트병이 몽땅 들어갈 것 같은 텀블러를 들고 이성원이 서 있었다.
“대표님.”
내가 다가가 그를 불렀다.
그도 나를 본다. 여전히 다크서클이 진한 눈으로.
“저한테 안 맞는 감투예요.”
“아닐걸요?”
내 확신 어린 대답에 이성원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참, 도와드릴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그러기로 했잖아요.”
오케스트레이션을 배웠을 때, 이성원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이성원이 고개를 젓는다.
“도움은 이미 많이 받았어요.”
“저한테요?”
의아해서 묻자 이성원이 끄덕였다.
“기로 씨가 내는 곡들마다 많이 배웠거든요. 자극도 많이 받고.”
“에이, 그런 게 어딨나요. 성원 씨는 제대로 도와줬었는데.”
“됐어요. 동료 프로듀서끼리 자극만큼 큰 도움이 어딨다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이성원이 어느새 가득 찬 텀블러를 들었다.
그리고 슥 인사를 하길래 내가 물었다.
“동료보단 친구가 어감이 더 낫지 않아요?”
한껏 두꺼워진 옷들이 얇아질 계절이 오고 있었다.
살짝 더운 감이 있어 목도리는 풀었다.
그렇게 청담동 아더 레이블 사무실을 나섰고.
그 순간, 내 계약도 완전히 끝이 났다.
TKM에 들어온 지 4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