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이번엔 내가 데리러 올게요 (1)
좀 전까지만 해도 머리만 기대면 바로 곯아떨어질 듯 피곤했는데, 막상 차에 타니 졸음이 싹 달아났다.
또렷해진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다가 보이는 차창 밖.
우리는 인천공항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정신없었어요.”
옆에서 최정아가 한숨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똘망똘망한 눈이 나를 향했다.
나처럼 차에 타니 피곤이 가셨는지, 아니면 원래 커서 피곤해도 눈이 커 보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러게.”
정신없었지.
그만큼 흥분되는 순간들이기도 했고.
인천공항도 인천공항이었지만 한나절 전이었던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서의 기억이 더욱 또렷하게 떠오른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몇 걸음 사이에 벌떼처럼 몰리는 기자들.
눈이 얼얼할 정도로 팍팍 터져대는 플래시.
다음 활동을 기다리겠다며 한글 피켓까지 만들어 흔들던 미국 팬들.
멀찍이서 이 광경을 담기 위해 분주한 방송국 촬영팀까지.
사실 한국과 별다를 건 없었다.
그럼에도 새로웠지.
입국할 때까지만 해도 십여 명의 기자들이 전부였으니까. 그마저도 날 인터뷰하러 왔었고, 최정아에겐 그저 질문 몇 개 던지고 말았었던.
하지만 이번엔 완전히 달랐다. 모두 최정아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고, 최정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수많은 구애 속에서 최정아는 진짜 별이었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보다 더 빛나는.
그 모습이 내 입꼬릴 끌어 올리고 놔주질 않더라.
여전히 입매가 평소보다 높이 있다는 걸 느끼며 물었다.
“피곤하진 않아?”
“아뇨, 전혀······아, 피디님 피곤하시죠? 저도 갑자기 좀 피곤한 것 같아요. 졸려요.”
갑자기 풀린 눈으로 날 본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연기를 참 못하지. 간단한 거짓말조차 티가 팍팍 날 정도다.
미국에서 할리우드 관계자가 번갈아 가며 찾아왔었다가 그녀의 발연기를 보고 죽상으로 나간 일화는 이미 그쪽에서도 유명해졌다고.
그 이후론 할리우드의 할 자도 못 봤다.
‘하긴, 연기까지 잘 했으면 아직도 미국이었겠네.’
푸스스 웃으며 머리를 기댔다.
“좀 쉬자.”
어느새 밖은 반짝이는 불빛들로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렇게 야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진다.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정말 곧이구나.
사락. 사락. 옆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슬쩍 봤더니 최정아가 곁눈질로 내 쪽을 보다가 얼른 눈을 감는다.
내가 피식 웃었다.
“안 피곤한데?”
“아녜요! 피곤해요. 피디님도 얼른 주무세요.”
허둥지둥, 다급한 목소리에 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동안 수고했어.”
어두운 차 안에서도 반짝거리던 최정아의 입술이 못 참겠다는 듯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그리고 달싹거린다.
“피디님······.”
“어?”
문득, 그 모습이 야경보다 더 밝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넋을 놓을 때쯤.
그녀가 말했다.
“배고파요.”
*드르륵.
셔터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손님도 없이 불이 밝혀져 있던 작은 고깃집.
최정아를 본 사장님이 장사를 끝내셨다.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었다.
“여기 단골이야?”
“네. 친구랑 자주 왔었어요.”
“연예인 친구?”
“아뇨, 호연이라고 예전에 버스킹할 때 앰프 빌려준 친구예요. 피디님이 저 구해주셨던 버스킹이요. ···뭐, 피디님이 저 구해주신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 분수대 앞?”
최정아가 머릴 파닥거린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냐며 손가락을 접어 햇수를 세고, 경악한다.
그녀가 네 개째 접었을 때, 무심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남자 친구가 아니었구나?”
“네?”
“아, 앰프 들어준다고 했을 때, 극구 싫다길래 남자 친구가 데리러 온 걸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었거든.”
“아녜요. 없었어요. 물론 지금도 없구요.”
최정아의 말이 빨라진다.
선홍빛 살치살을 불판 위에 올리며 으쓱거렸다.
“만나도 돼. 난 연예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니까?”
“싫은데요. 안 만날 건데요.”
최정아가 날 본다. 팍 식다 못해 얼음장 같은 눈으로.
“······.”
내가 괜스레 살치살을 뒤집어댔다.
많은 생각이 스쳤다.
묻고 싶은 건 정해져 있는데, 대답을 듣지 않아도 답이 나와 있는 것 같아서.
굳이 애 입으로 들어서 뭐 어쩌려고?
그러다 작은 결심을 하고서 입을 뗐다.
“정아야, 근데 말이야······.”
“피디님.”
“응?”
최정아가 내 말을 잘랐다. 올려다보니 머릿속에 뭔가 가득 찬 얼굴이다. 아무래도 내 말은 못 들은 것 같고.
최정아는 자신의 접힌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다. 눈에 서린 얼음이 녹아 축축해진 표정이었다.
그녀가 다시 날 보았다.
“이번에 계약 기간 끝나면, 독립···하시는 거예요?”
“······.”
맞아.
목이 막힌 것처럼 이 한 마디가 안 나왔다.
하지만 내 머뭇거림이 대답이 되었나 보다.
최정아의 고개가 끄덕인다. 이렇게 힘없을 수가 있나.
그 모습을 보니 무언의 긍정 다음엔 나도 모르게 사과가 튀어나왔다.
“미안.”
“아녜요. 피디님이 왜 미안해요. 제가 죄송하죠.”
“넌 왜 미안해?”
“이런 표정밖에 못 지어서. 응원해 드려야 하는데······더 많은 뮤지션들을 만나고, 더 다양한 작업을 하고 싶으셔서 나가시는 거잖아요. 그러니 응원해드리는 게 맞는데······.”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대답이었다.
항상 그녀가 그랬듯이.
“내가 그래서 나가는 건 어떻게 알았어?”
“피디님이면, 그럴 것 같아서?”
“역시 ‘알아줘요’의 작사가님다우시네.”
“헤헤.”
기름기 눌어붙은 바닥보다 더 미끄러운 웃음소리가 가게 안에 번진다.
그 끝에 최정아가 기운을 차리며 말했다.
“응원할게요. 재능을 피울 기회가 없었던 더 많은 사람들이 피디님을 만나서 꿈을 이루길.”
“고맙다.”
“그리고요. 제 계약 기간이 끝나면요.”
“······?”
“그땐 저도 가도 돼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정아라면 이렇게 물어볼 것 같았다. 그래서 미리 생각을 해봤지. 나라고 욕심이 안 나진 않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어디에 있어야 그녀에게 이득인지는 너무 명확한 문제였다.
“작은 레이블일 거야. 녹음 장비도 지금에 비하면 형편없고, 홍보도 변변치 않은. TKM에 있는 게 너한테 더 낫지 않겠어?”
오늘은 유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자주 나온다.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상관없어요. 그리고 기억애는 핸드폰으로 찍은 영상 하나로 유명해졌는걸요.”
“그건 또 그렇네.”
반박하지 못하고 주억거렸다.
잘 익은 고기를 그녀의 앞접시에 얹었다.
살포시 웃는 최정아가 보인다.
“네가 원한다면야. 나는 고마운데······.”
“그럼 엄청 고마워하세요. 제가 엄청 원하니까.”
단호한 말에 뒷말을 잃었다.
내 말문을 막아놓고 소고기를 입안에 넣는 최정아. 승리했다는 표정으로 오물대던 그녀가 불쑥 물어왔다.
“근데, 아까 저 왜요?”
“어?”
“저한테 하실 얘기 있었던 거 아녜요?”
“아······그거?”
나도 소고기 한 점을 입에 물고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물어볼게.”
#한국에 돌아온 다음 날부터 나는 미국보다 사나운 추위에 두꺼운 코트를 걸치고 동분서주했다.
미국에서 두 달을 더 있었던 덕에 아더 레이블의 일들이 밀려있기도 했고, 그 외의 인터뷰나 각종 방송 출연 제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쉬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소홀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아서.
남은 시간은 아더 레이블을 위해 온전히 쏟아붓기로 했다.
그렇게 겨울도 끝자락에 걸려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요즘 너무 바쁜 거 아닌가?”
유재완 대표가 안경알을 닦아내며 말했다.
“곧 나갈 사람이 뭐 그렇게 열심이야.”
평소와는 달리 진중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익살스러운 말투. 나도 은근하게 물었다.
“그럼 휴가 좀 가도 될까요?”
“당연히 되지. 곡 스무 개 정도만 써놓고 간다면 바로 퇴사를 해도 돼.”
“미리 써놓으면 맛이 안 삽니다.”
“예전에 서 본부장한테 숙성 회 어쩌고 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과거로 돌아와 만든 첫 곡.
돌고 돌아 원래의 주인인 학준이 형에게 돌아간 곡을 작업할 때, 서재원 본부장과 나눴던 대화 내용이 유재완 대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 양반들이 내 얘길 꽤 예전부터 했었나 보네.
“그때만 해도 사내에서 아더 레이블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말이지.”
“독립 레이블의 성공 사례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근데,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그 덕에 회사 가치가 배로 커졌는데.”
유재완 대표의 금칠에 괜스레 찻잔을 드는데, 그가 덧붙였다.
“자네가 나간다면 거품처럼 빠지겠지만 말이야.”
“저라고 다를까요.”
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겠지.
TKM이란 뒷배경이 사라지는 거니까.
억 소리 나는 전폭적인 지원, 윤활유를 바른 듯 착착착 진행되는 유통 체계와 촘촘히 짜여진 마케팅 인프라. 하다못해 초호화 장비들까지 전부다.
‘나란 사람의 거품이 얼만큼이었는지 드러나겠지.’
그래도. 그럼에도.
“거품이든 뭐든, 한 번 도달했던 곳이잖습니까. 잘 준비한다면 다시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엔 보다 탄탄하게.”
유재완 대표가 날 보았다.
살짝 커졌던 눈은 줄어들고.
반대로 눈빛은 더욱 진해졌다.
그런 그가 돌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서재원 팀장이 자넬 내게 설명할 때 뭐라고 했었는 줄 알아?”
사고 잘 치는 놈?
그러고서 대뜸 도와달라고 한 놈?
어째 부정적인 것 밖에 안 떠올라 고갤 기울이는데, 유재완 대표가 자문자답했다.
“곡을 잘 만들지만, 그것보다 더 대단한 걸 가진 친구라고 했었지.”
그것보다 더 대단한 거?
다시 의문스러운 얼굴로 기다리자 유재완 대표가 말했다.
“뮤지션을 변하게 하는 능력. 자네한텐 그게 있다고 했었어. 그때가, 플로라 때쯤이었지 아마? 그런데, 이제 보니······그게 뮤지션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나 보군.”
“······?”
“내가 뭔갈 해볼 생각에 가슴이 뛰는 건 참 오랜만이야.”
유재완 대표가 시원스럽게 웃는다.
이쯤 되면 독립해서 음악이 아니라 동기부여 컨설턴팅이라도 해야 하나 싶다.
그 후로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특히 유재완 대표는 클라이브 데이비스를 만난 것에 대해 큰 흥미를 보였다.
나이도 비슷하고 아직 소니 뮤직 경영자 중 한 명으로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클라이브였으니까.
내 얘기에 그렇게 집중하는 모습은 또 처음 봤다.
그렇게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
대표실로 손님이 한 명 더 찾아왔다.
TKM 연말 콘서트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기획팀장.
그가 나의 독립을 작게나마 서포트 해주기로 했다. 마침 잘됐지. 그런 쪽으론 문외한이라 답답했거든.
회사를 나가서 차차 알아보려 했는데, 웬 떡인가 싶었다.
자꾸 나가더라도 한가할 땐 곡 좀 만들어 달라는 유재완 대표의 추임새만 없었어도 말이지.
떡이 목에 막힐 것 같네.
“들뜨신 것 같습니다.”
“대표님이요?”
“네, 대표님 두 분 다요.”
기획팀장이 우리가 나온 대표실과 나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전 그냥 떠는 건데요. 혹시라도 나가서 망할까 봐.”
“에이, 장 대표님이요? 뭐. 그건 그거대로 TKM엔 호재겠네요. 그동안의 성공은 TKM 덕이었다는 기사가 날 테니까요.”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기획팀장이 웃었다.
“농담입니다.”
아닌 거 같은데.
“진심 좀 섞인.”
그럼 그렇지.
그의 놀라운 애사심에 푸스스 웃으며 기획팀 사무실로 들어섰다.
기획팀장이 나를 회의실에 앉히자마자 물어왔다.
“나가면 당장 투자자가 필요하실 거예요.”
나도 그게 가장 걱정이다.
유통도 마케팅도 모두 돈에서 시작되는데, 그러려면 투자자를 구해야만 하니까.
아더 레이블 바지 대표에겐 TKM이 있었지만, 이젠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작은 레이블에겐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먼저 굵직한 투자자들을 확보하는 방법. 이게 가장 일반적이긴 합니다. 게다가 상장도 하지 않았으니 회사 내부의 결정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도 없죠. 원칙적으론요.”
“원칙적으로는요?”
“근데 사실 우리나라에선 잘 지켜지진 않아요. 특히 투자금이 클수록 더 그래요. 내가 돈을 이만큼이나 냈는데, 이런 것도 요구 못 해? 뭐, 이런 식이죠.”
그건 좀 곤란한데.
그래서야 TKM을 나가는 이유가 없을 테니까.
“물론 계약서에 그런 것들도 제대로 명시를 한다면 큰 문젠 없겠지만요.”
“그리고요?”
“다음은 보통 인디 밴드들이 많이 쓰는 방법인데, 앨범 제작이 확정되면 거기에 대한 투자를 받는 거예요. 이 경우엔 대부분 일반인들 대상 투자인데, 그렇다 보니 앞서 말한 문제점은 거의 없어요. 대신 워낙 소액들이 모이는 거라 회사가 굴러가기엔 많이 부족하겠죠.”
무슨 소린진 알겠다.
결국, 일장일단이 있다는 얘긴데···.
눈썹을 매만지며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물었다.
“그 둘을 섞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