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멜로디와 멜로디 (5)
장기로가 채드 이사를 지나쳐 라운지 안으로 들어섰다.
채드 이사의 입꼬리에 넘실대던 비웃음은 사라진 지 오래.
지금은 생각지도 못한 서브 스테이지의 성황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월드덕에서 세비슨 너플러와 더불어 가장 높은 주가를 올리고 있는 산드라 블란쳇이.
이미 수많은 팝페라 가수, 팝스타들과 크로스오버를 하며 일반인들에게도 유명한 카운터리 오케스트라와 만났다.
그런데 왜. 고작 한국에서 온 여자, 그리고 듣도 보도 못한 오케스트라 따위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와 있는 걸까?
여긴 파리가 날려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는데.
애초에 그걸 비웃어주러 온 건데.
‘대체 왜?’
“여긴 더 채워줄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보다시피.”
“······.”
채드 이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살벌한 눈빛만이 장기로를 꿰뚫을 듯이 일렁거릴 뿐이었다.
반면 장기로는 그의 눈초리조차 사근사근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채드 이사를 더욱 열 받게 했다.
‘네놈 따위가······.’
미국도 아닌 작은 나라, 작은 레이블의 대표.
그것도 경영인이라 할 수 없는 일개 프로듀서.
고작 이 정도로 설명이 가능한 놈인데, 사사건건 눈엣가시 같았다.
적당히 밟아주면 납작 엎드려야 할 놈이 계속 분탕질이잖나. 그래서 밟고 또 밟았는데, 어째 그때마다 놈은 살아났다.
아니, 살아난 정도가 아니라 더 커졌다.
‘더 유명해지고, 더 성공하고······!’
갑갑한 목을 뚫고 욕지기가 튀어나오려는 순간, 비서가 부들대는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이사님.”
“왜?”
“저기······.”
비서가 손을 뻗은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채드 이사. 이윽고,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람들 틈에서 나타난, 큰 키의 금발 미녀 때문이었다.
채드 이사의 벌어진 입에서 한숨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비슨, 네가 왜 여기에······.”
복잡한 목소리가 시끌벅적한 주변 소음에 파묻힌다.
그녀가 폴 인 뮤직 페스티벌에 온 것 자체는 이상할 게 없었다.
원래 페스티벌을 좋아하는 여자인 데다가 내일 타임테이블엔 그녀의 이름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떡하니 같은 소속사의 산드라가 옆 스테이지에서 공연을 준비하는데, 여기에 와있다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세비슨은 딱히 당황한 기색 없이 오히려 미소를 띄우며 으쓱거렸다.
“개인적으로 보고 싶은 공연이어서요. 같이 온 친구들도 마침 같은 생각이었고.”
“친구들? 설마 네 뮤지션 친구들?”
채드 이사의 머릿속에 세비슨과 친한 뮤지션들의 얼굴들이 스쳤다.
하나같이 인지도 있는 유명 뮤지션들이었다.
“걔, 걔네가 여기 있다고?”
“뭘 놀라세요. 우리뿐만이 아녜요. 여기 지금, 무대 대기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뮤지션들이 바글바글하거든요. 아무래도···뮤지션들에겐 이 공연이 더 끌리나 보네요.”
채드 이사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표정이 세비슨의 입을 막진 못했다.
“아, 관객들도 마찬가지일지도.”
그녀가 라운지 아래 몰려드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대 준비가 지루하지 않게 퍼포먼스팀이 열 일을 하고 있었다.
이따금 그들의 쇼에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무대가 준비되는 10여 분 동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여전히 계속 스테이지 안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세비슨이 입꼬릴 올리며 채드 이사를 돌아봤다.
“이 정도면 메인 스테이지가 비어 있는 거 아녜요? 관객들 죄다 여기로 오는 것 같은데?”
*“이따위 공연에······.”
채드 이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끝까지 고수하며 등을 돌렸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그의 등에도 화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렇게 강 건너 불구경이 끝났다.
채드 이사를 퇴치해준 세비슨이 싱그럽게 웃으며 다가온다.
“저 사람은 죽어도 이해 못 할 거예요. 왜 사람들이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지. 성공하는 곡은 따로 있다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내가 느릿하게 끄덕이며 물었다.
“근데, 괜찮아요?”
“뭐가요?”
“채드 이사, 소속사 임원이잖아요.”
“뭐, 아직까진 그렇죠.”
그녀의 뉘앙스를 듣고 내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은근하게 물었다.
“브랜하고 얘길 많이 나눴나 봐요?”
내 눈치가 맞았는지 세비슨의 눈꼬리가 휘었다.
소리 내어 웃는 그녀를 보며 내가 주억거렸다.
“확실히 월드덕보단 턴투더 레이블이 더 잘 어울려요.”
“피디님 곡은 저한테 안 어울리고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채드 이사를 골려주러 온 줄 알았더니, 나도 표적에 있었나?
당황해서 말을 먹는데, 세비슨이 푸스스 웃었다.
억지로 받아낼 생각은 없다며.
그럼에도 수시로 곡 달라고 졸라는 해보겠다며.
미셸도 비슷한 얘길 한 것 같은데, 독립해서 작업할 뮤지션 찾기가 어려워져도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이후 세비슨이 친구들이 있는 테이블로 가지 않겠느냐길래 정중히 거절했다.
이 공연만큼은 온전히 혼자서 공연에 집중하고 싶어서.
“그럼, 또 봐요.”
길쭉한 팔을 흔드는 세비슨에게 인사를 하고, 적당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세비슨의 말대로 익숙한 얼굴들이 많다. 여기가 라운지인지 대기실인지 모를 정도로.
‘이 사람들로만 페스티벌 하나를 열어도 되겠는데?’
난간 쪽은 이미 사람이 한가득이라 계단식으로 되어있는 라운지 뒤쪽으로 움직였다.
무대는 멀어졌지만, 높이가 올라가 그만큼 많은 것들이 시야에 한 번에 들어왔다.
여전히 밀려드는 인파.
무대 뒤쪽으로 넘어가는 해와 반대편에 뜬 달.
퍼포먼스 팀의 퇴장과 공연이 곧 시작된다는 걸 알리는 전광판.
마침내 무대 위로 현중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느 때처럼 검은 턱시도와 드레스가 아닌, 각자의 개성 있는 차림으로.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시선들이 무대 위로 모여들고.
웅성거리던 소음들이 차츰 잦아드는가 싶더니 뒤이은 그림자의 등장에 피크를 찍을 듯 확 커졌다.
핑크빛이었던 하늘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매직 아워 (magic hour).
마법이라 불리는 순간에, 최정아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굳이 메인 스테이지 놔두고 왜 여길 오자는 건데?”
남자가 자신을 윈드 스테이지로 잡아끄는 여자에게 묻자, 여자가 답했다.
“너도 산드라는 별로라며.”
“관종 같아서 좀 그렇긴 한데······그래도 노래는 잘 부르니까. 그리고 페스티벌 오면 메인 스테이지에 가만히 있는 게 가장 나은 선택 아냐?”
이에 여자가 단호하게 고갤 저었다.
“어, 아냐. 페스티벌은 뷔페라고. 다양한 뮤지션을 보는 곳. 페스티벌 처음 온 티 좀 내지 마.”
“가만히 있어도 뮤지션 계속 바뀌잖아. 코스 요리처럼······.”
반박하던 남자가 여자의 눈초리에 못 이겨 입을 닫았다. 어차피 끌려갈 거 좋게좋게 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남자가 주섬주섬 목에 건 타임테이블을 훑었다.
“최···최정아? 이렇게 발음하는 게 맞나? 이 사람 유명해?”
“최근 들어 확 유명해졌어. 방송 출연도 많이 하고. 음원도 스포티파이에서 꽤 높을걸?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십몇 위였는데.”
“그래?”
남자는 묻고, 여자는 답하면서 둘은 계속 움직였다.
윈드 스테이지 근처에 다다르자 남자가 주변을 훑으며 의외라는 듯 고갤 기울였다.
‘그냥 얘 취향이 매니악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이쪽으로 많이 가네?’
스테이지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스테이지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여기가 메인 스테이지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큰 스테이지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아까 메인 스테이지도 이 정돈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 흥분한 여자가 반짝이는 눈으로 남자를 잡아끌었다.
“벌써 무대에 올라왔네! 얼른 가자, 얼른!”
스테이지가 워낙 넓어서 무대 근처까지 가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무대 앞은 이미 발 빠른 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페스티벌이 익숙한 여자는 빈공간을 파고들기 위해 측면을 선택했다. 라운지 바로 아래, 구석으로 파고들어 그나마 꽤 앞 자릴 확보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남자가 한숨 돌리며 문득 시선을 돌렸다.
“어······?”
“왜?”
“저기 매커니 아냐?”
“매커니가 여길? 어, 진짜네? 그 옆에 데보라도 있고, 세라도 있네. 어, 저쪽엔 세비슨 너플러랑 바비 로스턴이다.”
“여기 뭐야? 연예인들 엄청 많은데?”
“거봐, 내가 여기 핫하댔지?”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기하단 눈빛으로 계속 고갤 두리번거린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으쓱거리던 여자가 무대 쪽을 보더니 불쑥 소리쳤다.
“이제, 진짜 시작하나 봐!”
그녀의 외침에 연예인 구경에 여념이 없던 남자도 아쉬운 시선을 돌렸다.
화면엔 몇 명인지 셀 엄두도 안 나는 오케스트라와 그들 앞에 앉아 통기타를 잡은 여자 뮤지션이 보였다.
길게 늘어진 머리가 가을바람에 살랑거린다. 그녀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클로즈업되었다.
마침 여자 뮤지션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고.
남자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예쁘잖아?’
방금까지 라운지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화려한 스타들을 무더기로 봤던 눈인데,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쪽이 더 자석처럼 끌어 당겨져 착 붙는 느낌이랄까.
매력적이다, 라고 남자가 생각했을 때였다.
“눈이 되게 슬퍼 보인다.”
옆에 있던 여자가 툭 내뱉었다.
그런가?
남자가 유심히 살폈다. 여전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샘솟았지만, 자세히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처연해 보이는 눈망울이 무대 아래로 향해 있었다.
이제 공연이 시작되는데, 왜 저런 표정을 지은 걸까? 무슨 일이 있나?
남자의 의문이 깊어지는 찰나.
여자 뮤지션이 기타 줄을 튕겼다.
어떤 멘트도 없이 공연이 시작되었다.
한 음, 한 음 명확하게 짚어나가는 아르페지오 선율.
그 위로 청아하면서도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남자는 이해했다.
‘이래서였구나.’
이런 곡이라,
그런 표정을 지었구나.
이윽고 여자의 목소리 뒤편에서 첼로가 땅거미가 드리우듯 존재감을 드러낸다.
두 소리의 만남은 지독히도 슬펐다.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이 노래······제목이 뭐라고?”
“이거? Memory Love (기억애愛).”
#최정아가 감았던 눈을 떴다.
대규모 공연이 익숙한 그녀에게도 한 번도 본 적 없던 풍경이 펼쳐진다.
수많은 관객들이 그녀의 눈에 가득 찼다. 그래도 다 못 담을 정도였다.
이번에도 멘트는 없었다.
그저 그녀는 무대 가장 앞에서 기타 줄을 매만졌다. 극도로 예민해진 최정아의 손끝을 타고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숨을 쉰다.
호흡을 한다.
소리를 만든다.
그리고, 감정을 얹는다.
띵-!
약속된 대로 기타 줄 하나를 튕기자 수십의 악기들이 그녀가 이끄는 곡 위에 올라탔다.
지잉-!
일제히 움직이는 활들.
여러 겹 쌓인 두터운 선율이 관객들의 남은 여운을 씻겨냈다.
다음 노래를 위해서.
그리고.
이전 곡이었던 기억애와는 전혀 다른 색의 감정을 뒤집어쓴 최정아가 또다시 감았던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