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멜로디와 멜로디 (4)
메인 스테이지.
이름 그대로 주 무대다. 이 페스티벌에서 가장 굵직한 이름들만 모아서 짜여진.
관객 입장에선 특정 팬이 아니고서야 메인 스테이지에 관심이 먼저 가는 게 자연스럽지. 아는 이름도 거기에 가장 많을 테고.
게다가 ‘폴 인 뮤직’은 같은 시간대에 장르마저 겹치니 관객의 발걸음이 향할 선택지는 더욱 좁혀질 거다.
“······.”
윈드 스테이지라 이름 붙여진 무대 앞으로 다가가 주변을 훑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메인 스테이지의 구조물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쉽지 않겠네.’
각자 할 것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경쟁심리가 불쑥불쑥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노리는 게 노골적이니, 더 무시가 안 되는 거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또 한 발자국.
무대 베이스가 한눈에 들어올 때까지 걸음을 옮겼다.
‘이쯤.’
여기에 펜스가 쳐질 거다.
몸을 돌려 무대를 등졌다.
드넓은 공터가 시야를 넘어서까지 펼쳐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을까.
메인 스테이지와 비슷한 규모라 했으니 푸드 존과 각종 광고 부스, 그리고 라운지까지 들어오더라도 수만 명은 거뜬할 것 같은데.
‘얼마나 채워지려나?’
모르겠다. 감도 안 와.
대신 이런 곳에서 최정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면 끝내주겠다는 생각은 아까부터 머릴 세차게 뒤흔든다.
무대를 가득 메운 오케스트라와.
그들 앞에서 통기타 한 대를 들고 앉아 있는 최정아.
‘굉장하겠지.’
벌써부터 내 눈에 들어올 그 풍경이 상상돼서 명치가 간질거리는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바랐다.
그 순간이 왔을 때.
최정아가 무대 위에서 보게 될 풍경도 굉장하길.
#“뭘 그렇게 웃으면서 봐?”
김 실장이 의자에 쪼그려 앉은 최정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자신의 핸드폰을 내민다.
김 실장이 푸흐흐 소리 내 웃었다.
“어디 공사장 가셨다니?”
공사장이 맞긴 하다. 페스티벌 공연장을 만드는 공사장.
“사진 진짜 못 찍으시죠?”
“그러니까. 철골들 나온 무대 사진이야 그렇다 쳐도, 뒤에 자연경관까지 이렇게 찍어놓으신 거 보면 진짜 심각하네. 어디 가서 피디님한테 사진 찍어달라고 하지 마.”
고개를 내젓는 김 실장을 보며 최정아가 끅끅대고 웃었다.
그 사이, 최정아가 보낸 메시지를 본 김 실장이 피식 웃었다.
“피디님 자신도 보내달라고 했어?”
“네.”
“퍽이나 보내시겠······보냈네?”
사진이 왔다.
최정아가 허겁지겁 핸드폰을 확인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실장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사진을 보내주긴커녕 찍지도 않을 것 같은 사람한테.”
“무대 크기가 가늠이 안 된다고, 보내달라고 했죠.”
“오, 똑똑한데. 그래서, 어때? 무대 크긴 괜찮은 것 같고?”
“음······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아니라 알 바가 아닌 얼굴이다. 애초에 목적이 그게 아니었으니.
저 봐. 크기 측정하겠다는 애가 엄지와 검지로 화면만 냅다 키우고 있잖나.
김 실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 쪽을 보았다, 연습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어서.
“왔나 보다.”
최정아의 고개가 올라갔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각자의 악기 케이스를 들고서, 꺅꺅거리며 소란스레.
최정아도 벌떡 일어나 밝게 웃었다.
“오셨어요.”
방금 막 미국 땅을 밟은 현중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습실 안으로 들어섰다.
*꿀꺽. 김 실장이 마른 침을 삼켰다.
입술도 바싹 말랐다.
접이식 의자에 앉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영락없는 관광객 같았는데.
이들의 연습을 처음 본 것도 아닌데.
단콘 연습과 앨범 녹음으로 한국에서 숱하게 봐 왔는데.
오랜만에 미국에서 만난 그들은 뭔가가 달랐다.
최정아와 반갑게 인사하며 깨발랄하던 현악기 파트 연주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날 선 눈빛으로 활을 켰고, 타악기와 목관 악기 파트는 진즉에 준비를 마치고 악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 놓인 보면대엔······.
‘저기가 제일 살벌하네.’
현중필의 수장인 최연석 예술감독이 보면대를 집어삼킬 기세로 악보에 집중하고 있었다.
산다라의 무대를 함께 꾸밀 카운터리란 오케스트라가 그렇게 유명하다는데······.
‘그들과 경쟁구도가 만들어져 그런 걸까?’
그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웃음기를 쫙 뺀 최정아가 최연석 감독에게 다가갔다. 둘은 악보를 보며 얘길 나누기 시작했다.
들리지도 않지만, 들려도 자신은 뭔 소린지 모르겠지.
‘별 세상이구만.’
김 실장이 의자에 슬쩍 앉았다.
그러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최정아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최연석 감독이 지휘봉을 집어넣었다.
*‘지휘 없이 직접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보겠다?’
한참을 고민하던 최연석 감독이 납득하는 얼굴로 말했다.
‘좋아, 괜찮은 아이디어야. 그렇게 한번 해보자고.’
그렇게 최연석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고, 최정아가 기타를 잡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이 곡을 이끌어 보려는 이유를.
좀 더.
더 잘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느낌을.
그건 뭔가 뚫릴 듯 뚫리지 않는 얇은 막 같아서, 온전히 집중해야만 했다.
지휘나 다른 악기들을 신경 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니 오히려 자신이 이끌어야 했다.
‘우선, 기본부터.’
좌중이 조용한 가운데, 최정아가 눈을 감았다.
큰 호흡.
공기가 정수리를 툭 하고 치고서 아래로 떨어진다.
긴장한 아랫배가 내려오는 호흡을 다시 끌어올리며 더욱 강하게 솟구치고.
성대를 울리기 직전, 최정아가 떠올린 감정들에 범벅이 된다.
‘한 번 더.’
그녀는 계속 반복했다.
몸이 하나의 팀이 된 것처럼.
‘숨’을 치고, 깎아 ‘소리’로 만들었다.
자신이 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얇은 막을 뚫을 수 있을 만큼 강해질 때까지.
계속, 또 계속.
이윽고 최정아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녀를 기다린 수많은 시선들이 보였다.
그리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월드 TKM 사무실.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화이트보드에 직원이 다가섰다. 그리고 구석에 적힌 숫자를 과감하게 지웠다.
D-DAY
더 이상 숫자를 적을 필요 없었다.
오늘이니까.
오늘이 몇 달간 우리가 목표로 삼고 달린, 폴 인 뮤직 페스티벌의 개최일이자 최정아가 무대에 오르는 날이니까.
“후우!”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로 돌아온 직원에게 내가 물었다.
“반응은 좀 어때요?”
“나쁘지 않아요. 물론······나쁜 것도 있지만.”
“들어보죠.”
“벌써부터 메인 스테이지에 망부석처럼 있는 사람들이 꽤 된대요.”
“산다라 보려고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메인 스테이지에 쟁쟁한 뮤지션들이 좀 많아야죠. 산다라 앞뒤만 해도 토빈에 퍼플베닉에······.”
잠시 숨을 고른 직원이 말을 이었다.
“특히 메인 스테이지 헤드라이너인 솔튼 레이턴 제대로 보려면 해지기 전에 메인 스테이지에 가야 한다는 얘기가 돌아서 아예 3, 4시부턴 메인 스테이지에만 있을 거란 사람들도 많아요.”
그러자 옆 파티션 너머에서 머리 하나가 솟았다. 김지희였다.
“그래도 정아 씨 인지도가 그동안 방송 타고 하면서 엄청 올랐잖아요? 팬들도 많아졌고. 그러니 어느 정도 채워지지 않을까요?”
“어느 정도야 그렇겠죠. 스포티파이 순위도 상위권까지 올랐고, 화제성 1위도 찍고 했었으니까. 근데, 윈드 스테이지 거기 엄청 넓더만요. 이번에 뉴욕 타임 스퀘어에 생중계한다던데 드론으로 위에서 찍었을 때, 비어 보일까 그게 걱정이에요.”
직원의 말에 김지희도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공연장에 탈모라니······’라고 중얼거리며.
들고 있던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넣고 직원에게 말했다.
“일단 계속 반응 봐주시면서 좋은 반응은 한국으로 넘겨주세요. 보도자료 내려고 준비 중인가 봐요.”
“알겠습니다. 이제 공연장으로 가실 거죠?”
직원의 물음에 겉옷을 집어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몇 달간 준비해온 무대의 결과를 확인하러.
#공연장에 도착해 대기실부터 찾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최정아 말고. 현중필 단원들 말이다.
그 최연석 감독조차 연신 물을 마시며 자신의 감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클래식의 대중화를 외치던 그가 거대한 크로스 오버의 현장에 와 있으니 감회가 새로운 건 알겠다만.
‘같은 얘길 스물세 번 하는 건 심했지.’
반면, 최정아는 홀로 침착하다.
아니 그보다 더, 뭐랄까······.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여전히 내 앞에서 헤실헤실 웃지만, 속으론 칼이라도 가는 듯, 신중해 보였다.
‘더요. 더 잘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엔 제가 한번 해볼게요.’
그때, 최정아는 뭘 말했던 걸까?
또다시 자신의 한계라던가 벽 같은 걸 넘어설 준비가 된 걸까?
그걸 이루는 순간, 한동안 바뀔 생각을 안 하던 저 멜로디가 비로소 변하게 될까?
모르겠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마지막 리허설에서의 그녀의 노래는 지금까지와 미묘하게 달랐다는 것.
묘한 기분을 안고서 그녀의 차례가 되길 기다렸다.
앞선 두 팀의 공연이 끝나고, 마침내 최정아의 공연 순서가 되었다.
“저 갈게요!”
계속 나에게 손을 펄럭이며 백 스테이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최정아.
해맑은 표정의 그녀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는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라운지로 통하는 방향이다. 무대도, 관객들도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그녀의 공연을 지켜보고 싶었다.
“······.”
근데, 보고 싶은 거에 이 작자는 없었는데 말이지.
“오랜만이네요.”
멀끔한 차림으로 다가온 백인 남자가 재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채드 이사.
LA 월드덕 본사에서 보고 처음 보는 얼굴이다.
은유란의 성공 이후로 처음 듣는 목소리고.
내 입에서 좋은 어투가 나갈 리 없었다.
“라운지를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메인 스테이지는 반대쪽입니다.”
“잘 찾아온 것 같은데요? 제가 보고픈 건 여기 공연이어서요. 여기, 윈드 스테이지.”
채드 이사의 손가락이 벽에 붙은 글씨를 가리켰다.
“근데, 이름부터가 좀 별로네. 바람에 낙엽만 날릴 것 같잖아.”
공연이 아니라, 그걸 보러 왔겠지.
“한 명이라도 더 가서 채워주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래도 우리가 같이 일을 할 뻔한 적도 있었는데.”
심한 말들이 무궁무진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이내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보류하기로 했다. 여기서 말싸움하기엔 최정아가 곧 무대에 올라설 시간이라.
무시하고 걸음을 옮기려 하자 채드 이사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뭐, 지금쯤이면 무대 앞에 모일 사람은 다 모였겠네. 아니면, 낙엽만 쌓여있으려나?”
여유롭게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서 내 옆을 걷는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릴 들으며 계속 걸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소리가 크네. 아예 없는 건 아닌가 봐. 하하······하하···하.”
채드 이사의 웃음이 끊어졌다.
앞에서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복도 안으로 함성 소리가 들이치면서부터.
조소에 가깝던 채드 이사의 얼굴엔 금이 가기 시작했고, 걸음은 바빠졌다.
어느새 나를 앞지르더니 복도 끝, 라운지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당혹스러운 얼굴로 멈춰섰다.
라운지가 이미 꽉 차,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라운지만이 아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무대 아래 넓은 들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썰물이 없는 파도처럼 수많은 관객들이 무대 앞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내가 뒤로 다가가 모른 척 물었다.
“낙엽이 쌓여서 못 들어가고 있어요?”
채드 이사의 얼굴이 짓밟힌 낙엽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