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201화 (201/221)

201. 멜로디와 멜로디 (1)

“잠깐, 잠깐, 잠깐.”

매니저가 거침없이 직진하는 한지영을 막아섰다.

한지영의 눈매가 치켜 올라간다.

“왜?”

“기자랑 인터뷰 중이라던데 이렇게 무작정 가서 어쩌려고?”

“오늘 미국으로 출국한다는데, 인터뷰가 언제 끝날 줄 알고 기다려.”

“야, 그래도 그건 좀. 너도 급이 있는데······.”

아무리 인기가 떨어졌다 해도 한지영이다.

탈 아이돌이라 불리며 그룹을 견인했던.

불미스러운 일로 그룹을 나왔지만, 오히려 동정표까지 얻으며 아이돌 출신 중 호감인 몇 안 되는 솔로 뮤지션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지영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톱스타들도 스폰 술 마시는 곳까지 졸졸졸 따라가서 술 따르고, 피디 똥 싸는 화장실까지 가서 기회를 달라고 비는 게 이 바닥인데 이 정도로 뭘. 그리고 급 따지자면 상대는 기로 프로듀서야.”

매니저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던, 빌보드 1위까지 올랐던 프로듀서잖나.

“그러니까 얼른 가자.”

한지영이 매니저를 지나쳤다.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도 산전수전 다 겪어가며 버텨왔기에 기회 앞에서 체면 따위를 차릴 그녀가 아니었다.

‘뻔뻔함 없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여긴.’

그렇게 다짐하며 장기로의 이름이 붙어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래요? 일단, 들어와요.”

적어도 문전박대를 당하진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상대는 매우 환대를 해줬다. 이 정도면 원래 자신의 팬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최정아, 그년이 혹시 일렀을까 말까지 만들어 왔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보네.’

여기까지 왔다면 다음은 계획이 있었다.

한지영은 장기로가 그동안 했던 인터뷰들을 떠올렸다. 그가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쉬울지도.’

한지영이 매니저를 슬쩍 보며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장기로가 손짓한 의자로 다가가

가슴께에 손을 얹고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한지영이 슬쩍 옆을 훑었다.

사운드베리 채연주 기자라고 했던가.

그녀는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질문지를 만지작거리며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고.

퍽 어색한 자리지만, 한편으론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는 한지영이었다.

‘장기로가 한지영을 대기실 안으로 들여 대화를 나눴다.’

이 내용으로 기사 한 줄 나가면 실보단 득이 훨씬 클 테니까.

기로 프로듀서가 한지영에게도 뭔가 가능성을 본 걸까? 하는 반응들이 생겨날 테고, 그러면 설령 일이 잘 안 되더라도 다른 대형 기획사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으리라.

장기로란 사람은 지금 연예계에서 그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니까.

“인사하러 와줘서 고마워요. 근데,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건 뭘까요?”

들뜨는 마음에 표정관리를 하는 동안, 질문이 들어왔다.

‘어떻게 구슬릴까.’

보던 대로 순둥순둥하고, 듣던 대로 온화하다.

녹음실에서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된다는 건 유명하지만, 여긴 대기실이고.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돌이었어요. 거기서 나와 솔로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구요.”

“알아요, 따돌림을 당했다고 알려졌었죠?”

“네? 아, 네. 그 후로 겨우 기획사에 들어갔는데······.”

장기로의 어투가 조금 묘했지만 한지영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제게 자꾸 섹시 컨셉만 강요해요. 저한텐 이게 딱이라며······너무 답답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렇게 무작정 찾아 왔어요. 죄송합니다.”

“아녜요, 잘 왔어요.”

한지영이 웃었다. 물론 속으로.

“저 정말 노래가 하고 싶은데, 이것밖엔 답이 없는 걸까요?”

#답이 없다.

그게 눈앞에서 온갖 처량한 척을 다 해대는 한지영에 대한 내 답이었다.

안 그래도 최정아 일로 마음에 안 들었는데, 방금 그 방점을 뚫고 올라가 버렸지.

만약 찾아온다면, 이런 식일 거라 예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당하니 더 괘씸하다.

이런 식으로 날 구슬려 보겠다?

헛웃음이 나온다. 물론 속에서.

섹시 컨셉 어쩌고 한 것도 글쎄······.

‘믿을 수 없지.’

한지영의 소속사는 MI 엔터라는 그리 크지 않은 기획사인데, 언젠가 그곳 대표를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모습이 인상적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데.

요즘은 연예인들이 먼저 스폰 좀 잡아달라, 노출이 너무 약하지 않냐, 대놓고 말한다며 그게 당연시되는 업계에 대해 혀를 찼었지.

아무래도 그의 말에 더 믿음이 간다.

내 눈앞에서 메마른 눈을 훔치는 저 양치기 소녀보단.

내가 입술을 적시며 그녀에게 물었다.

“한지영 씨가 나온 아이돌 그룹 이번에 신곡 나왔던데, 그거 보면 어떤 생각 들어요?”

한지영의 표정이 움찔한다.

“갑자기 그건 왜요?”

“아니,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요.”

하지만 이내 셔터를 내리고 뻔뻔하게 표정관리를 한다. 애써 밝은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캔디처럼 보이고 싶은가 본데.

“이젠 다 용서했어요. 그땐 우린 모두 어렸으니까······.”

“어리다는 게 면죄부가 되진 않죠.”

“···네?”

“특히나 멤버들 무시하고, 소속사 몰래 스폰 만들다가 걸려 방출 위기에 처하자, 소속사와 멤버들을 가해자로 둔갑시킨 진짜 가해자에겐 더더욱요.”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떨리는 눈으로 날 보던 그녀. 뒤에서 눈치를 보던 매니저는 더 가관이다. 판사가 표정만으로 판결을 내릴 수 있다면 이들을 보고 바로 유죄를 때렸겠다.

“설마 저요? 저 안 그랬어요!”

“한지영 씨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지금 꼭 그런 것처럼 얘기하시니까······피디님이 뭔갈 오해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 대체 누가 그런 얘길.”

순간 여기에 채연주도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녀의 얼굴이 덜컥 굳었다.

시선을 돌리며 채연주를 본다.

출저가 저기인가 하는 눈빛.

채연주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표정이 일품이다. 그럴수록 한지영의 표정은 더 복잡스러워졌고.

그나저나.

‘좀 화나네.’

유치한 복수나 하려고 했는데, 조금 진지해진다.

이상하잖아.

스폰을 만들었다고 잘나가는 아이돌 멤버를 방출시키려는 전 소속사.

섹시 컨셉을 자처하는 뮤지션을 말리고 싶어 하는 현 소속사.

정말 열심히 해보고자 하는 누군가에겐 평생에 한 번도 오지 않는 좋은 소속사들인데.

그걸 두 번이나 얻었으면서 제 복을 발로 걷어차는 뮤지션. 아니, 뮤지션이라 부르기도 아까운 여자.

‘네게 갈 기회들이 아니었는데.’

불안감에 정신을 못 차리는 한지영을 보며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된다.

내가 앞으로 만들 기회들은, 꼭 필요한 이들에게 돌아가게 하겠다고.

“증거도 없는 말을 너무 함부로 하시네요.”

그때, 보다 못한 매니저가 끼어들었다.

건장한 몸은 위협적이나, 눈빛은 한지영과 다를 바가 없다. 사시나무 떨리듯 떨고 있지.

“없으면 꺼내지도 않았겠죠.”

그리고 그 위협이란 거.

지금 내가 하고 있잖아.

#조수석에 탄 채연주가 피식 웃었다.

대단한 여자다.

아까 전 상황을 보고 나와 저렇게 해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다니.

새삼스레 감탄하는데 그녀가 말했다.

“뭔가 싶었어요. 바쁘신 거 같아 인터뷰 얼른 끝내드렸더니 갑자기 한지영한테 들어오라시길래.”

“황당했을 텐데 협조해주셔서 고마워요.”

“제가 고맙죠. 특종거리 하나 제대로 건졌는데.”

내가 고갤 돌렸다.

“아까 한지영한테 안 터트리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안 그럼 집에 못 가게 할 것 같아서 그랬죠. 그냥 찌라시도 아니고, 이렇게 확실한 걸 어떻게 덮어요. 그리고 제가 안 터트릴 거예요. 아직 그 정도 사이즈를 감당할 만한 위치는 아니라서.”

“······?”

“제가 은혜 갚을 선배 기자님들이 많거든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베테랑 기자님 다 되셨네.”

“어머? 이거 누가 알려주신 방법인데요.”

“푸흐, 어떤 쓰레기를 그런 식으로 치웠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채연주가 킬킬대며 웃었다.

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내 입술에 바르던 그녀가 물었다.

“근데 어떻게 아신 거예요? 정말 전 소속사에서 흘린 게 아니에요?”

“네, 아녜요.”

“전 멤버들도 아니고요?”

“네.”

“그럼요?”

뭐, 사실대로 얘기해도 상관없겠지.

미래의 일이라는 것만 쏙 빼면.

“돈으로 뭔가를 사는 사람들은 항상 거기서 만족을 못 하더라고요. 꼭 주변에 자랑을 해요.”

“아하~.”

채연주가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그쪽을 더 파볼 생각인가 보다.

일이 커지겠네.

그건 그거대로 좋다. 어디 한지영뿐이겠나.

실력과 노력을 배신하고, 선한 사람들을 밟고 더러운 손을 붙잡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이들이.

“비위가 실력이나 인성보다 더 중요한 곳이라 하더라고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렇게 말하는 채연주에게 내가 답했다.

“그래서 전, 틀린 말이 되게 해보려고요.”

#채연주를 근처 역에서 내려주고,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내리자 쨍한 햇빛 아래에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던 주재윤이 한달음에 달려온다. 차 키를 건네며 캐리어를 끌었다.

“지금 안에 장난 아녜요. 누가 보면 할리우드 스타가 내한 온 줄 알겠어요.”

“기사로 사진 봤어요. 지금 정아는 어떻게 하고 있어요?”

“한 시간 동안 사인하다가 이제 기자들이랑 인터뷰 중이에요. 팬들은 아예 들어가는 거 손까지 흔들어줄 생각인지 가지도 않아요.”

말만으로 공항 내부가 얼마나 떠들썩할지 그려졌다. 그리고 곧 내가 얼마나 그림에 재능이 없는지 확인했다.

내가 그린 그림을 찢고 나온 현실이 보인다.

몇 명인지 어림잡을 엄두도 안 나는 사람들이 공항 안에 바글바글했다.

“그래도 조금 줄긴 했네요.”

저게 준 거라고?

주재윤의 말에 입을 벌리며 들어갔다. 그가 내 입에 채운 마스크 덕에 사람들이 알아보진 못했다.

네임드 팬으로 추정되는 여학생이 우렁찬 목소리로 팬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일반인들 길 막으면 안 돼요! 우리가 욕먹으면 정아 언니가 욕먹습니다! 다들 협조해주세요!”

덕분에 쉽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마티나 라운지 앞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팬들은 숫자가 많아도 질서를 지키니 괜찮았는데 여긴 그딴 거 없다. 기자들이 라운지 앞에 문전성시다.

“좀 있으면 나와야 할 텐데, 그냥 여기서 기다리죠.”

내가 손목을 확인하며 근처에 앉을 벤치를 찾았다.

좋은 생각이라며 옆에 앉는 주재윤.

내가 가만히 라운지 안쪽을 보고 있자, 주재윤도 그쪽을 빤히 보더니 불쑥 물어왔다.

“미국은 이렇지 않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죠. 차트 중위권에 있는 거로는 정아 노래를 들어 본 사람들조차 드물 텐데.”

그동안 누적된 소니 뮤직의 자잘한 홍보와 유명 뮤지션들의 리트윗으로 상황이 많이 달라지긴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여기부턴 뮤지션 스스로 자신의 인지도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나와 최정아가 이렇게 가는 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이 라운지 밖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밀려 나온다.

“정아 나오나 보네요.”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끌었다.

이윽고, 최정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아래쪽에서 응원의 목소리들이 카메라 셔터보다 더 환하게 터져 나왔다.

“언니 미모 재질 뭐야! 너무 예뻐!”

“정아야! 활동 잘 하고 와!”

“너무 유명해지진 말아요! 안 그래도 겉돌인데 더 유명해지면 단콘 티켓 어떻게 구해요!”

“정아야, 가서 제대로 보여주고 와!”

“우리가 열심히 응원하고 있으니까 절대 기죽지 말고!”

팬들에게 손을 흔들던 최정아가 단번에 날 알아보곤 웃는다.

“가자.”

“네!”

저기선 내가 아는 미래를 가지고 강짜를 부리다 왔지만, 이쪽은 그런 게 전혀 없다.

미래는커녕 미래 부스러기도 알지 못하지.

노래조차 멜로디의 도움 없이 만들었고.

그렇기에 내가 만든 곡과 최정아에 대한 확신만 가지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가 이륙했고.

기대감이 부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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