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96화 (196/221)

196. 부르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 (1)

-방송은 끝난 거 아니야? 아잇, 가만히 좀 있어 봐!

조용한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며, 반가운 목소리에 미소를 머금었다.

반대편에선 핸드폰을 두고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여느 때처럼 승자는 엄마였다. 리모컨을 뺐던 짬이 있잖나.

-엄마야, 엄마.

“압니다. 내가 엄마 목소릴 모를까.”

-난 너 오늘 못 알아보겠던데? 멋지더라, 우리 아들. 내가 화면에 너 잡힐 때마다 사진 찍어놨어. 근데, 아직도 시상식장이야? 엄청 시끄럽네?

“시상식장은 아니고, 애프터 파티야. 시상식 끝나고 뒤풀이 같은 거.”

-그게 뒤풀이도 있어? 그건 TV에서 안 해주나?

귀여운 질문에 설명하고, 아쉬워하길래 달래드리고.

별 얘기 아닌 것에 연신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무튼, 오늘 멋졌어. 우리 아들 진짜 멋졌어. 이런 애한테 음악 한다고 구박이나 하고······.

“엄마 그런 적 없다니까.”

감성적여진 틈에 아버지가 재빨리 핸드폰을 탈환했다.

-계속 똑같은 소리 할 거면 나도 좀 바꿔줘 봐. 어, 들리냐?

“네, 들려요.”

-그래. 그, 뭐냐······오늘 멋졌다.

결국, 도돌이표.

근데 좋네. 계속 들어도 좋다.

그래미 안 갔으면 큰일 날 뻔했지.

또다시 엄마와 아버지가 엎치락뒤치락 전화를 바꾸다가 전화를 끊었다.

기분 좋은 여운을 즐기는 것도 잠시.

기다렸다는 듯 몇몇 사람들이 다가왔다.

“데이터 뮤직 프로듀서 매간이에요.”

“페퍼 레코드 CEO, 레이먼입니다.”

“토니 뮤직 캐스팅 디렉터, 머렐이라고 합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다가오는 사람들이 자선 파티 때 보다 딱 세 배 정도 많아진 것 같다. 명함이 불티나게 팔렸다. 두툼하게 챙겨온 덕에 없어서 못 주는 불상사는 피했지.

이번엔 나도 수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가오는 이들에게만 명함을 주고받지 않고, 발품을 팔았다.

특히, 세계 최정상이라 할 수 있는 연주자들이 고개만 돌리면 눈에 걸리잖나.

그래미 어워드에선 보이지 않았던 이들까지도 이곳에선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래미 어워드 대중을 위한 시상식이라면, 애프터 파티는 뮤지션과 에이전시를 위한 비즈니스장이라는 얘기가 이래서 나왔나 보네.

‘언제 저들의 사운드가 필요할지 모르지.’

나도 세계 최정상 연주자들에게 주저 없이 다가가 명함을 건넸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클럽에서 원래의 자리가 어딨겠냐만.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레드리시,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 앤 더글라스가 여전한 텐션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셨어요?”

“응, 근데 누구야?”

던컨에게 고맙단 인사를 하며 뒤돌아 사라지는 남자를 보며 내가 유지은에게 물었다.

“존 크로우요.”

중후한 목소리로 유명한 뮤지션이다.

그가 던컨에게 와서 무슨 얘길 했을까 싶었지만, 이내 유지은의 대답에 궁금증이 풀렸다.

“사진 찍고 갔어요. SNS를 시작해볼까 하는데, 같이 찍은 걸 첫 게시물로 올리고 싶다고.”

“아아.”

“그런 기념으로 우리도 사진 찍을래요?”

“그게 기념이 돼요?”

“되죠! 되고 말고요.”

씩 웃는 유지은의 뒤쪽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다가섰다.

“아. 아니, 너네 말고. 너넨 너네끼리 찍어!”

사진 소리에 슬그머니 모여든 멤버들을 유지은이 힘껏 밀어냈다. 그러자 한국어는 몰라도 이런 쪽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앤이 장난에 동참했다.

“나도. 나도 같이 찍자고.”

이 양반은 한 마리의 곰이라 유지은이 아무리 밀어도 밀리지도 않는다.

결국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 던컨까지 동참해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그 후엔 성난 유지은과 단둘이 사진도 찍었다.

“그건 그렇고. 클라이브 프로듀서님이 보자고 했다며?”

목이 말라 잔 하나를 들고 왔더니 앤이 물어왔다.

내가 작게 끄덕였다.

그렇게 됐지.

그래미 어워드의 알렉산더 피디는 친히 다가와 무대 소식을 알려주더니.

이번 파티의 주최자께선 아예 날 콕 집어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여긴 뭘 알려주려고 그러시나.

“그게 누군데요?”

사진 찍고 신이 난 유지은이 해맑게 물었다.

이에 앤이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것도 모르고 온 거야? 너한테 초대장 준 사람이지.”

“이 파티의 주최자요? 오, 대단한 사람인가 보네.”

옆에 있던 기성운이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대단하지. 휘트니 휴스턴을 만든 전설적인 프로듀서니까.”

“거기에 지금은 장 대표의 동업자기도 하고.”

앤이 웃으며 날 보았다.

동업자? 뭐···엄밀히 따진 그렇게 될 수도 있나.

나머지 의아한 눈빛들에게 앤이 말했다.

“그 양반, 소니 뮤직의 최고 창작 책임자(Chief Creative Officer)를 맡고 있거든.”

#안전요원을 따라 디제이가 노랠 틀고 있는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무슨 클럽이 이렇게 크고 복잡한지 룸을 찾아가는 길도 미로 같았다.

돌아갈 땐 어떻게 갈지, 그 걱정이 들 정도니 말 다 했지.

케이터링으로 헨젤과 그레텔 흉내라도 냈어야 했나. 어두침침한 게 진짜 마녀의 집 가는 길 같기도 하고.

그래도 안내받은 방 안은 생각보다 밝았다.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클럽, 파티, 그리고 철저하게 격리된 프라이빗한 공간.

이상한 생각이 들기 딱 좋지 않나.

안도하며 한 걸음 더 들어가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네.”

안쪽 소파에 검은 뿔테를 낀 노인이 앉아있었다.

‘저 사람이 소니 뮤직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클라이브 데이비스···.’

아니지. 사실 소니 뮤직에 국한하기도 뭐하다.

그냥 대중음악사를 놓고 봐도 그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중요한 사람일 테니까.

옆을 보니 비스듬히 놓인 지팡이 하나가 보였다. 오면서 이상한 생각을 했던 게 민망해진다.

“맞아, 걷기가 조금 불편해서 자넬 이렇게 불렀네.”

“아, 죄송합니다.”

“지팡이 본 게 뭐가 죄송할 일이라고. 보이는 걸 어쩌겠나. 일단 앉게.”

풀풀 거리며 웃던 클라이브가 자리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머릴 살짝 숙였다.

“장기롭니다.”

그가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끄덕인다.

“아네. 회사에서도 장 대표 얘기가 꽤 자주 나오는 편이라. 더그와도 몇 번 얘길 나눴었지.”

그 얘길 듣자 나도 모르게 벙벙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만약 더그가 내가 아는 더그라면, 그는 소니 뮤직 CEO였으니까.

클라이브 데이비스에, 더그 모리스라니.

말도 안 되는 거물들의 향연에 있지도 않던 취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둘이 일면식도 없는 나에 대해 대체 무슨 얘길 나눴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자네에 대해 얘기하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었지.”

내 표정을 읽었는지 클라이브가 말을 이었다.

“젊은 나이에 자신의 음악을 잘 하는 친구들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가창자에게 필요한 게 뭔지 정확히 짚고 거기에 맞춰 곡을 만드는 건 전혀 다른 문제거든.

근데 자넨 그걸 해내는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였어. 자네의 모든 곡을 들었네. 음악이란 마법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알더군.”

차분하게 이어가는 그의 말에 오묘한 감정이 돋았다.

전설적인 프로듀서의 극찬을 받았다는 생각에 내심 감격하기도 했지만,

그가 말하는 방향이 내가 생각하는 멜로디의 본질과도 같아서.

한 템포 말을 멈춘 그가 코냑을 따라 내게 건넸다.

받아들려는 순간, 그가 덧붙인다.

“그래서인지 더그가 자넬 꽤 욕심내더라고.”

소니 뮤직의 CEO가, 날?

클라이브가 희끗희끗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으쓱거렸다.

“그래서 자넬 불렀네. 내가 한 번 만나보겠다고 했거든.”

#“피디님!”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김지희가 요상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네?”

“무슨 일 있으세요? 몇 번을 불렀어요.”

“아, 미안해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근데, 왜요?”

“그거 정말이에요?”

대뜸 김지희의 눈이 가늘어진다.

“뭐, 뭐가요?”

순간 나쁜 짓 하다가 들킨 사람마냥 간이 쪼그라들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지.

“카운터리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요. 오차드가 정아 씨 앨범에 참여시키려 했는데, 거절하셨다면서요.”

아, 그 얘기구나.

“그랬죠.”

“카운터리면 엄청 대단한 곳 아녜요?”

“맞죠.”

“정아 씨 이번 앨범에 어쨌든, 오케스트라가 필요하고요?”

“그것도 맞고요.”

“근데, 왜 거절하신 거예요?”

“정아가 원치 않았어요. 현중필과 계속 작업하고 싶다네요.”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도 현중필이 더 나은 선택 같았거든.

이미 몇 차례 콘서트까지 열면서 수없이 맞춰온 관계 아닌가.

그제야 김지희가 이해됐다는 듯이 끄덕였다. 최정아답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그 사이, 머릿속의 생각들을 또다시 창고 안에 밀어 넣었다. 지금은 최정아 앨범에 집중할 때라는 걸 상기하며.

몇 가지 일정을 추가로 묻던 김지희가 곡에 관해서도 물어왔다.

“멜로디들은 얼마나 완성됐어요?”

“타이틀 곡 하나 남겨두고 있어요. 그것도 가사만 완성되면 끝이고요.”

오차드와의 길었던 논의도 끝났다.

곡도 멜로디뿐이지만 모두 나왔고.

내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다시 창밖을 보았다.

이제 본격적인 앨범 작업에 돌입할 때였다.

#“뭘 그렇게 보고 있······.”

멍하니 문 앞에 서 있는 최정아에게 다가가던 김 실장이 멈칫했다.

그녀의 얼굴에 복잡함이 묻어나서. 조심스레 다가서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문 너머로 보이는 건 오디셔닝 참가자들.

막 심사가 끝난 뒤라 안쪽은 흡사 폭격을 맞은 듯했다. 악쓰며 방금 지적받은 노랠 다시 부르는 참가자, 한쪽에서 펑펑 우는 참가자, 그걸 달래며 같이 우는 참가자 등등···.

폭격을 감행한 장본인이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피디님 다녀가시고 한동안 괜찮았는데······.’

또 죄책감에 휩싸일까, 김 실장의 얼굴에 걱정이 서렸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최정아가 그들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 틈에 김 실장이 얼른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슬슬 출발하자.”

차에 타 이동하는 동안에도 김 실장은 최정아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회심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피디님 한국 들어오신다던데?”

효과는 빨랐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 크진 않았다. 최정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을 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헤실헤실거려야 정상인데 말이지.

‘이게 안 통하다니······정아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한 거 같은데.’

김 실장이 한껏 심각해진 표정으로 룸미러를 올려다보는데, 최정아가 말했다.

“알고 있었어요.”

“그, 그래? 그지? 어쩐지! 하하!”

김 실장의 얼굴이 안도감에 확 밝아졌다.

그가 얼른 다른 질문들도 연달아 던졌다.

“그 뭐냐, 가사는 다 써서 보내드렸어? 타이틀 곡 하나 남았다며.”

“아직이요. 어떤 가사를 써야 할지 감이 잘 안 왔었거든요.”

“하긴 이번에 가사를 여섯 곡이나 썼는데, 쉽사리 안 떠오를 만도 하지. 아직 시간 많잖아? 조급해할 필요 없이 천천히 생각해 봐.”

김 실장의 위로에 최정아가 끄덕이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그녀의 시야엔 연습실 안 참가자들의 모습이 생생했다.

“근데 지금은 알 것 같아요. 가사에 뭘 담아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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