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95화 (195/221)

195. 그래미 어워드에서 (2)

붉은 조명이 마치 커튼처럼 나부꼈다.

겹겹이 쌓인 커튼 사이를 누비듯, 무대 위로 하나의 실루엣이 더 나타났다.

작고, 아담한 실루엣은 거침없는 걸음으로 나와 먼저 나온 커다란 실루엣과 나란히 섰다.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들끓는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여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낮게 깔렸고.

그 순간, 스포트라이트가 두 실루엣을 때렸다.

자욱한 스모그 너머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앤과 유지은.

어느새 사람들은 환호도 잊은 채,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에 그대로 압도되어 버렸다.

그녀가 가지고 나온 일렉 기타를 고쳐 잡는다.

보는 이들은 기타 줄에 몸이 감긴 듯 경직되었다.

긴장의 끈이 콱 조여진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왈칵왈칵 터져 나올 것 같아서.

텐션(Tension).

관객들의 긴장감을 움켜쥔 손이 천천히 올라간다. 자연스레 기타 줄에 감긴 관객들의 시선도 끌려 올라간다.

이윽고, 그녀의 작은 손이 역동적으로 내리그어졌다.

지잉-!

해소(Relaxation)

긴장의 끈이 끊어지며 전율이 밀려왔다.

#-찢었다. 무슨 시상식이냐, 그냥 거기서 아더 레이블 콘서트나 해라. 나머진 관객이나 하고.

-살면서 그래미 어워드 처음 봤는데, 소름 돋았어요. 레드리시 대박.

-처음 보는 사람 엄청 많을걸요? 실검까지 오르고, 갑자기 월드컵급 인기네요.

-직장인 밴드 하시는 차장님 방금 소리 지르심. 근데 과장실 문 열려있었어요.

-ㅋㅋㅋㅋ차장님 락 스피릿 있으시네. 조금만 혼나시길 빕니다.

-마침 직원이 결재받을 거 있어서 가봤는데 과장님도 보고 계셨네요. 이럴 거면 나도 볼걸······.

-그 회사 일은 누가 합니까?ㅋㅋㅋ

-방금 봤어요? 던컨이랑 기로 프로듀서 화면에 잡힌 거? 그래미에서 이런 그림 언제 또 볼까 싶네요.

-저도 그거 보면서 혼자 뽕 차오름!

-그 와중에 기로 프로듀서 표정 보니 괜히 제가 뭉클하네요. 뭔가 자식 잘 키워놓은 부모 얼굴 같아서.

아더 레이블 사무실.

실시간 댓글 창에 붙어있던 시선들이 후두둑 떨어져 서로 얽혔다. 모두가 입꼬리를 올리고 들뜬 표정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환호성을 지를 것처럼.

“무슨 새로고침 할 때마다 페이지가 바뀌어요. 어머, 이거 봐. 기사도 쏟아지네, 쏟아져.”

“하여튼 이 변덕들 알아줘야 해. 경호 씨 영화 얘기 나왔을 때만 해도 피디님이 무리수를 던졌느니 어쩌니, 하더니 지금은 또 자랑스럽다고 난리고.”

“하루 이틀인가요. 그래도 칭찬 밭이니 기분은 좋네요. 기자들도 딴지 안 걸고.”

마침 방송국 기자와 통화를 마친 주재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상황에 딴지 걸었다간 자기들이 넘어지니까요.”

이에 직원들이 흐뭇하게 끄덕였다. 각자 그동안 만났던 진상 기자들을 떠올렸는지 통쾌함이 톡톡 터지는 표정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킬킬대던 여직원이 패드를 뒤집어 보였다.

“이거 봐.”

화면엔 힙하게 차려입은 젊은 남녀들이 커다란 스크린을 보며 술잔을 부딪치는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스크린에 떠올라 있는 인물은 조금 전, 그래미 어워드의 유지은이었고.

주재윤이 눈을 얇게 만들어 시력을 돋구며 물었다.

“어, 거기 레드리시 성지잖아요?”

패드에 시선을 끌린 다른 직원이 말꼬릴 올렸다.

“성지요?”

“옛날에 레드리시가 자주 공연했다던 라이브 클럽이에요. 그래서 성지라고 불리던데, 근데 그거 지금 올라온 거예요?”

“응, 지금 레드리시 팬클럽에서 여길 통째로 대관했다네. 오전 10시에 하는 술집이 없다고.”

여직원이 시간을 확인하며 끄덕이자, 직원들이 부럽다며 또 한 차례 술렁였다.

“와, 진짜 대단들하네.”

“레드리시 팬들한텐 기념할만한 날이긴 하죠. 나도 저기서 맥주 마시면서 보고 싶네, 쩝.”

맥주 대신 커피잔을 꺾은 주재윤이 여직원에게 말했다.

“그거 올린 사람 SNS 아이디 좀요. 보도 자료로 내보내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오케이, 공유했어. 그나저나, 유란 씨는 언제쯤 시작하려나?”

“최고상들 시상 직전이라고 했으니, 거의 뒤쪽이죠.”

“흐음, 장르 특성이 있으니 레드리시만큼 강렬하긴 어렵겠지?”

“아무래도요. 재즈니까······.”

주재윤이 그래미 어워드가 송출되고 있는 회의용 모니터를 보며 주억거렸다.

“맘 같아선 그 공연도 이렇게 반응이 좋으면 좋겠는데······.”

#레드리시가 도화선에 제대로 불을 붙인 덕분에 그 열기가 다음 공연들까지 뜨겁게 달궜다.

특별한 무대다 보니 다들 작정을 했나 보다. 곡을 완전 새롭게 편곡하거나, 다양한 시도를 한 공연이 이어진다.

무대 위로 수많은 뮤지션들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공연을 하기 위해.

누군가는 시상을 하기 위해.

또 누군가는 수상을 하기 위해서.

다시 진행자의 차례가 되었다.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은 백인 뮤지션, 토머 러시가 이어질 무대를 소개하는 동안, 정현우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봐도, 레드리시님의 오프닝 공연이 최고였던 것 같아요.”

“그래?”

“피디님은 안 그러세요?”

내가 씩 웃었다.

안 그럴 리가.

“맞아, 최고였지.”

화상이라도 입은 듯, 아직까지 레드리시의 열기가 몸에서 빠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코첼라 같은 세계적인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서도 반박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그만큼의 기량을 보여줬고. 퍼포먼스야 말할 것도 없었다. 앤 더글라스와 함께 꾸민 공연임을 감안 하더라도 대단했다. 앤 더글라스의 성량에도 전혀 꿀리지 않았지. 풍기는 분위기는 오히려 더 나았고.

이젠 정말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하며 무대에 집중했다.

공연과 시상이 번갈아 가며 이어진다.

베스트 팝 솔로 퍼포먼스 상, 베스트 컨트리 듀오 상, 베스트 랩 앨범 상, 최우수신인상 등등. 셀 수도 없다.

영광스러운 트로피를 안은 이들이 탄생했고, 시상식도 막바지로 치달았다.

“이제 올해의 노래, 올해의 앨범, 그리고 올해의 레코드 상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제 최고상들만 남았다.

빌보드 1위를 2주씩 하고, 매년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거나 압도적인 강렬함을 선사한 이들이 노미네이트 되었고.

곧 이 자리에서 최고를 가린다.

그렇기에 단연 그래미 어워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은 그렇겠지.'

하지만 나에겐 아니었다.

내가 기대하는 하이라이트는 지금 무대 뒤에서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래미 어워드가 매년 꼭 집어넣는 신구의 콜라보 무대.

올해엔 재즈의 살아있는 전설과 뉴 재즈의 신예가 함께였다.

‘좀 걱정 되는걸.’

애초에 유지은이야 걱정이 없었지. 그녀는 무대 체질이라는 말이 찰떡처럼 어울리는 뮤지션이니까.

하지만 은유란은 좀 달랐다.

무대에 올라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긴 매한가지지만, 낮은 자존감 때문인지 집어먹는 긴장의 크기가 컸다.

가끔 큰 공연 직전엔 어지러움을 호소하기까지 한다니 걱정스러울 수밖에.

그나마 미셸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옆에 있을 테니 안심이야 된다만.

그때 진행자가 중후한 목소리로 상에 대한 얘기를 끝냈다.

“그전에 분위기를 끌어올릴 공연들 먼저 봐야겠죠.”

그 말에, 어느새 편하게 즐기고 있던 마음이 다시 한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란은 어디 갔어요?”

멀대 같은 스태프의 물음에 매니저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이미 무대에 올라가 각자의 악기 앞에 앉은 서울의 와인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화장실 갔어요.”

매니저가 얼른 답하자 스태프가 손목을 확인하더니 미셸의 매니저에게도 시선을 던졌다.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같이요.”

“그럼, 얼른 오시라고 연락해주세요. 곧 무대 돌아갑니다.”

두 매니저가 빠르게 고갤 끄덕이자 스태프도 별말 않고 사라졌다.

서울의 와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이거 일 났네. 누나 엄청 긴장하긴 했더라고. 어제 한숨도 못 잤대.”

“가뜩이나 공연 전에 긴장하는데, 심지어 그래미잖아. 어지러울 만하지.”

“괜찮으려나? 이러다 공연 문제 생기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미셸 선배님이 뒤따라 가셨으니까 괜찮을 거야. 곧. 어, 오신다!”

반짝이는 비늘 드레스를 입고 미셸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은유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란인요?”

은유란의 매니저가 얼른 다가가 물었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기만 했는데도 땀 범벅이 된 그와는 달리 미셸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마냥 평온했다.

“곧 오겠다네요.”

확신에 찬 그 말이 매니저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지금 은유란이 화장실에 혼자 있단 얘기 아닌가.

아무리 무대에 막상 서면 우려를 뒤집어엎는 그녀라지만 이번 무대는 그래미였다. 무대에 오르지도 않는 자신조차 이렇게 떨리는데, 그녀가 느끼는 압박이 이전의 몇 배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

대기실 쪽으로 향하려던 매니저가 멈췄다. 안쪽에서 은유란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바텐더 복장을 점검하면서.

“너 괜찮아?”

매니저의 물음에 은유란이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네, 완전요.”

긴장감 따윈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작은 공연들 때보다 더.

그게 단순히 괜찮아졌다기보단, 어딘가 빗장이 풀린 느낌이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셸이 자신의 동생을 보며 낮게 웃었다.

“오늘 공연 기대되네.”

#“누가 받을까?”

“글쎄. 올핸 압도적인 인상을 남긴 뮤지션이 없네. 노미네이트된 이름들 봐도 딱히 이 사람이다, 싶은 건 없어.”

“그니까. 작년처럼 최고상을 한 명이 휩쓸 것 같지도 않고.”

뒤쪽에서 이런저런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최고상 시상이 가까워지자 모두 상에 대한 내용뿐. 이어질 공연에 대해선 무관심했다.

아, 던컨은 빼고.

“이번이 유란 누나지?”

“그럴걸? 이제 공연도 두 개 남았으니까. 마지막은 단체 공연이라며.”

“뭔가 떨리네.”

“그치? 난 누가 상 받을지보다 이게 더 긴장되는 것 같아.”

그러다 머리까지 숙여가며 작게 쑥덕거리던 목소리들이 뚝 멈췄다.

공연이 곧 시작할 모양인지, 무대 아래 조명들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반면 무대를 비추는 조명들은 더욱 밝아졌고.

무대가 천천히 왼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람들이 공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트로피를 주고받던 깔끔한 무대가 뒤로 사라지고, 새로운 무대가 나타났다.

수명을 다한 네온사인이 꼴딱꼴딱 숨넘어갈 듯 간신히 빛나는 바(bar) 안에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서울의 와인과 미셸. 그리고 은유란.

사람들의 환호가 커진다.

재밌는 컨셉이었다.

재즈 바의 붙박이 연주자들 느낌이 물씬 나는 서울의 와인과.

손님들이 모두가 기다리는 재즈 스타 같은 미셸.

그리고 카운터에서 바텐더 같은 복장을 하고 와인잔을 닦는 은유란.

그렇게 세 사람이 무대 위에서 시동을 걸고 있었다.

서울의 와인이 서로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곧이어 시작되는 익숙한 전주.

기분이 묘하다. 그럴 수밖에. 내가 만든 곡이 그래미 어워드라는 전 세계 최고의 시상식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으니까.

베이스 워킹이 점점 빨라진다. 스윙 리듬의 드럼이 이를 따라가고, 피아노 컴핑까지 절묘하게 빈 공간을 채운다.

촘촘히 채워진 반주가 느긋하게 지켜보던 이들까지 덩달아 조급하게 만든다.

마치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런닝머신처럼 말도 안 되는 템포까지 올라간 그 위로 누군가 올라탔다.

스캣(Scat)

보컬의 솔로.

은유란이 안 그래도 빠른 템포를 32분음표 단위로 쪼개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올드 재즈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녀만의 느낌을 물씬 머금고서.

빗장이 풀린 게 아닌, 스스로 부수고 나온 것처럼.

감탄과 응원이 범벅된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던컨이 들썩거리며 소리 질렀고, 나도 한목소리 보탰다.

한계로 치닫는 육상 선수를 응원하는 기분이 이럴까.

미셸과 은유란. 은유란과 미셸.

마침내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치고, 나뉘고, 또 주거니 받거니 하며 듣도 보도 못한 재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무대가 끝났을 때 내 머릿속엔 딱 두 가지가 남았다.

‘끝내주네.’

그리고.

이제 진짜······.

‘걱정 없겠네.’

거대한 스테이플스 센터 내부가 진동했다.

나에게만 하이라이트였던 무대가,

이제는 모두에게 하이라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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