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93화 (193/221)

193. 스크린 속 무대 (4)

“후우······.”

거리를 걷던 댄이 갑작스러운 한기에 옷깃을 여몄다. 찬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자연스레 몸은 움츠러들었고.

마침 코트 주머니 부분이 간질거렸다. 핸드폰엔 다급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삼촌, 큰일이야!]

미간을 좁힌 댄이 얼른 답장을 보냈다.

[왜?]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안 줘!]

걱정이 무색해지는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동시에 허연 입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래? 올해는 좀 늦나 보네.]

[아니, 나도 이해는 하거든?]

[뭘 이해해?]

[인구가 계속 많아지고 있잖아? 그래서 일주일 정도 배송 지연되는 건 그러려니 했어. 근데 이건 너무한 거 아냐?]

조카의 말투에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린 채로 답장을 보냈다.

[삼촌이 전화 한 번 해볼게.]

[고마워! 역시 삼촌밖에 없어!]

댄이 해맑은 메시지 창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 밝은 쪽에 다가서서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형의 번호를 찾은 그가 전화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한다.

“산타클로스로 활동하기 빡빡한 세상이지.”

전화하는 걸 포기한 그가 고갤 돌렸다. 어쩐지 밝다 했더니 잡화점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온갖 물건들에 반사되어 화려하게 부서지는 조명들.

그 아래 작은 스노우 볼 하나가 눈에 띈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딱 조카에게 선물해줄 만한 사이즈였으니까.

자세를 낮춰 유심히 보았다.

안에는 꽤 디테일한 뉴욕 시내가 들어가 있었고, 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춤을 추고 있었다.

흔들면 금방이라도 춤을 움직일 것처럼.

“뉴욕이 저런 도시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시선을 돌렸다.

무채색 두꺼운 코트와 패딩으로 중무장을 하고, 움츠러든 자세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막상 와 보니, 이게 현실이네.”

댄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다시 잡화점 창 안을 보았다. 정확히는 스노우 볼을.

입맛을 다시며 허리를 폈고, 무언가를 포기한 사람의 낯으로 몸을 돌렸다. 갈 길을 가기 위해서.

하지만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바로 옆을 지나가던 여자가 움츠리고 있던 몸을 활짝 폈다. 마치 날갯짓하는 학처럼. 코트를 벗어 던지고 새하얀 원피스를 펄럭였다.

“무슨······.”

어리둥절한 댄의 눈에 알록달록한 색상들이 펼쳐졌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표정으로 바닥만 보며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 겉옷을 벗어 던졌다.

그 안엔 마치 짠 것처럼 각양각색의 옷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댄이 무심코 자신의 코트 안을 확인했다. 입이 벌어진다. 에메랄드빛, 녹색 정장이 보였다.

“내가 언제부터······.”

그 순간, 거리가 변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건물들이 스피커처럼 노래를 뿜어냈고.

사람들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치 스노우 볼 속 풍경처럼.

#녹색이 저렇게 잘 어울리나.

내가 입으면 바로 베짱이처럼 보일 법한 정장을 입은 박경호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보도블록을 빙판인 양 미끄러지는 무용수들 사이에서.

급기야 무용수들이 차도로 뛰어들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언뜻 보면 각기 다른 춤을 추고 있었지만, 큰 흐름에선 잘 짜여진 군무였다.

건물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창문들이 도미노처럼 주르륵 열린다. 밖이 소란스러워서, 뭔 일이 있나 하고 사람들이 열어보는 게 아니다.

그들도 춤을 춘다. 그리고 반주에 맞춰 노래까지 부른다. 건물은 말 그대로 커다란 스피커가 되었다.

‘영화관에서 봤을 때랑은 또 다르네.’

현장감에 압도되고 있다.

소름이 쫙 돋는다.

스크린 속에 갇혀있던 장면이. 무대가.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박경호가 현실과는 괴리감 있는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레일을 따라 움직이던 카메라가 박경호에게 바짝 붙는다.

박경호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던졌다. 그리고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수많은 사람들의 합창을 뚫고 거리를 가득 메웠다.

촬영 현장이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울림.

옆에 있던 기자가 중얼거렸다.

“이게 오프닝······?”

돌아보니 다른 기자들도, 스타 리포트 제작진들도 비슷한 표정들이었다.

“와, 저 조각 같은 외국 배우들 사이에서도 전혀 안 꿀리네. 오히려 더 빛나는 거 같은데요?”

“그것도 그건데, 경호 씨가 주인공은 아니지 않나?”

“그렇다고 들었어요.”

“근데, 이 스케일 큰 장면을 완전히 주도하는데? 저 정도면 그냥 주인공 아냐?”

“사실상 주인공이 여러 명이고, 그중에 박경호도 포함된다고 보도되긴 했었는데······.”

“난 그냥 언플인 줄 알았지. 비중 많을 것처럼 해놓고 막상 개봉하면 10분도 안 나오는 경우 많잖아.”

“그런 말 많이 올라오긴 했죠······근데, 경호 씨는 확실히 아니겠네요, 그건.”

그 사이, 노래가 끝났다.

춤도 끝나고, 건물 옥상에서 터트렸던 꽃가루도 모두 바닥에 내려앉았다.

여전히 들뜬 표정의 박경호와는 달리 모두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축제가 끝난 거리.

다시 제 갈 길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박경호의 표정도 현실로 돌아왔다.

아주 느릿하게. 종이에 물감이 번지듯이.

“컷!”

*넋을 놓은 기자에게 싱긋 한 번 웃어주고서, 핫팩을 잔뜩 챙겨온 박경호 매니저와 함께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그쪽으로 달려간 박경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좀 전의 장면을 모니터하고 있었다.

박경호가 화면에 들어갈 듯이 집중하는 동안, 나는 제임스 감독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봤을 땐 좋았는데. 아니, 좋은 걸 넘어서 원래의 장면보다 더 나았는데.

이게 진짜 그런 건지, 박경호가 출연 해인지 모르겠어서.

아.

‘노래는 확실히 더 나았지. 그것도 훨씬.’

그런 생각을 하는데, 모니터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제임스 감독의 표정이 확 풀어졌다. 영상이 끝났고,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제가 상상력이 그렇게 좋진 않나 봅니다.”

그의 말에 털북숭이가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이.

제임스 감독이 말했다.

“이렇게 잘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덩달아 긴장했던 박경호와 나도 힘이 쭉 풀렸다. 제임스 감독의 칭찬 세례가 이어졌다. 그럴수록 점점 몸 둘 바를 모르는 박경호를 볼 수 있었다. 제임스 감독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촬영팀, 배우들의 칭찬에 정신을 못 차린다.

“오늘 칭찬이 치사량 넘긴 것 같은데,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인터뷰가 있어서요.”

저기 가서도 칭찬이야 계속 받을 것 같다만······.

박경호를 데리고 촬영장을 벗어나 스타 리포트 제작진과 기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매니저에게 받은 핫팩을 한 아름 안은 박경호가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몹시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서며 꾸벅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이에 피디와 리포터를 비롯한 제작진들이 펄쩍 뛰었다.

“아뇨! 전혀요!”

#스타 리포트 인터뷰는 예상대로 순조로웠다.

나와 박경호의 케미에 집중하되, 따로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던 질문도 사이사이 들어왔다.

예를 들면, 제임스 감독과의 만남이나 다음 작업에 관련된 것들.

그리고 박경호에겐 캐스팅 비화에 대한 질문들이 주를 이뤘다.

인터뷰가 끝난 후, 우리는 또 다른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번엔 텐션 좋은 리포터가 아닌, 눈 그늘진 기자들과 함께.

연예부에서도 영화 쪽으로 특화된 기자들 답게 영화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이따금 영화 음악 얘기가 나올 때를 제외하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박경호의 얘길 같이 들었다.

그렇게 모든 인터뷰가 끝이 났다. 기자들은 영화 기대하겠다며 떠났다.

그래서 나도 기대해보려고.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 쓸 기사를.

“어, 왔나?”

일정을 마치고 월드 TKM 사무실로 들어가자 윤 이사가 냉장고 문을 열며 인사했다.

사무실은 그 말고 아무도 없었다. 휴가 시즌이었다. 월드 TKM 직원들뿐만 아니라, 김지희까지도 한국으로 휴가를 떠났다.

물론, 이강훈 팀장은 예외다. 던컨이 바쁘니 전담팀 전체가 정신이 없다. 지금쯤 던컨 애들과 함께 서부로 넘어갔을 테지.

“인터뷰 잘 했어?”

“네. 우선, 저도 하나 마셔야겠네요. 걸어오느라 목이 말라서.”

윤 이사가 에너지 드링크 하나 더 꺼내 건넸다. 받아들자마자 따서 반쯤 들이켰다.

“기자들이랑은 별문제 없었고?”

그도 현재 국내의 상황을 알기에 걱정 반 호기심 반인 표정으로 물어왔다.

내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영화 기대 하겠다던데요?”

“뭘 기대해. 망하길?”

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윤 이사도 내 걱정 없는 얼굴을 보곤 이내 표정을 풀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퇴근 안 하세요?”

“해야지, 자네가 왔으니.”

“네? 저요?”

“오늘 한 잔 어때?”

그가 씩 웃는 걸 보며 내가 헛웃음을 삼켰다. 직원들이 없으니 타켓을 나로 삼았나 본데.

단호하게 고갤 저었다.

“숙소 가서 작업 할 겁니다.”

“저녁도 안 먹었을 거 아냐. 먹으면서 간단하게 한잔하자고. 오늘 같은 날 안 마시면 언제 마시나?”

“오늘 같은 날이요?”

무슨 소린가 하고 보는데, 윤 이사가 가방을 챙기며 음흉하게 웃었다.

“아깐 자네 인터뷰 중일까 봐 전화를 못 했었는데, 오차드에서 연락이 왔었어.”

“정아 때문에요?”

오차드와는 계속 최정아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래서 당연히 그것 때문인 줄 알았는데, 윤 이사가 의외의 대답을 꺼냈다.

“그래미 어워드 때문에.”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또다시 캔을 입에서 뗐다.

뭔가 스치는 게 있어 물어보았고.

“던컨이 초청받았군요?”

정답이었나 보다.

윤 이사가 흐뭇하게 고갤 끄덕인다.

하긴.

빌보드 1위까지 올라섰던 던컨이잖나.

어쩌면 당연한 거······.

“그리고 자네도.”

“저요?”

“그래, 자네요.”

내 표정이 재밌는지 껄껄거리며 웃던 윤 이사가 덧붙였다.

“한국 프로듀서로선 최초라더군.”

*호텔 방에 들어서자, 침대 위에 널브러진 각종 장비들이 보였다.

누가 보면 도둑이라도 든 줄 알겠네.

침대는 소중한 장비들한테 넘겨주고, 나는 의자에 앉았다.

레드리시와 은유란.

둘 다 각자의 스케줄을 빠듯하게 소화하면서도 틈틈이 그래미 어워드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각자의 파트너인 앤 더글라스와 미셸 루바니와 함께.

어떤 무대가 만들어지고 있을지.

얼마나 대단한 무대가 만들어지고 있을지.

오늘 박경호만의 무대를 보고 와서 그런지, 더더욱 몸이 달았다.

‘직원들과 TV로 보겠지 싶었었는데, 다행이네.’

윤 이사는 어이없다는 듯, 고갤 절레절레 저었었지만.

사실 '한국 최초의 프로듀서' 이런 것보다 레드리시와 은유란의 무대를 현장에서 본다는 게 내겐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건 없지만.

그래서 더 모르는 거니까.

어쩌면 그들의 프로듀서 자격으로 무대를 보는 게,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