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스크린 속 무대 (2)
-어제 굿멜로 봤냐? 박경호에 치였다······.
-콧대마저 연기를 하더라. 특히 바에서 이은주 고백 거절하고 가로수길 걷는데 진짜······콧날에 베임.
-목소린 또 어떻고. 가장 너다운 날씨에서 나레이션 넣은 것도 있고, 그때 OST도 그렇고 이미 목소리 좋은 건 알았는데, 덤덤한 듯 애절한 연기할 때 진짜 대박이더라.
-그 드립 생각나네. 만 원짜리 스피커로 굿바이 멜로디를 시청했더니 뱅앤올룹슨 스피커가 되었습니다···.
-미친 뱅앤올룹슨 ㅋㅋㅋㅋㅋ
-연기면 연기 딕션이면 딕션 노래면 노래 얼굴이면 얼굴······작가 양반, 분량 좀 늘려줘라. 이미 많이 늘린 거 알지만, 그래도 더 늘려줘.
“놀고 있네, 진짜.”
분위기 좋은 게시판과는 상반되게 차 안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남자가 핸드폰을 옆 시트에 던져두고 헤드레스트에 머릴 기댄다.
굿바이 멜로디에서 박경호와 마찬가지로 주연급 조연을 맡은 이우성.
아역 배우 출신으로 20년째 꾸준히 필모를 쌓아온 그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차창 밖을 내다봤다.
“야.”
그가 던진 한마디에 조수석에 앉은 코디가 움찔거렸다. 운전대를 잡은 매니저가 얼른 답했다.
“네?”
“너 솔직히 말해봐. 박경호가 진짜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하냐?”
“아뇨, 전혀요?”
고민도 없이, 버튼을 누른 듯 튀어나오는 대답. 이미 비슷한 질문들을 숱하게 경험한 이의 대처였다.
유치하지만 어쩌겠나. 관심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 그런지, 그런 인간들 투성인 곳인데.
“그치? 참나, 근데 뭣도 모르는 것들이 박경호가 연기를 잘하느니 딕션이 어쩌고. 아주 지들이 전문가야.”
“로코라서 더 유난인가 봐요. 얼굴만 반반하게 생기면 연기력 없이도 몰입도가 뿜뿜 하는 장르잖아요. 괜히 마음 쓰지 마세요.”
“고까워서 그렇지, 고까워서. 연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놈들 때문에. 분명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이겠지.”
그러고서도 분이 안 풀렸는지, 스케일을 넓힌다.
“한국이 이래서 문제야. 미국 같은 덴 그런 마스크가 먹히지도 않을뿐더러 실력 지상주의라 배우가 연기 못하면 바로 아웃이거든.”
“맞죠, 맞죠.”
맞장구뿐만 아니라 장구란 장구는 다 쳐줄 것 같은 매니저의 처세에 이우성이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오늘 박경호랑 만나는 씬 없어서 다행이네. 걔 봤으면 댓글 생각나서 계속 헛웃음 나올 것 같은데. 근데 대체 어딜 갔길래 저 혼자 스케줄을 옮긴 거야? 건방지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차가 멈춰섰다.
이우성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차에서 내리는데, 담배를 태우던 조연출이 차를 알아보곤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어, 이 배우. 왔어?”
곧 피디로 입봉하게 될 조연출에게 이우성도 업무용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둘은 촬영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매니저와 코디가 쫓았다.
“박경호 걔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제멋대로 스케줄을 바꾸고?”
이우성이 은근히 불만을 꺼냈다. 같이 욕해달라고 던진 장작이었지만, 정작 조연출의 반응은 덤덤했다.
“곽 감독님이랑 잘 얘기해서 조율한 거고, 딱히 피해 본 사람 없으니 된 거지, 뭐.”
“그래도요. 건방지잖아요. 이제 두 번째 작품 하는 애가. 무슨 광고라도 찍는데요?”
“아니, 미국 같다던데?”
“미국이요···? 나 참. 화보 찍으러 갔나 보네. 아무리 그래도 촬영 중간에 미국 일정을 잡냐. 걔가 이상한 거야, 소속사가 이상한 거야? 그럴 거면 왜 배울 하지? 모델을 하든가.”
쏟아지는 불만에 조연출이 피식 웃었다.
“넌 저번에 영화 찍는다고 아예 스케줄 통으로 옮겼잖아, 임마.”
“그건 어쩌다 겹쳤던 거고요. 그리고 최대한 피해 안 가게 하려고 얼마나 빡셌는데요.”
“피해가 안 가긴. 그때 단역들 16시간을 기다렸어.”
“에이, 단역들이야 뭐, 그게 일상인데.”
제 딴엔 너스레라고 떠는 애교에 조연출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담배 하나를 더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
“그리고 화보 아니래.”
“네?”
“박경호 미국에 간 거 화보 아니라고. 들어보니 영화 오디션 제의가 들어왔다는 것 같더라. 엄청 큰 규모의 영화는 아닌데 감독도 나름 평이 좋다던데?”
이우성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벙찐 표정으로.
조연출은 자기 때문에 멈춰준 줄 알고 고맙다며 얼른 불을 붙였고.
담배 연기를 뻑뻑 뿜어대며 그가 말을 이었다.
“중국, 일본, 동남아 이런 데서 난리인 줄은 알았지만. 뜬금없이 할리우드에서 러브콜이 올 줄이야. 걔도 난 놈은 난 놈이야?”
#“오, 설마!”
LA의 한 브런치 가게. 짧은 감탄사가 들려오며 웬 백인 남자가 다가온다.
유니폼을 보니 여기 브런치 가게 점원이었는데, 어쩐지 자기가 주문을 할 기세였다.
“기로 프로듀서! 맞죠?”
말 걸기 전에 얼른 주문하려는데, 가까이 오기도 전에 물어볼 줄이야. 하는 수 없이 끄덕이자 왈칵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팬이에요! 프로듀서님 노래 맨날 들어요, 진짜!”
붙임성이 좋은 친구였다. 어깨동무라도 할 기세로 칭찬 세례를 부어대더니 자기도 음악을 한다면서 사운드 클라우드 아이디까지 알려주고 나서야 우리의 주문을 받아줬다. 배가 고파서 감자튀김도 추가했다. 이 가게 전략일지도.
박경호가 날 보며 계속 웃는다.
“진짜 월드 스타시네요.”
“그냥 방송 출연해서 유명해진 거죠.”
“보통 월드 스타는 다 그렇게 되지 않아요?”
“···먹죠. 이 집 감자튀김 잘하네.”
어떤 월드 스타가 이렇게 게걸스럽게 먹겠냐며 순식간에 접시를 비웠다.
곧장 가게를 나서 큰 길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제임스 감독의 사무실까진 그리 멀지 않았거든.
“긴장돼요?”
걷다 보니 박경호 얼굴이 살짝 상기된 것 같아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다.
“아뇨. 긴장보단 들뜰까 봐 조심하고 있어요. 뭘 시키실지 알면 뭐라도 준비하겠는데. 전혀 모르니 비워둬야죠. 바로 채울 수 있도록.”
그 말을 듣고 나도 공감하며 끄덕였다. 연주도 마찬가지지. 들뜨거나 생각이 많으면 오히려 손가락이 꼬여.
그렇게 10 여분을 더 걸어 잿빛 건물로 다가섰다.
3층 구석에 있는 작은 사무실.
우리는 들어서자마자 털이 수북한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어, 오늘 오시기로 하신 분들이구나.”
강낭콩 모양 젤리를 입에 털어 넣으며 배를 긁던 그도 우릴 보곤 알은체를 해왔다.
느긋하게 다가온 그가 이번엔 턱 밑을 긁적이며 우릴 유심히 훑는다.
그러더니 시선이 내게서 멈춰섰다.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이쪽이 배우신가?”
*마침 제임스 감독이 나와 오해를 풀어주었다.
‘분명 옆에 분이 훨씬 잘생겼는데, 눈에 익은 건 프로듀서님이었단 말이죠. 하하하!’
털북숭이 남자가 너스레를 떨었고.
그게 더 상처였다.
그 와중에도 제임스 감독은 박경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네가 그 돈키호테냐. 음원 속 남자냐.
얼른 오디션을 보고 싶어 안달 난 눈빛을 쏘아댔다.
잠시 후, 작은 방에서 시작된 오디션.
털북숭이 남자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도 모두 따라 들어가 사무실 안이 휑해졌다.
직원이 건넨 주스를 홀짝이며 사무실을 훑었다.
[TEAM JAMES FILM]
벽에 큼직하게 붙은 글씨 옆에는 영화 제작하는 곳답게 포스터들이 가득했다. 제임스 감독의 취향이 물씬 묻어나는 구간이었다. 몇몇은 나도 재밌게 본 음악 영화들이다.
‘저 감독이랑, 저 감독도 자선 파티에서 만나고픈 리스트에 있었는데 말이지.’
제임스 감독을 만났으니 딱히 아쉬울 건 없지만.
시선을 좀 더 옮겼다. 창가 자리. 어설프게 짜인 목제 선반 위엔 온갖 CD들이 가득했다. 그중에 영화가 절반, 나머진 전부 음악이었다. 재킷을 보니 대부분 OST 같았고.
‘OST라······.’
사실 제임스 감독이 한차례 OST 제작에 참여해줄 수 있는지 물어오긴 했었지.
고민 끝에 거절했다. 나까지 손 데면 너무 미래가 크게 바뀔까 무서워서도 있지만, 슬슬 최정아의 미국진출에 대한 계획을 구체화 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게 더 컸다.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내심 새로운 장르에 목말랐나 보네.
뭐, 언젠간 이쪽 분야도 도전해볼 수 있는 때가 오겠지.
‘내가 좀 더 자유로워진다면······.’
그런 생각을 하며 CD 더미에서 시선을 떼는데, 방 안쪽에서 웅얼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
잠깐의 적막은 오디션의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박경호의 목소리만이 한 겹 멀리서 은은하게 풍겨오기 시작한다.
깊은 동굴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특유의 목소리가 물이 차오르듯 밑에서부터 점점 올라왔다.
‘역시.’
연기도 잘하지만, 노래는 소름이 돋을 정도지.
게다가 여느 멜로디가 들리는 뮤지션들이 그렇듯,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벽 너머의 내가 이럴 정돈데, 안은 어떨까.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문이 열렸다.
박경호와 함께 나온 제임스 감독의 눈빛이 전과 달라져 있었다.
오디션 전까지만 해도 기대감에 찬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확신에 차 있다. 반드시 캐스팅 해야겠다는 욕심까지 엿보일 정도로.
자선 파티 때 할리우드 배우들을 보며 쏘아대던.
딱, 그 눈빛 같았다.
*“어땠어요?”
장기로와 박경호가 떠난 후, 다시 방 안에 모인 팀 제임스 필름의 직원들.
제임스 감독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오늘 온다는 배우가 진 홍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근데 웬걸. 진 홍보다 몇 배는 낫더라고.”
혀를 내두르는 털북숭이 남자를 보며 제임스가 웃으며 끄덕였다.
제임스 감독이 이번엔 여직원을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여운이 남아있는지 한동안 입을 뻐끔거리다 말을 뗐다.
“솔직히 전 기로 프로듀서가 왔다는 거에 엄청 놀라고 있었거든요. 근데, 배우가 노래 부르기 시작했을 때쯤엔 그걸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맞아, 나도 그랬다니까? 오랜만에 좀 통하네!”
털북숭이의 맞장구를 들으며 제임스 감독이 막내 직원에게 시선을 옮겼다.
시나리오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던 막내 직원이 머릴 들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자신도 뭔가를 말해야 하는 거냐는 듯.
이윽고, 막내 직원이 떠듬떠듬 말했다.
“그냥······시나리오 속에서 댄이 튀어나온 것 같았어요.”
마치 짠 것처럼, 방 안의 모두가 고갤 끄덕였다.
#박경호는 하룻밤 숙소에 머물고 곧장 한국으로 돌아갔다. 조금의 피해도 끼치기 싫다며 입국하자마자 드라마 촬영을 이어갈 수 있도록 스케줄을 짜놨기에.
그리고 며칠 후, 제임스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댄이라는 롤에 캐스팅하고 싶다고.
뉴요커스에 나오는 아시아계 미국인들 중 비중이 가장 큰 롤이지.
흔쾌히 받아들이고, 만나서 구체적인 일정을 논의한 후에 뉴욕으로 향했다.
거기서 오차드와 최정아에 대한 논의을 이어나갔다.
돈 얘기부터 컨셉에 대한 내용까지.
도돌이표가 난무하는 회의가 하루하루 이어졌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해를 넘겨 버렸다.
새해가 밝자, 캐스팅을 끝낸 제임스 감독이 수많은 촬영팀을 고용해 뉴욕에 도착했다.
드라마 촬영을 마친 박경호도 뉴욕 땅을 밟았고.
마침내, ‘뉴요커스’가 크랭크 인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