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90화 (190/221)

190. 스크린 속 무대 (1)

“그랬더니 뭐라던가요?”

최영준 본부장이 다급히 찻잔에서 입을 뗐다.

덤덤하게 아까 있었던 일을 얘기하던 유재완 대표가 으쓱거렸다.

“말을 아끼더군. 본인도 고민하는 눈치였어.”

앞으로 나올 기세였던 최영준 본부장의 등이 다시 소파에 붙었다.

“어쨌든, 나갈 생각도 있다는 거네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지. 이 바닥에선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커리어에 정점을 찍는 순간 새로운 도전이 하고 싶어지는데, 그게 원래 있던 곳에선 쉽지 않거든.”

최영준 본부장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 앞에 있는 유재완 대표가 그랬던 사람이었기에.

“뭐, 장 대표가 대표님하고 좀 닮은 것 같긴 하네요.”

음반 제작자로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내 사람들을 모으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회사를 뛰쳐나와 TKM을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대형 기획사들 사이에 당당히 자리를 잡았지.

그런 후에도 유재완 대표는 항상 다음을 준비했다. 새로운 도전 말이다. 프로젝트 던컨 같은.

그 바통을 이어받은 장기로가 제대로 터트린 거고.

최영준 본부장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그래서, 장 대표가 나가겠다고 하면 순순히 보내시려고요?”

“자기 생각이 있어서 나가는 친구한테 뭐라고 할 수 있겠어?”

한숨 쉬듯 웃음을 내뱉은 유재완 대표가 고개를 내저었다.

“배신자 낙인찍어서 앞길 막고 싶진 않아.”

자신이 이전 회사를 나올 때 그렇게 당했었기에, 그게 얼마나 유치한 짓인지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회사를 크게 띄우고 나가겠다는데 막을 명분이 어딨나.

“그리고 이미 그렇게 하기엔 너무 커버리기도 했지. 빌보드 1위 프로듀서인데 이왕이면 좋게 헤어져서 나중에 곡이라도 받는 게 낫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물론 모든 건 내가 준비한 제안이 안 통했을 때의 얘기지만.”

유재완 대표가 씩 웃자 최영준 본부장이 펄쩍 뛰었다.

“그, 그 그거 전 반댑니다!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저만이 아닐 겁니다. 어차피 주주들부터······.”

“반대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야 당연히······!”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없는 대표인데?”

“······.”

“거기다 지금은 빌보드 1위 프로듀서고.”

“······.”

“회사의 가치가 얼마나 뛸지. 앞으론 얼마나 더 커질지 그걸 모를 양반들이 아니야. 두 손은 물론이고 두 발까지 들면서 환영할걸?”

“대표님!”

“살살 말해. 아무리 늙었어도 귀는 아직 살아있어.”

얼굴이 벌게진 최영준 본부장을 보며 유재완 대표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원래의 표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회사를 만들고 키우면서 남한테 표정을 숨기는 게 당연해졌는데. 아까 장 대표 앞에서 나도 모르게 어린애 같은 얼굴을 했어. 흥분되더라고.”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시선이 자신의 책상에 닿았다.

“TKM이 더 커지는 게 보고 싶어졌어.”

덤덤하게 이어가던 말투가 흐릿해진다.

“그걸 꼭 내가 주도할 필요는 없지.”

#“국내 반응이 장난 아녜요. 벌써부터 다음 행보에 관심을 두는 기자도 있고, 심지어 빌보드 1위는 일주일에 얼마 벌지 계산까지 해서 기사를 쓴 기자도 있다니까요?”

주재윤이 케이크를 옮겨 담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종이컵을 슥 확인하곤 입맛을 다신다. 한 모금씩 먹으니 준비한 샴페인이 모두 동이 났다.

나는 내가 불어 끈 초를 주섬주섬 정리하며 말했다.

“안 쓴다더니.”

“네?”

“어떤 기자가 썼는지 알 것 같아서요. 말해주기 어렵다고 했는데, 기어이 계산을 했나 보네요. 그래서 맞게 계산은 했고요?”

“전혀요. 0을 하나 더 붙였던데요?”

손에 묻은 생크림을 닦으며 웃었다.

“빨리 정정 기사 내야겠네요. 던컨이 재벌인 줄 알겠네.”

“그렇지 않아도 방금 기자들한테 뿌렸죠.”

“역시.”

엄지를 세우며 한 입도 안 댄 샴페인을 건넸다. 그때 케이크 삼매경에 빠져있던 여직원이 물어왔다.

“유 대표님은 뭐라셔요? 그쪽도 분위기 장난 아닐 것 같은데.”

그 말에 열정적인 표정을 짓던 유재완 대표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어서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독립 계획을 묻던 얼굴도.

“좋아하시더라고요.”

“왜 아니겠어요. TKM이 몇 년을 준비했던 게 그냥 성공도 아니고 최고의 성공을 얻은 건데.”

“하다못해 저희한테도 축하 전화 엄청 왔었는데, 유 대표님한텐 막 장관이나 이런 분들이 전화하지 않았겠어요?”

“기획사 대표들도 축하 메시지 많이 보냈다고 기사 났던데요? 솔라톤한테도 왔으려나?”

“왔겠어요? 걔네가? 지금 국내 1위 기획사 타이틀 뺏길까 봐 전전긍긍할 텐데?”

농도 높은 자작한 웃음소리가 레이블에 울렸다.

그렇게 빈 샴페인 병과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3단 케이스와 함께 약식 회의가 이어졌다.

약식이라고 해봤자 예전에 하던 평소의 회의보다 결코 볼륨이 작지 않았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내용이 많은 걸 넘어서서 방대하다. 미국에서 중간중간 통화도 하고, 화상 회의 같은 것도 했는데도 말이다.

‘굿바이 멜로디’ 첫 촬영 당시 밥차가 왔는데, 그게 박경호의 이름으로 왔고 심지어 해외 팬들의 선물이었다는 거.

서기영과 오나연은 아직도 티격태격이라는 것과 이성원은 여전히 밤과 낮이 뒤바뀐 채로 두문불출한다는 거.

비스트로가 힙합 레이블을 만들어 나간 후, 냉장고에 맥주 채워 넣는 사람이 없어 빈자리를 느끼곤 한다는 것까지.

그 밖에도 보고인지, 그냥 하고 싶은 말인지 모를 얘길 1시간이 훌쩍 넘도록 듣고 그제야 내가 해야 할 얘기들을 꺼냈다.

오차드가 최정아의 미국 진출을 도우려 한다는 것과 박경호가 미국 영화를 찍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서 다음 달엔 오디션을 보러 가기 위해 스케줄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까지.

유재완 대표에게 전했던 말들을 좀 더 편하게 늘어놓고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가볍다. 머리는 무겁고. 심장은······두근거리네.

비로소. 드디어. 며칠 만에.

“지금 작업실 들어가시려는 거죠?”

경쾌하게 끄덕였다.

씩 웃자 직원들이 혀를 내두른다.

“빌보드 1위가 괜히 빌보드 1위가 아니야.”

“전교 1등하고 바로 독서실 가는 거잖아.”

“그거보다 더하죠.”

“이따 회식은 오실 거죠? 피디님을 위한 회식인데.”

내가 으쓱거렸다.

“헹가래만 안 한다면요.”

아까 허리가 나갈 뻔했거든.

웃음이 터진 직원들을 뒤로하고 작업실로 향했다. 커피 한 잔 내려서.

문고리를 당기자마자 확 풍겨오는 나무 냄새.

간접조명들을 켜고, 의자에 앉았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느낌이 색다르다. 미국을 왔다 갔다 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작업을 여기서 했었는데 말이지.

‘어색하네.’

늘 했던 대로 한쪽 발로 컴퓨터를 켜고,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책상 위를 훑었다.

어색한데, 여전하다.

손에 감기는 건반의 느낌도.

팝 필터에 낀 먼지도.

정리되지 않은 바탕화면까지도.

방금 타온 커피를 홀짝이며 프로그램을 열었다. 늘 하던 것처럼 트랙도 띄웠다.

‘뭘 해볼까?’

모르겠다.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얼른 들어왔다. 그냥 여수에 내려갈 때부터 음악이 하고 싶어 근질거렸으니까.

막상 앉으니 멍하다.

할 게 없어서?

아니지.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있는 것 같다. 넘칠 듯 차오른 아이디어들이 해소되지 않고 넘실거린다.

한편으론 기대도 된다. 내가 뭘 바구니 안에 집어넣었었는지 가물가물하거든.

손가락을 건반 위로 들이부을 준비를 마쳤다.

이제 작업실에 왔으니······.

‘마음껏 쏟아내도 되겠지.’

#회식이 끝나고 작업실에 다시 틀어박혔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 습작도 하고 가상악기 탐방도 하다가 레이블을 나섰다.

얼어붙은 새벽공기를 맡으며 집으로 향하는데, 박경호에게 연락이 왔다. 시나리오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 언제가 편하시냐고. 그래서 내가 말했다. 지금 올 수 있냐고.

“수고했어요.”

새벽까지 촬영하다가 온 박경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너저분한 집을 그나마 볼만하게 만드느라 진땀을 뺀 나도 수고했고.

감사하다며 집 안으로 들어온 박경호가 유지은이 보낸 온갖 기념품들로 장식된 냉장고를 보며 감탄하는 사이.

오렌지 주스를 따라서 그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식탁에 앉았다.

“피곤할 텐데 미안해요. 너무 궁금해서요.”

“아녜요. 저도 얼른 얘길 하고 싶어서 피디님 휴가 가신 동안 벼르고 벼렀거든요.”

“그래요?”

박경호가 식탁 위로 시나리오를 꺼냈다.

어땠으려나. 내가 아는 박경호라면 분명 마음에 들어 했을 것 같은데?

“우선, 전작이 정말 재밌었어요. 옛날 생각도 많이 나고, 텁텁하고 답답한 게 속이 상할 정도더라고요. 저 같아서.”

영화에서 중요한 게 음악처럼 공감이라면, 제임스 감독은 나나 박경호에겐 명감독이다. 주인공에 이입이 잘 되다 못해, 이거 내 얘긴가 싶을 정도니까.

“그래서 시나리오는 더 기대하면서 봤는데······.”

한참 동안 제임스 감독의 전작, ‘어쿠스틱 웨이’를 칭찬하던 박경호가 본론, ‘뉴요커스’로 돌아왔다.

박경호를 보았다. 과장 좀 보태서 조명이 켜진 줄 알았다. 그만큼 그의 눈빛이 강렬했다.

“재밌었어요.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아직 노래도 없는데, 뮤지컬 영화가 스토리만으로 이렇게 재밌을 수 있나 싶어서 소름이 돋더라고요.”

나도 소름이 돋았다. 댁 눈빛 때문에.

“시나리오는 마음에 든다는 거네요?”

“네, 너무 마음에 듭니다. 하고 싶단 욕심에 잠도 못 잘 만큼.”

“다행이네요.”

아무리 투자를 받았다 해도 독립 영화를 조금 벗어난 저예산 영화. 미래를 모른다면 성공 확률이 매우 희박한 영화로 밖엔 안 보일 것이기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박경호가 싫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으니까. 미래를 봤다고 할 수도 없고.

“그래도 잠은 자요. 건강 챙겨야죠.”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양심에 찔려하는데, 박경호가 끄덕이며 물어왔다.

“그럼 오디션는 언젠가요?”

“우선 경호 씨 스케줄에 최대한 맞춰준다고 했어요. 경호 씨가 오케이를 해줬으니 이제 곽 감독님한테 양해를 구해야죠. 최근에 경호 씨 분량이 많이 늘어서 쉽진 않겠지만.”

“저 때문에 피해가 가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감독님하고 잘 조율해볼게요.”

며칠 후, 곽 감독과 논의 끝에 미국으로 갈 날짜가 정해졌다.

12월 7일. 열흘 후.

박경호의 두 번째 터닝 포인트가 될지도 모르는 오디션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레아 역에 셀레나 키튼 어때?”

허름한 사무실에 모인 사람들.

턱수염이 수북한 남자가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각자의 손에 들린 종이엔 여러 배우들의 사진과 이름이 가득했지만 남자는 다 필요 없다는 듯 셀레나 키튼만 외쳐댔다.

건너편 여자가 볼펜으로 머릴 긁적이며 고갤 저었다.

“셀레나를 어떻게 캐스팅해요.”

“왜 못해? 이번에 받은 투자금이면 충분히 가능하지!”

“영화 셀레나 혼자 찍어요? 그리고 뮤지컬 영화잖아요. 음악도 만들어야 하는데 뭐 다 미디로 찍을 건가?”

“선택과 집중 몰라? 배역, 음악, 프로모션에 밸런스 있게 투자하면 밸런스 있게 망하는 게 영화야. 티켓 파워 한 명은 있어야지.”

“그래도 셀레나 키튼은 좀 심했죠. 배티 위버 정도면 모를까.”

“배티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800만 달러에 찍었다던데요?”

“헙······.”

설왕설래하는 회의 속에서 제임스 감독이 시나리오를 내려다보며 한 마디 던졌다.

“레아 역은 계속 고민해 보도록 하죠. 사실상 이야기의 화자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니까 신중할 필요는 있겠어요.”

털북숭이 남자도, 머릴 묶은 여자도, 둘 사이에서 의견 하나 못 내던 팀의 막내도 끄덕였다.

“그다음은, 댄인데······.”

제임스 감독이 운을 떼자 다시 털북숭이 남자가 입을 열었다.

“댄은 간단하지. 아시아계 미국인이잖아. 그쪽으론 진 홍이라고 중국계 미국 배우가 유명해. 개런티가 그렇게 높지도 않을 거고.”

“그 사람 말이 많던데요. 스캔들 같은 거로.”

이번에도 여자는 그의 의견과 반대였다.

털북숭이 남자가 할리우드에서 스캔들이 대수냐며 투덜대는 동안, 제임스 감독이 종이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댄도 일단 넘어갑시다.”

“아니, 댄은 또 왜?”

털북숭이 남자의 물음에 제임스 감독이 고갤 들었다.

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전에 보고 싶은 배우가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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