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내다보다 (9)
“어, 장 대표님?”
멈칫 고갤 돌렸다.
그러자 긴가민가하던 톤이 확 커졌다.
“맞네! 대표님, 한국 들어오셨다는 기사는 봤는데!”
함께 ‘거리 악사’를 찍었던 개그맨 장영태였다. 한 손에 커피잔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와 특유의 웃음소리로 웃는다. 덕분에 널따란 홀에 분주하던 시선들이 따갑게 박힌다.
그의 옆에서 덩달아 놀란 눈빛이던 남자가 출입 카드를 휘날리며 다가와 양손을 건넨다.
“전 이번에 ‘음악 중심, 쇼케이스!’를 맡게 된 임지원 피디라고 합니다. 빌보드. 정말 축하드립니다!”
“저는 ‘스타들의 라이브’라고 라이브 스트리밍 관련 방송 준비 중인 이필재 피디라고 합니다. 이번에 대표님이 국위선양 제대로 하셨습니다!”
“아, 네······감사합니다.”
영하를 웃도는 날씨에 얼굴이 후끈하다. 이젠 방송국도 마스크를 끼고 다녀야 하나.
장영태와는 연락 나누자는 약속을, 나머지완 명함을 교환하고 나서야 자유의 몸으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그래 봤자 몇 걸음 안 돼서 다른 무리에게 또 잡혔지만.
그나마 피디들은 명함 교환, 직원들은 축하 인사 정도에서 끝났다. 근데 기자 양반들은 그렇지가 않다. 애초에 목적지가 없었던 사람들처럼 발걸음을 돌려 나와 동행까지 한다.
“그, 이번 주 던컨의 음원 수익이 얼만지 귀띔만 좀······하하, 빌보드 1위는 얼마 버는지 사람들이 궁금해해서요. 대략적으로라도 됩니다!”
“빌보드 소감은 어떠세요? 아, 뭐 제가 기사 쓰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요. 정말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궁금해서 말입니다.”
“다음 작업도 계획이 다 있으신가요? 혹시 누군지만 좀······.”
밀려드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들은 얼른 답하고 걸음을 계속 재촉했다.
[오디셔닝 시즌 10]
작은 판넬이 붙은 문 앞에 멈춰 서자 끈질긴 양반들도 계속 응원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공개 홀. 시즌 8 때 특별 심사위원으로 불려왔던 곳.
문을 밀고 들어서자 마침 노래가 끝났는지 잔향이 웅웅거린다. 한쪽에선 대기 중인 참가자들이 보였다. 그들도 날 보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어셋을 낀 스태프가 인상을 찌푸리며 홱 돌아본다.
“참가자분들? 녹화 중이니 소란스럽지 않······엄마야.”
주의를 시키려던 눈빛이 날 보곤 화들짝 놀란다. 본의 아니게 민폐가 될 것 같아 얼른 자리를 피했다. 구석 쪽으로.
저 멀리 바짝 집중한 얼굴로 무대를 훑는 윤 피디와 서 작가가 보인다. ‘미스터리 뮤지션’ 이후로 처음 보네.
‘그리고······.’
무대 구조상, 심사위원석 뒤쪽을 바라보고 있어 내가 찾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다른 건 보인다. 긴 생머리가 의자 위에서 대롱거리고 있었다.
오디셔닝에 섭외가 들어왔다고 얼떨떨해하던 목소리가 오버랩 되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갤 돌렸다. 최정아 매니저, 김 실장이 웃는 얼굴로 슬쩍 다가왔다.
“대표님.”
“오랜만이에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못 뵌 새에 정말 전 세계적인 유명인이 되셨네요.”
“하하하···.”
뚝뚝 끊어지는 웃음을 재밌다는 듯 보던 김 실장이 물어왔다.
“방송국에 볼일 있으셔서 들르신 거예요?”
“아뇨. 정아 보러 왔어요.”
“정아가 엄청 좋아하겠는데요? 오늘은 기분 좋게 집에 가겠어요.”
오늘은?
미묘한 뉘앙스를 느끼고 쳐다보자 김 실장이 무대 쪽을 슥 보며 덧붙였다.
“오디셔닝 촬영만 마치면 살짝 우울모드 거든요.”
“우울모드요?”
김 실장이 끄덕였다.
“네, 좀······그러네요.”
*무대 측면으로 돌아가 촬영을 구경했다.
이번 시즌엔 줄곧 심사위원이었던 박동호가 앨범 준비로 빠지고, 최정아가 들어갔다.
나머지 라인업은 시즌 8과 같았다.
곽승태 피디와 송지현.
한 참가자에 대한 심사평이 이어진다.
곽승태 피디는 시작부터 빨간 불을 켜놓고 신랄한 혹평을 던졌다. 여전하구만.
송지현은 애매하단 표현을 써가면서 고민 끝에 빨간 불을 켰다.
마지막 배턴을 이어받은 최정아가 마이크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마음 약한 최정아는 칭찬을 건네겠거니 했는데, 정작 그녀 입에서 튀어나온 건 마찬가지로 혹평이었다.
“너무 정직해요. 고음만 되면 목소리가 커지고, 몸에는 힘이 들어간 게 확연히 보여요. 그러니 보는 사람도 같이 경직되게 만들죠.”
내심 놀랐다. 내가 아는 그 최정아가 맞나 싶다. 날카로운 눈으로 참가자의 노랠 듣곤 솔직하게 집어낸다.
“프로냐 아니냐가 여기서 결정 난다고 해요. 혜연 씨는 프로가 되고 싶어서 여기 온 거잖아요? 고음을 낼 때 작게 부르는 연습을 정말 부단히 해야 할 것 같아요.”
“네······.”
이미 이전 심사위원들의 반응에서 반포기 상태였던 참가자가 고개를 툭 떨궜다. 결과를 직감했겠지.
한편으론 아쉽다. 저 친구, 서기영을 처음 봤을 때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매력적인 음색을 갖고 있었는데 말이지. 잘만 다듬으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좋을 수 있을······.
“다음번엔 꼭 고쳐 와줘요. 제 슈퍼패스가 아깝지 않게.”
“네······네?”
#“누가 아더 레이블 아니랄까 봐. 슈퍼패스를 누가 그렇게 동정표처럼 쓰나?”
심사가 끝나고, 곽승태 피디가 궁시렁거렸다. 옆에서 송지현이 눈을 흘겼다.
“동정표라기엔 기영이가 우승까지 했었는걸요.”
“크흠, 그거야······.”
볼륨이 확 줄어든 곽승태 피디의 목소릴 흘려들으며 최정아가 자리를 정리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심사위원석을 내려가던 중 그녀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콱 박혔다.
뒤따라 내려오며 티격태격하던 곽승태 피디와 송지현도 무대 아래 있는 남자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어머, 장······.”
“피디님!”
최정아의 목소리가 놀란 송지현의 목소릴 뚫고 나왔다. 좀 전의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강아지처럼 얼굴이 살랑댔다.
“언제, 언제 오셨어요?”
“얼마 안 됐어. 마지막 그룹 시작할 때쯤?”
민망한 듯, 수더분하게 머릴 긁적인다.
“그, 어땠어요? 저 심사하는 거.”
“놀랐어. 특히 슈퍼패스 썼을 때.”
“아, 그건······음색이 너무 매력 있어서······.”
혹시 자신이 잘 못 봤을까.
잘못 선택했을까.
최정아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에 장기로가 푸스스 웃으며 고갤 끄덕인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 이전 그룹들은 못 봐서 모르겠다만, 방금 그룹에서 슈퍼패스를 써야 했다면 나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정말요?”
안도감에 차오른 눈빛이 반짝였다. 금세 헤실헤실하는 최정아를 뒤로하고, 장기로가 곽승태 피디와 송지현에게 고갤 숙였다.
장기로를 본 순간부터 줄곧 떠름한 표정의 곽승태 피디.
옆에서 손을 흔들던 송지현이 은근하게 말했다.
“우리가 잘못 봤나 봐요. 빌보드 1위 프로듀서님이 그러시다는 데요?”
곽승태 피디의 표정이 꼬깃꼬깃 구겨졌다.
#“너무 힘들었어요.”
방송국이 무너져라, 최정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잘 하더만. 똑 부러지게.”
“일부러 더 차갑게 얘기했어요. 안 그럼 제가 울 것 같더라니까요. 열심히 준비해왔을 텐데······상처받았겠죠?”
딱히 할 말을 못 찾고 있는데, 그녀가 자문자답했다.
“받았을 거예요. 그것도 엄청. 막 집 가면서 울었을걸요? 저였어도 그랬을 거예요.”
“그 정도로 모질진 않았어. 신경 써서 꼼꼼히 피드백해주는 게 보였거든.”
“그래도요. 따뜻하게 말해주는 게 더 나았을까 싶어요.”
목소리가 더 축축하게 젖는다.
“무대를 내려다보는데 옛날 생각이 많이 났어요.”
“언제? 분수대에서 버스킹 할 때?”
시선은 커피잔에 둔 채로 천천히 끄덕이는 작은 머리.
“네, 그때도 그렇고, TKM 오디션 때도 그렇고······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참가자들한테 피디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쉽지 않았어요.”
나? 내가 어땠더라?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오디션 참가자들을 보며, 내가 무명 프로듀서로서 힘들었던 기억을 되새김질했고.
뭐라도 도와주고 싶어 전전긍긍했지.
그게 설령 합격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 마음을 일면 알 것 같아 최정아를 지긋이 보며 끄덕였다.
그녀의 눈이 슬쩍 날 보곤 다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속에 숨는다.
“다행이에요.”
“뭐가?”
“피디님 오셔서요. 기분이 좋아지려 해요.”
커피 속에 빠진 설탕처럼 푸르르 녹아내리는 얼굴을 보며 내가 웃었다.
“근데 나만 온 게 아닌가 본데?”
“네?”
최정아가 고갤 들어 올렸다.
그녀의 시선이 내가 향한 쪽으로 돌아갔다.
“진짜 기로 프로듀서님이다···.”
“아, 안녕하세요.”
쭈뼛쭈뼛 곁으로 다가온 사람들. 마지막 그룹의 참가자들이었다.
그들이 내게 인사를 하곤 얼떨떨해하는 최정아 쪽으로 고갤 돌린다.
“피드백 정말 감사했습니다! 최정아 심사위원님···아니, 가수님···아니.”
“그냥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저, 정말요? 넵, 언니! 꺄학!”
언니가 생긴 참가자들이 팬심에 휘청이며 감사 인사를 다섯 번쯤 하는 동안,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참가자들이 최정아의 얼굴에 남아있던 짐들까지 모두 걷어내고 떠났다.
그렇게 다시 테이블엔 둘만 남았다.
동그란 눈동자가 다시 날 향한다.
어느새 뿌듯함까지 내비친다.
“근데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방송국에 일 있으셨어요?”
“아니, 너 보러 왔는데?”
뿌듯함이 사라진다.
아니, 덮였다. 만개한 미소에.
“뭐지, 나 생일인가?”
#최정아와 얘기를 마치고,
곧바로 청담동 TKM 사옥으로 향했다.
여기도 방송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주치는 얼굴들이 적지 않았다. 마주칠 때마다 말을 걸어오는 건 더 적지 않고.
웃느라 입꼬리가 뻐근하다고 느낄 무렵, 마침내 층마다 멈춰 서던 엘리베이터도 꼭대기 층에 멈춰섰다.
“오차드가 정아와의 작업을 준비해보자는 입장을 내왔습니다. 여기로 오기 전에 정아랑도 대략적인 얘길 마쳤고요.”
내 말에 유재완 대표가 주억거렸다. 입꼬리는 살짝 웃고 있는데, 눈빛은 미묘하다. 속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박경호에게도 시나리오 하날 전달했습니다. 제임스 텔러라는 감독의 시나리오입니다.”
영문 이름이 튀어나오자 유재완 대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이내 웃음을 터트린다.
“이제 영화도 물어오는 건가?”
“대단한 감독은 아닙니다. 저예산 영화고요.”
하지만 대단해질 감독이지. 고소득 영화가 될 테고.
“그 시나리오 나도 한 번 보지.”
“보내드리겠습니다.”
느긋하게 주억거리는 유재완 대표. 그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다가 다시 입을 뗐다.
“솔직히 빌보드 1위라는 말도 안 되는 성과를 들고 와놓고, 다른 일 보따리를 풀어놓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대표님을 뵈러 왔는데, 자랑만 할 순 없으니까요.”
“자랑만 해도 돼. 온종일 해도 들어줄 수 있어. 어떻게, 스케줄 다 취소할까?”
내가 손을 휘저으며 말리자, 유재완 대표가 기분 좋게 웃으며 덧붙였다.
“빌보드 정상이잖나. 처음 TKM을 만들 때 꿈꿨던.”
목소린 여전히 느긋했다. 하지만 그걸 뚫고 나오려는 열정과 벅참이 느껴진다. 50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말이다.
‘나도 저럴 수 있을까?’
입꼬릴 올리며 찻잔을 드는데, 유재완 대표가 물어왔다.
“그래서, 그다음은?”
그다음?
찻잔을 허공에 멈춘 채로 유재완 대표를 보았다.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딜 보고 있는 거지?
시선을 따라가려는데, 그가 내게 툭 던지듯 물었다.
“독립할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