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87화 (187/221)

187. 내다보다 (7)

카메라가 천천히 왼쪽으로 돌아간다.

곽 감독 뒤에 서서 모니터를 번갈아 보았다. 화면이 노을에 붉게 물든 가로수길을 물 흐르듯 훑고 지나갔다.

‘아, 저런 식으로······.’

Pan이란 촬영 기법이라길래 좌우로 뭔가 할 거란 생각은 했었다. 얼추 비슷하게 고정된 카메라를 천천히 돌려가면서 찍네.

‘믹싱에서의 Pan과 뉘앙스는 비슷하지만, 쓰임새는 전혀 다르구나.’

믹싱. 즉, 음악을 정교하게 만질 때 Pan은 소리를 좌우로 넓게 퍼트려 공간감을 주고 밸런스를 잡아주는 역할을 하니까.

다른 업계의 용어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에 헛웃음을 지으며 구경을 이어갔다.

노을에 물든 박경호의 실루엣을 보며 배우는 배우구나 중얼거리기도 하고.

그가 맡은 배역에 대체 저런 매니저가 어딨냐며 피식거리기도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건넨 시나리오 때문에 커피를 입으로 마시는지 코로 마시는지 모르는 듯하던 박경호.

그가 큐 사인이 떨어지자 다른 사람처럼 돌변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는 배우라는 직업과 연기라는 분야가 새삼 대단해 보인다.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는 거잖나.

거기다 노래까지 잘하는 박경호는 더더욱 대단해 보이고.

‘아차.’

한참을 그렇게 넋을 놓고 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피디님! 어디세요?

최정아의 목소리가 벌컥 넘어왔다.

“어, 정아야. 오늘 한국 도착했어.”

-진짜요? 젠······.

“젠?”

되묻자 그녀가 다급하게 정정한다.

-아니요! 전이요, 전······. 전 지금 잡지 촬영하러 왔다고요.

“들었어. 제주도라며?”

-네. 제주도에요. 겨울 제주도. 여기 그냥 허예요······.

“난 그런 제주도라도 가고 싶다. 휴양지, 쉼, 이런 거랑 너무 멀어진 것 같아.”

내가 희망 사항을 말하자, 오히려 최정아가 희망을 얻은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말려 들어가던 목소리가 또다시 파도처럼 밀려온다.

“여기, 여기 다 있는데요? 휴양지, 쉼, 낭만 이런 거!”

말하지도 않은 낭만은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하늘도 맑고, 숙소도 좋고! 사실 여기 풍경 엄청 예뻐요. 눈도 소복하게 쌓여서 밟으면 뽀득뽀득······.”

내가 배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난 오늘 여수 내려가.”

-아······?

밀물이 썰물이 되는 현장이다. 최정아의 목소리가 금세 자박자박해졌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길래 급히 말머릴 돌렸다. 최정아가 반길만한 주제로.

“가면 부모님이 네 칭찬을 또 얼마나 할지 모르겠네.”

-제 칭찬이요?

“콘서트 갔던 게 정말 좋으셨나 봐. 미국은 꼭두새벽인데 전화하셔서 어찌나 자랑을 늘어놓으시던지. 다음날 맛있는 것도 사드렸다며?”

약효가 빠르다. 금세 활기를 찾은 목소리가 넘실댔다.

-그날 진짜 재밌었어요!

덕분에 엄마한테 들었던 자랑을 최정아의 입으로 다시 한번 들어야 했다.

“진짜 고맙다. 내가 할 일을 네가 다 하네.”

-에이, 아녜요!

그 뒤로 들릴 듯 말 듯, 자기 일이 어쩌고 하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다.

내가 되묻자 포식자를 만난 송사리 떼처럼 중얼거림이 확 흩어졌다.

그 사이, 박경호의 씬이 끝났나 보다. 온갖 조명들과 카메라들이 분주하다.

“경호 씨 촬영 끝났나 보다.”

-저도 밥 먹어야죠. 이제···.

눌어붙은 최정아의 목소릴 들으며 내가 말했다.

“여수에서 올라오면 보자.”

냉큼. 기꺼운 대답이 넘어왔다.

*곽 감독에게 고생했다고 인사를 나누고서, 박경호와 2차전에 돌입했다.

멋지고, 젠틀하며, 노래까지 잘하는 매니저. 세상에 없을 것 같은 그런 매니저가 현실 박경호로 돌아왔다.

진중함은 온데간데없고 해외여행 처음 온 사람처럼 궁금한 것들을 계속 쏟아낸다.

대체 머릿속에 생각이 이렇게 많아서 연기는 어떻게 했나 싶을 정도다.

“이 감독님, 전작이 있다고 하셨었죠?”

“네, 어쿠스틱 웨이라고 전 정말 재밌게 봤어요.”

대충 어떤 내용인지 말하자 박경호가 눈을 빛낸다.

그가 손에 든 시나리오를 쓰다듬기라도 할 것처럼 애지중지하며 말했다.

“집에 가자마자 봐야겠네요. 영화도, 시나리오도.”

“그래요. 어찌 됐든, 경호 씨가 마음에 들어야 하니까요.”

제아무리 성공할 영화라 해도,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다. 그런 식이라면 성공할 미래였다고 해도 꼬꾸라질 테니까.

애초에 박경호가 출연하는 순간부터 미래는 바뀌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게 꼬꾸라지는 것보단 더 큰 성공이길 바라지만.

“영어 공부도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이미 잘 하고 있잖아요. 대신 영어 말고 다른 외국어들은 잠시 비중을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작인 ‘가장 너다운 날씨에’가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는 물론이고 서양에서까지 괜찮은 반응을 보이며 틈틈이 3, 4개국어를 공부 중인 박경호였다.

배우가 언어와 밀접한 직업이라 습득이 빠르단 얘긴 들었었는데, 박경호는 그중에서도 특출난 편인 것 같지.

‘못 하는 게 뭐야?’

눈앞에 앉은 비현실적인 배우이자 뮤지션을 보았다.

이런 사람이 보컬 트레이너로, 단역으로 있었단 말이지.

적어도 내가 겪은 10년 후까진 무명인 채로.

씁쓰름한 웃음 뒤에 불쑥 이런 생각이 이어졌다.

이런 사람이 참 많을 것 같다는.

*박경호와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나는 용산역으로 향했다.

여수행 티켓을 끊고서 시간 맞춰 기차에 올라탔다. 3시간. KTX를 타도 그 정도가 걸린다.

멀긴 멀지.

그래도 할 건 많아 다행이었다.

비행기에서 몰아 보던 ‘굿바이 멜로디’도 아직 한 화 남아있었고.

그동안 바빠서 듣지 못했던 노래들, 공연 실황들이 핸드폰에 잔뜩 쌓여 있었다.

메일은 또 어떤가. 받은 음원들로만 오디션 프로그램 하나를 찍어도 될 것 같다.

‘우선, 드라마부터 마저 보고······.’

촬영 현장까지 보고 나니 이전 상황들이 어땠는지 궁금해서 못 참겠다. 눈이 빠져라 봤다. 연기 잘하는 베테랑 연기자들이 즐비한 드라마 속에서 유난히 박경호의 연기가 빛이 난다. 내가 고슴도치 엄마이려나.

엔딩에선 ‘여기서 끊는다고?’라고 경악하면서 감질나 했다. 이래서 내가 드라마를 안 봤다니까.

‘그새 조용해졌네······.’

옆에서 곁눈질로 드라마를 훔쳐보던 아주머니도, 앞에서 뭔가를 계속 먹던 남자도, 알콩달콩하던 커플까지도 깊은 잠에 빠지고.

기차 안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아둔 곡들을 차례대로 듣기 시작했다.

서기영이 타 소속사 싱어송라이터와 함께 만든 곡.

오나연이 타 소속사 걸그룹에게 준 곡.

그뿐만이 아니다.

그 중엔 이현의 신곡도 있었고, 플로라의 3집 앨범도 있었다.

‘맙소사, 벌써 3집 앨범이라니!’

내가 탄 KTX 뺨치는 세월(?)을 느끼며 천천히 노래에 빠져들었다.

이미 발매 당시에 들었던 곡들.

이번엔 좀 더 꼼꼼하게 들었다. 당사자들이 하도 민낯에 가까운 평가를 원했기에.

‘형, 축하는 이미 너무 많이 받았어요. 그거 말고 제 목소린 어때요? 많이 는 것 같나요? 이번 곡, 저한테 어울렸어요?’

‘이번 곡 어떠셨어요? 저희한테 잘 어울렸나요? 애들아, 피디님 귀 아프시대. 한 명씩 물어보자. 한 명씩. 먼저 유하부터!’

이러고 있으니, 이 기회에 제대로 확인해줄 생각이다.

롭 테일러 같은, 맛 간 색안경 말고 돋보기로 낱낱이.

그랬는데.

‘흠잡을 게 없네.’

몇 가지 걸리는 것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지적을 위한 지적 같달까.

대부분의 부족한 부분은 이미 본인들도 알고 있다. 그리고 부단히 나아지려 노력 중이고.

내가 굳이 다시 짚을 필요 없을 것 같지.

‘또 솔직하지 못하단 소리 듣겠는걸.’

뻔한 미래가 그려졌다. 미소도 함께 그려진다.

다들 잘 하고 있다.

멜로디는 분기점에 서 있는 뮤지션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안내했고.

튼튼한 선로 위에 안착한 그들은 속도와는 상관없이 모두 각자의 재능을 꽃피우고 있다.

예전이었다면, 이 뮤지션이 언제 다른 멜로디가 들려올지, 들리지 않는다면 뭐가 문제인지 고민했지만.

지금은 각자의 때가 있는 거란 생각이 든다.

레벨이 오르는데 필요한 경험치가 모두 다를 수 있잖나.

‘그리고 또 안 바뀌면 어때.’

이미 이렇게 잘 하고 있는데.

불규칙적이고, 불친절한 멜로디 따위······.

크흠.

들리면 또 좋다고 작업하겠지만······.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움직였다.

밖은 컴컴하다. 안은 어둑하고.

간혹 들려오던 코 고는 소리조차 끊긴 기차 안에서 계속 노래를 들었다.

남의 노래를 들으며 감탄하고, 또 아쉬워하기도 하다 보니 입안이 바싹 마르고 목이 칼칼하다.

이유가 분명한 갈증에 푸스스 웃었다.

‘음악이 하고 싶다.’

그새. 또.

#“아직도 계셨어요?”

최영준 본부장이 놀란 눈으로 대표실에 들어왔다.

유재완 대표가 만년필 뚜껑을 열어, 보고 있던 서류에 사인을 마쳤다. 그리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가 바쁜 걸 보니, 회사가 더 잘되려나 봐.”

소파에 앉는 유재완 대표에게 최영준 본부장이 주억거렸다.

“이미 잘되고 있죠. 3분기는 작년 대비 76%고 4분기는 120%를 예상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거 굉장히 짜게 잡은 거잖아요. 만약에 던컨이 빌보드에서 제대로 터져주면······.”

들썩이는 최영준 본부장을 보며 유재완 대표가 입매를 올렸다.

“당장의 영업이익이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겠지. 성장률이 앞으로 몇 배가 뛸 테니까.”

최영준 본부장이 끄덕거리며 팔걸이를 툭툭 쳤다.

“내일 저녁이면 결과가 나오겠네요.”

“윤 이사가 바로 전화 준다고 했어. 엄청 들 떠 있더군.”

“그럴 만합니다. 솔직히 프로젝트 던컨 초창기 때만 해도 불안 불안했었는데, 지금은 빌보드 1위를 하냐 마냐를 논하고 있다는 게 새삼스럽기도 하고요.”

유재완 대표가 말을 받았다.

“흥분되는 일이지. 오랜 숙원이기도 하고.”

드물게 설렘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영준 본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장 대표가 정말 난 녀석이긴 합니다. 계약서에 간섭하지 말라는 항목을 넣길래 사춘기라도 걸린 줄 알았더니, 이런 사춘기라면 환영할만한 것 같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공모전 당선돼서 왔을 때 7년짜리 계약서를 뽑았어야 했나 싶습니다.”

최영준 본부장이 법적 최고 계약 기간을 언급하며 아쉬워했다.

올해 재계약을 했지만, 장기로가 원하는 대로 2년짜리 계약이라 이제 1년밖에 남지 않았다.

“장 대표가 남을까요?”

최영준 본부장의 물음에 유재완 대표가 느릿하게 고갤 저었다.

“이대로라면 아니겠지. 음악적인 욕심이 많은 친구니까.”

“하지만, 자기 뮤지션들이 전부 저희 소속이잖아요?”

“그래서 저렇게 발로 뛰고 있잖나. 안정적인 성공 가도에 올려놓으려고.”

최영준 본부장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러고서 나갈 거란 말씀이군요.”

사실 업계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예상하는 방향이었다. 게다가 본인이 2년만 계약을 하겠다고 했으니 그가 독립하리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디까지나 본인 생각은 들어봐야 알겠지만.”

“그럼, 회사에 남게 할만한 조건을 미리 생각해 둬야 하지 않을까요?”

유재완 대표는 묵묵부답이었다. 고민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걸 본 최영준 본부장이 확신하듯 말꼬릴 올렸다.

“이미 생각해둔 조건이 있으시군요?”

유재완 대표가 슬쩍 시선을 돌려 어딘가를 응시했다. 이를 본 최영준 본부장의 눈이 점점 커졌다.

“우선, 빌보드 발표부터 확인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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