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86화 (186/221)

186. 내다보다 (6)

“자, 이제 마지막 질문일 것 같네요.”

푸른 눈의 기자가 마지막 장을 펄럭이며 내게 말했다.

“대화가 재밌어서 제 개인적인 질문까지 하다 보니 인터뷰가 너무 늦어졌네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진심이었다. 미국에 와서 적지 않은 인터뷰를 했었지만 지금 눈앞의 여기자만큼 꼼꼼히, 그리고 깊게 질문을 해온 이는 드물었다. 굳이 꼽자면 뮤즈하임의 오브리 기자 정도?

그렇기에 마지막 질문이 뭘지 내심 궁금해졌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그녀가 입을 뗐다.

“다음 계획이 어떻게 되세요?”

살짝 힘이 빠진다. 너무 뻔한 물음이라. 하지만 인터뷰어가 인터뷰이에게 할 마지막 질문으로 이만한 것도 없겠지.

“좀······.”

시선을 잠시 창밖으로 돌렸다.

뉴욕답게 한눈에 봐도 관광객처럼 보이는 이들이 더러 눈에 띈다.

“쉬려고요.”

그렇다고 여행을 다니겠다는 건 아니다.

정말 쉬고 싶다. 집에서, 푹. 엄마가 해주는 밥 먹으며.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한동안 쉴 새 없이 일했었으니까.

“하긴, 모두 싱글이긴 했지만, 세 곡을 연달아 내셨고, 거기에 홍보며 세세한 부분까지 CEO로서 조율하셨으니 재충전이 필요할 만하죠.”

기자가 웃으며 마지막 장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은근하게 물었다.

“혹시,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애초에 열 가지만 더 물어보겠다고 하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미 그런 식으로 수십 번을 더 물어봐 놓고서.

크게 웃은 기자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다음 계획 말고 앞으로의 계획······아니다. 앞으로의 꿈이 뭘까요?”

······꿈?

질문은 추상적으로 변했는데, 머릿속엔 어떤 질문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인터뷰가 끝나고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언제 돌아오세요?”

지난주부터 내 스케줄을 줄곧 함께 다녀준 월드 TKM 직원. 그가 한껏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핸들을 풀었다.

“글쎄요.”

“이참에 저 한국 들어가서 매니저 일이나 해볼까요?”

“누구 매니저요?”

“대표님이요.”

“저요?”

황당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연예인도 아닌데 무슨 매니저요.”

“그럼 비서쯤으로. 어떠세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입 하나는 엄청 무겁습니다.”

“그건 제대로 보여주셨죠.”

윤 이사와 함께 직원들을 속인 홍보담당자가 그였으니까.

그 일로 아직도 동료들이 뻑하면 이것도 뭔가 있는 거 아냐? 하면서 의심을 한다며 앓는 소리를 한다. 한참을 같이 키득거리다 블루투스로 노랠 틀었다.

직원이 단번에 알아듣는다.

“어, 이 노래······돈키호테네요?”

노래 제목보다. 뮤지컬 제목보다 주인공의 이름이 더 유명한 노래.

“이건 또 누구 버전이에요? 음색이 진짜 잘 어울리는데.”

그러니까. 누가 골랐는진 몰라도 찰떡같이 골랐다.

어젯밤에 따끈따끈한 음원을 받아들고 밤새 틀어댔지.

내가 부른 것도 아닌데, 괜스레 자랑하고픈 마음이 꿈틀댄다.

“경호 씨요.”

“경호 씨? 아, 지금 ‘굿바이, 멜로디’에 출연하고 있는 경호 씨요!?”

끄덕이자 직원이 손뼉을 쳤다.

“맞네! 알고 들으니 들리네요. 발음도 엄청 좋으시네. 그룹 그만두고 유학도 다녀오셨다더니.”

“핸들, 핸들 잡아야죠.”

“아앗, 노래가 너무 좋아서 정신줄 놓을 뻔했네요. 하하.”

목숨줄도 같이 놓을 뻔했지.

그러거나 말거나, 직원은 박경호의 노랠 들으며 말을 쉬지 않았다.

“경호 씨, ‘굿바이 멜로디’도 방영 첫날부터 지금까지 동 시간대 1위하고 있더라고요!”

곽 감독이 또 해냈다. ‘가장 너다운 날씨에’에 이어서 말이다.

흐뭇하게 끄덕거리자 직원이 들뜬 목소릴 냈다.

“아더 레이블 뮤지션들은 모두 성공 가도만 달리고 있네요.”

“······.”

그러게.

내가 바랬던 대로.

내 곡을 불러준 뮤지션들이 모두 큰 성공을 거뒀거나, 목전에 두고 있다. 같은 음악이란 카테고리 안에서 각자의 영역을 만들어 더욱 깊게 자리매김하고 있지.

그래서인지 이젠 좀 마음이 놓인다. 책임감도 한결 가벼워졌고, 조급함도 옅어졌다.

그러니 한국에서 좀 쉬기로 결정할 수 있었지. 가족들과 푹 쉬고 싶다. 그리고서······.

‘아직 남아있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다시 달려야겠지.’

그리고, 그것마저 끝나면······.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떠오르고, 거기에 기자의 마지막 질문이 겹쳐진다.

때마침 겹쳐지는 또 하나의 소리.

절정으로 치달은 박경호의 ‘The impossible dream’이 힘차게 쏟아져 내렸다.

This is my dream!

Even if time passes!

No matter how old I am!

It doesn't matter, my dream!

#-여보세요?

“네, 감독님.”

대답하자마자, 곧바로 제임스 감독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듯 통통거린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정말 투자자가 나타났어요! 저번에 자선 파티에서 말씀드렸던 그 시나리오 말입니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다.

‘예상했지만, 그래도 기분 좋네.’

애초에 개봉할 영화.

분명 투자자가 나타나리라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어 개봉연도를 떠올리며 더듬거려야 했다. 그리 멀지는 않을 거라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는데······.

‘타이밍도 참 좋고.’

-······프로듀서님?

“아, 네.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다른 시나리오로 진행해야 하나 고민 많았는데, 그때 프로듀서님이 너무 좋다고 하셔서 용기 얻고 계속 돌렸었거든요!

이 사람이 파티에서 스타들이나 구경하며 한숨만 쉬고, 찌든 목소리로 한탄하던 그가 맞나 싶다.

‘거의 4년 동안 발전만 시켜온 시나리오에요. 정말 하고 싶은데, 뮤지컬 영화라는 게 워낙 호불호가 갈리니까. 특히나 저 같은 초짜 감독에겐 투자하려는 곳이 없네요···.’

라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었는데 말이지.

지금은 얼굴이 안 보이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알겠다. 달다, 달어.

-그래서 이제 일 얘기 하려고 합니다. 그때, 그러셨잖아요? 추천하고픈 배우가 있으시다고.

“그랬죠.”

뉴욕이 배경이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주인공인 만큼 다양한 인종으로 배역을 구성하고 싶다길래, 얼른 파고들었었지.

-그 배우분 프로필하고 연기 영상과 노래를 좀 보고 싶은데요. 이왕이면 뮤지컬 곡을 불러서 주시면 더 좋을 것 같고요.

신이 나 말하던 그가 순간 멈칫거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덧붙였다.

-아, 물론 무조건 캐스팅하겠다는 얘긴 아닙니다. 이번 작품, 어렵게 시작한 만큼 정말 열심히 만들어볼 생각이거든요.

“물론이죠. 저도 그런 기대 않습니다.”

다른 기대는 하지.

당신이 박경호의 연기와 노래를 보고 뻑이 갈 거란 기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답하자, 잠시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던 제임스 감독이 다시 펄떡이는 목소리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보내주기로 했고, 나는 프로필을 보내겠단 말을 하고서 전화를 마쳤다.

-Please have your boarding pass and······

마침 탑승을 준비하란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얼른 메일을 보내고서 캐리어를 끌고 줄을 섰다.

탑승이 막 시작될 때쯤, 핸드폰이 다시 울려댔다.

나는 화면을 보며 웃었다.

또 제임스 감독이었기에.

이렇게 빨리?

“네, 감독님.”

곧바로 제임스 감독의 목소리가 넘어온다. 녹음된 음원만 듣고 바로 전화를 걸어 아직 연기는 보지도 못 했단다.

그럼에도 전화가 걸 수밖에 없었다고.

-노래, 환상적이네요!

기대가 적중했다.

#최대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비행기 표를 끊고 온 건데, 어떻게 알았는지 공항엔 기자들 몇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니면 진을 치고 있다가 우연히 날 발견한 건가?

아무튼, 예상치 못한 인터뷰 세례를 받고서 인천 공항을 나섰다. 찬 바람이 매섭게 불어댔다. 같은 겨울이어도 미국하곤 차원이 다르게 춥다. 침투력이 다르달까.

곧장 집으로 가서 짐을 풀었다. 그리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여수로 내려갈 준비를 위해.

준비가 끝난 후엔 제임스 감독의 시나리오를 뽑아 가로수길로 향했다. 대로변에 난 작은 문. 칵테일 바로 내려가는 길엔 남자 한 명이 의자에 앉아 병든 닭처럼 졸고 있었다.

그래도 다가서니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다.

“여기 지금 들어가시면 안 돼요. 촬영 중이라.”

“그럼 촬영 끝나면 되나요?”

“에? 당연히 안 되죠. 이은주 씨 팬이시죠? 이미 그쪽 같은 사람들 한 트럭이 왔다가 이은주 씨 발끝도 못 보고 돌아갔어요.”

이은주면 ‘굿바이 멜로디’의 여주인공이다.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 탑스타. 인기가 대단하긴 하다지.

“박경호 씨 팬들은 안 왔었나요?”

“네? 박경호 씨 팬이에요?”

남자가 퀭한 눈이 나를 훑는다. 굉장히 이상하단 얼굴로.

팬인 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괜한 오해를 받는 것 같아 슬쩍 마스크를 내렸다. 그러자 남자의 반쯤 감겨있던 눈이 확 커졌다. 이 정도면 나한테도 공양미 삼백 석의 절반은 줘야 한다.

“마스크 때문에 얼굴을 못 알아봐서······박경호 씨 지금 밑에서 한창 촬영 중일 겁니다. 내려가셔서 기다리시면 될 거예요.”

병든 닭이 병상에서 일어나 안내를 해줬고, 지하로 내려와 촬영 현장에 다가섰다.

밝은 조명들이 내리쬐고 있는 곳.

그곳에 여배우, 이은주가 앉아있다. 대충 봐도 ‘아, 실연당했구나’ 싶은 표정으로 박경호와 대치 중이다. 극 중, 노래 잘 부르는 매니저 역할을 맡은 박경호는 단호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이은주가 한 발자국 다가선다. 그러자 이번엔 박경호가 한 걸음 물러섰다.

‘흥미진진한데?’

“커뜨!”

한쪽에 앉아있던 곽 감독의 신호가 떨어지며 꽁꽁 묶여있던 분위기가 탁, 하고 풀어졌다.

“감독님, 이거 뭔가 너무 서럽다.”

“딱 그렇게 찍혔어! 아주 좋아!”

“경호 씨 눈빛이 완전 단호박. 여자 많이 울렸죠?”

“저요? 제가 연애를 언제 했는지도 기억이 잘······.”

“거짓말 치고 있네! 만약 사실이면 경호 넌 얼굴 잘못 쓰고 있는 거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낄낄거리며 촬영장을 정리한다. 구석에 있다가 이젠 괜찮겠지 싶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박경호 옆에 붙어 끊임없이 재잘대던 이은주가 무심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와, 대박. 경호 씨.”

“네?”

“저 방금 월드 스타 봤어요.”

순간, 다시 등 돌려 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오늘은 노래 부르는 씬 없죠?”

끄덕이는 박경호를 데리고 근처 고깃집으로 향했다.

불판에 고기를 구우며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미국에 있는 사이 방영이 시작되어 지금은 동 시간대 1위를 찍고 있는. 그리고 박경호 때문에 앞으로 해외 수출 결과가 더 기대된다는 ‘굿바이 멜로디’.

동료 배우들은 어떤지 촬영은 수월한지, 궁금한 게 산더미인데 그건 박경호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미국에서의 일에 대해 계속 묻는다.

‘그만큼 관심이 있는 건가?’

박경호가 미국 진출에 대해 욕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김칫국을 마셔대며 식사를 마쳤다.

매실차가 나와 한 입 머금는데 박경호가 물었다.

“뮤지컬 곡은 왜 갑자기 녹음하라고 하신 거예요?”

“아, 그거요?”

잔을 내려놓고 입 끝을 올렸다.

“작품 때문에요.”

“새로 들어온 롤이 뮤지컬 배우 같은 건가요?”

“그렇다기보단······.”

가방을 끌어다 종이 뭉치를 꺼냈다.

[New Yorkers]

“영화 자체가 뮤지컬 영화에요.”

“네······?”

박경호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시나리오 첫 장을 넘겼다.

블라블라. 긴 내용이지만 골자는 간단하다.

뉴욕에 각자의 꿈을 갖고 온 다섯 명의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만들어지는 이야기.

사락. 사락.

천천히 시나리오를 넘기던 박경호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이거······전부 영언데요?”

내가 잠시 시나리오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박경호를 보았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미국 영화니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