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내다보다 (5)
한국, 멕시코, 브라질, 핀란드, 아일랜드, 뉴질랜드······.
소식은 계속 들어왔다.
스무 개의 나라에서 1위를 했다는 걸 알았을 땐, 펍 안은 또 한 번 발칵 뒤집혔다.
전 세계 1등이란 수식어가 성큼 가까워진다. 숫자들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물론 아직 한 발자국이 모자라다.
빌보드.
전 세계 최고의 대중음악 차트가 남아있었다.
*“와아아아아!”
차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환호성에 눈을 떴다. 거리가 분주하다. 바글바글하게 모여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들. 거리 시위라도 하는 줄 알았다.
“난리네요.”
운전을 맡은 월드 TKM 직원이 혀를 내둘렀다. 우리 앞으로 가던 검은 밴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무슨 콘서트장 앞인 줄 알겠어요.”
“그러게요. 방송 녹화하러 온 것뿐인데.”
이례적이지 않을까? 한국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 뉴욕 거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서리가 차는 창문을 슥 닦아내며 뿌듯한 마음으로 밖을 보는데, 익숙한 얼굴이 시선 끝에 걸렸다.
차를 세워서 슬쩍 내렸다. 내 얼굴도 꽤나 알려져 있었지만, 크게 문제는 없었다. 이미 사람들의 온 신경이 앞서나가는 밴에 달라붙어 있는 터라.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직원의 걱정에 혹시 몰라 챙겨온 캡모자도 꺼내 썼다.
“왜 멀찌감치 있어요?”
“엇, 프로듀서님!”
정보통, 김수정이 화들짝 놀라 어버버 하더니 항상 불시에 나타난다며 웃었다.
주변에 있던 친구들은 여전히 당혹스러운 얼굴들이다. 몇몇은 내가 누군지 조차 모르는 얼굴인 것 같고.
“근데 왜 여기 있어요? 밴 쪽에 전투적으로 붙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여기가 보기 좋더라고요. 뭔가 뿌듯하고. 내가 덕질하던 아이돌이 이렇게나 대단해졌구나, 싶어서요.”
그녀가 감회가 새롭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찐팬이네요.”
“흐흐, 아 참. 여긴 제 대학교 친구들이에요. 플래시 몹 보고 저처럼 던컨 찐팬의 길을 걷기로 했죠. 특히 얘는 현우 오빠한테 완전히 빠졌어요.”
돌아보니 금발의 여자애가 ‘현우’라는 단어만 알아듣고는 눈을 빛내고 있다.
“경호원들이 밀치면서 플래시 몹에 합류할 때, 현우 오빠가 미안하다고 엄청 사과했었데요. 그 모습이 괜찮다 싶어서, 눈여겨봤는데 춤까지 보고 완전 넘어온 거죠.”
김수정이 제 일인 양 자랑스레 말하는데, 한쪽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들끓었다.
밴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소리만 지를 뿐 누구 하나 달려들거나 하지 않는다. 덕분에 예상보다 많은 인파에 바짝 긴장했던 경호원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현우야아!!!”
“대한! 여기르 봐!”
“승준아, 키여워!”
난리다. 한국어가 패치된 팬들도 보인다. 어눌한 한국말에 엄대한이 나서서 그걸 고쳐주고 있다.
‘다른 애도 아니고 왜 네가······.’
제대로 가르쳐주고 있는지가 의문이네.
어쨌든, 나도 라디오 녹화에 참여하는 출연자인지라 천천히 방송국 입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 덴마크에서도 드디어 1위 했어!”
던컨이 방송국 안으로 사라지자 찐득하게 아쉬워하던 김수정이 신이 나 외쳤다. 어디 보라며 핸드폰을 확인한 친구들과 김수정이 들뜬 표정으로 다가와 묻는다.
“진짜 저희 빌보드 1위 할 수도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아무렇지 않게 저희라고 말한다.
이미 이들은 던컨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웃었다.
그리고 던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전히 던컨을 외치고 있는 수많은 팬들에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방금 오차드에서 연락 왔는데, 라디오 쪽도 나쁘지 않나 봐요. 거기다 섭외도 물밀 듯이 쏟아진다 하더라고요. 헤일리 쇼에서도 연락이 왔다네요. 이번엔 던컨을 초대하고 싶다고!”
속사포처럼 뱉어내는 직원의 말에 사무실 직원들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 뒤엔 은근한 기대감도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섣불리 말하지만 못할 뿐. 모두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다른 직원이 노트북을 홱 돌렸다.
“팬들이 이런 것도 만들었더라고요.”
세계지도. 거기에 던컨의 시그니처 색깔인 녹색이 만개해 있었다. 위에는 ‘점령 중’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고.
“재밌게 잘 만들었네. 차트 1등인 나라는 완전 녹색. 상위권인 나라는 연두색. 아닌 나라는 흰색인 것 같네요.”
“이렇게 보니까 던컨이 진짜, 대단하긴 대단한데요? 조만간 유럽도 다 녹색으로 덮이겠네.”
“지금 노래로 전 세계 1등이나 마찬가지니까.”
전 세계 1등.
얼핏 유치하게까지 보이는 그 단어가 어떤 대단한 표현보다 더 짙게 드리웠다. 모두가 가진 기대감을 간질간질 건드려 밖으로 튀어나오게끔.
“목요일에 집계 끝나서······화요일 오후에 발표죠?”
주어가 없지만 뭘 묻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김지희가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상위권은 공식 발표 전에 언론사에 먼저 소식이 뿌려질 테니 월요일 밤에 공개된다고 봐야 하죠.”
대답은 없었다. 월드 TKM 직원들 모두 마른침을 삼키며 주억거릴 뿐.
김지희가 달력을 보며 턱을 괴었다.
“그때쯤엔 피디님은 한국에서 결과를 들으시겠네요.”
“장 대표님이요?”
“네. 부모님 뵈러 가신다고 하셨었거든요.”
그러자 직원이 커피를 휘휘 저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부모님이 정말 뿌듯하시겠어요. 저희 엄마만 해도 던컨을 딸이 만들었다면서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시는데. 장 대표님이면 플래카드 걸고 잔치해야죠. 아, 이미 하셨으려나? 곡을 하도 많이 성공시키셨으니, 뭐.”
그 말에 웃던 김지희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며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피디님 어디 가셨어요?”
“옆 방에 계시던데요?”
“옆 방이요?”
플래카드 어쩌고 하던 직원이 끄덕였다.
“네, 무슨 노랠 찾고 계신 것 같던데요?”
#프린트해온 종이 더미를 턱, 내려놓았다. 방금 해온 만큼의 세 배가 넘는 악보가 이미 한쪽 구석에 쌓여 있었다.
정통 뮤지컬 곡들과 뮤지컬 영화들의 OST가 대중없이 섞여 있었다.
‘다음 건······.’
새로 가져온 악보를 훑으며 곡을 찾아 틀었다. 되도록 스토리까지 숙지해가며 노래를 듣고 악보를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거기에 박경호를 넣어봤다.
마냥 노래만 잘 부른다고 뽑아 줄 것 같지 않아서.
‘해당 캐릭터에 얼마나 어울리는지를 보겠지.’
제임스 감독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리고 연기에 대해서도 문외한이지만.
적어도 박경호에 대해선 잘 안다.
보컬 트레이너에서 중고 신인으로. 단역에서 조연으로 롤이 바뀐, 노래와 연기. 그 두 개가 모두 소화 가능한 뮤지션······.
문득, 프로듀서를 포기하고 영화감독의 길을 걷기 시작한 제임스 감독과 꽤나 잘 어울리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건 안 되겠네.’
영 안 어울린다. 오히려 악역 쪽이 성량이나 발성에 맞겠어.
검수 작업이 계속 이어졌다.
‘이건 키가 안 맞을 것 같고.’
‘이건 너무 미성을 위한 노래인데?’
‘너무 오페라 성향이 짙은 곡은 제외하고···.’
악보들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 더 뽑아와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집어 든 악보.
‘어, 이거···?’
고전 뮤지컬 중 하나. 뮤지컬에 관심이 없어도 내용은 소설로 모두가 알고 있는.
특히나 메인 테마곡은 워낙 유명해서 많은 뮤지션들이 여러 버전으로 부르기도 했었지.
노래를 틀었다. B 플랫 키. 첫 음표에 시선을 두고 천천히 노래를 따라갔다.
그러자 음표 위로 슬며시 노래가 입혀진다.
살짝 눈을 감았다.
‘가능할지도···?’
나는 누군가에게 멜로디가 들려오면 항상 그 멜로디를 부르는 당사자를 상상했었다.
그러다 보니 멜로디 위에 얹어진 당사자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게 꽤 익숙해졌지.
이번에도 그걸 시도해봤다.
이미 있는 곡 위에.
박경호의 목소리를.
그러자 녹음된 뮤지컬 배우의 목소리가 옅어진다.
반주만 남고 그 위로.
음표 위로, 박경호의 목소리가 입혀진다.
그때부턴 곡을 박경호가 부르고 있었다.
특유의 묵직한 보이스로.
박경호가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곡이 모두 끝났다.
자연스럽게 눈이 뜨였다.
‘이게 되네······.’
누군가의 목소리를 상상 속에서 내가 원하는 곡으로 플레이하는 것. 심지어 상상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선명하게 들리도록.
신기하다. 하지만 그 여운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이거다, 싶어서.
‘골라놓고 보니 제목부터가 박경호와 찰떡이네.’
[The impossible dream]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노래이자, 돈키호테의 메인 테마곡.
제임스 감독을 사로잡을 노래로 이만한 게 없을 것 같았다.
#“근데 갑자기 웬 뮤지컬 노래일까?”
드라마 세트장 옆 대기실. 대사가 있는 촬영은 모두 마친 박경호에게 매니저가 무언가에 의문 어린 목소릴 냈다.
대본 대신 악보를 꺼내든 박경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예전에 보컬 트레이너하면서 뮤지컬도 고민했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긴 한데······.”
“뮤지컬을 하려고 했었어?”
“잠깐. 노래가 너무 하고 싶어서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 그러다 드라마 단역에 붙어서 말았지만.”
덤덤하게 말한 박경호가 악보를 다시 훑었다. 오늘 아침, 장 피디님이 녹음해서 달라고 보내온 곡이었다.
“흐음.”
그의 시선이 잠시 시계로 향했다. 한 번 정도는 불러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불러보게?”
“그러려고.”
“뮤지컬이랑 발라드랑 비슷할 거 같지만, 완전히 다른 거 알지? 내가 냉정하게 들어주마.”
매니저가 아는 체를 하며 팔짱까지 끼고서 너스레를 떨었다.
박경호가 옅게 웃으며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뮤지컬과 발라드.
완전히 다르지.
발라드 가수 중에서 뮤지컬 쪽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기에 그냥 노래만 잘 부르면 다 잘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오해들이 많지만, 전혀 아니다.
베테랑 가수들도 긴 트레이닝 끝에 뮤지컬 무대에 올라선다는 걸, 무대만 보는 관객들이 모를 뿐.
대중음악적인 발성과 성악적인 발성, 그 사이.
교집합이라곤 거의 없을 것 같은 그 틈을 짚어야 한다.
쉽지 않다. 보컬 트레이너로서 활동했던 박경호 본인조차도.
하지만······.
‘피디님이 이 곡을 뽑아서 보내주신 이유가 있겠지.’
그것만으로도 얼른 이 노랠 불러보고 싶은 이유가 된다. 마음도 편해진다. 성대를 늘어트리고 언제든 경직되지 않은 채로 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심호흡을 연거푸 뱉어내고서, 살짝 입을 벌렸다.
공기가 입안으로 밀려 들어가며 서서히 배 안쪽을 채운다.
적당하게 차오른 공기.
악보를 타고, 머릿속에 멜로디가 그려진다.
워낙 유명한 멜로디.
가사를 따라 호흡을 내뱉는다. 소리를 내겠다는 의식 없이도 자연스럽게 소리가 밀려 나온다.
“To dream the impossible dream-”
말하는 듯, 동시에 노래 부르듯.
자박자박한 박경호의 목소리가 간지럽게 울렸다.
그 울림이 매니저의 팔짱을 스르르 풀어냈다.
넋을 놓은 입 모양 사이로 무심코,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했어도 됐겠는데? 뮤지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