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81화 (181/221)

181. 내다보다 (1)

“저 왔어요.”

오차드 건물 앞 도로에 택시 한대가 멈춰섰다. 여전히 매서운 눈 화장을 자랑하는 안무가 정수연이 내리며 미소했다.

“깜짝 놀랐어요. 오시기까지 할 줄 몰랐거든요. 바쁘신 분이.”

트렁크를 열어 캐리어 내리는 걸 도와주며 말하자, 정수연이 고갤 단호히 내저었다.

“전혀요.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대표님만 할까요. TKM에서 제일 바쁘신 분이신데.”

“제가요? 제가 좀······바쁘긴 했네요.”

정신없이 흘러갔던 지난 몇 달간을 떠올리며 헛헛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수연 씨 오는 걸 회사에서 허락해줬다니 다행이에요.”

“그냥 허락 정도가 아니었는걸요. 얼른 가라고, 가서 빨리 도와주라고 난리였어요.”

“그래요?”

내가 놀라듯 묻자 그녀가 혀를 내둘렀다.

“지금 회사 분위기 장난 아녜요.”

“어떤데요?”

“처음 던컨이 성공했을 때까지만 해도 약간 설레발 떨지 말자는 분위기였거든요. 이미 그 전에 아이돌 대전에서 솔라톤 꺾겠다고 했다가 대차게 망신을 당했으니······.”

말을 이어가던 정수연의 표정이 급격히 거뭇해진다. 아이돌 대전에서 솔라톤에게 완패를 당한 퀀텀보이즈. 그들의 안무를 담당했던 게 그녀였잖나.

“근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죠. 다들 들떠 있어요. 솔라톤이 앨범 차트를 씹어먹어도 그냥 덤덤해요. 그래 봤자, 우린 빌보드 차트인데? 라는 느낌이랄까요. 덕분에 최근 컴백하는 뮤지션들은 죽을 맛이겠죠. 차트 상위권에 간신히 들어도 대중들의 관심이 예전만 못하니까.”

“그런 줄은 몰랐네요.”

국내 반응을 계속 확인하고 있지만, 확실히 현지가 아니다 보니 느껴지는 온도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정수연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거기도 반응이 좋긴 한가 보네.

“아, 그런 와중에도 아더 레이블 프로듀서들이 다른 소속사 뮤지션들이랑 작업한 건 오히려 반응이 좋더라고요.”

“그 얘긴 들었어요.”

서기영과 오나연을 얘기하는 거다.

그 둘은 내가 아더 레이블 소속 뮤지션들에게 집중하는 사이, 그 외의 의뢰들을 맡아나갔다.

처음엔 내가 아니라는 이유로 못 미더워하는 소속사도 많았지만, 작업한 곡들이 하나둘 좋은 성과를 내며 이제는 처음부터 둘을 지목하는 뮤지션들도 생길 정도였다.

덕분에 내가 이렇게 소속 뮤지션들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거고.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서기영과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 능력을 갖고 있는 레비닛, 오나연.

일말의 걱정조차 안 되는 든든한 조합이지. 차트 상위권에 그들의 곡이 올라있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새삼 뿌듯해하는 사이, 오차드 건물 내부를 훑으며 한참 동안 감탄하던 정수연이 물었다.

“애들은 춤 연습 많이 했어요?”

“전 그쪽으로 문외한이라 잘 모르긴 하겠는데, 그냥 멋지더라고요. 춤이 멋져서 그런가.”

“대표님이 되시더니 립서비스가 엄청 느셨어요?”

정수연이 눈을 흘기며 꺌꺌댔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며 내게 말했다.

“이번 작업, 저한테 엄청 중요해졌어요. 물론 대표님께도 중요하겠지만, 저한텐 설욕의 기회거든요.”

그녀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감사하네요. 꼭 던컨 후속곡 맡고 싶었거든요. 근데 첫 곡이 너무 터져버려서. 아, 이건 외국 안무가한테 가겠구나, 싶었어요. 근데 제게 연락 주실 줄이야. 물론 시간이 촉박해서 절 찾으셨겠지만요.”

대수롭지 않게 툭 말하길래 내가 고갤 저었다.

“빠르게 후속곡을 내기 위해서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녜요.”

그리고 정수연을 보며 말을 이었다.

“케이팝이잖아요. 그리고 제가 아는 한 케이팝 댄스를 가장 잘 만드는 분이 안무가님이고요.”

살짝 감격한 얼굴로 날 보는 정수연.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길래 당황했다.

퀀텀보이즈의 실패가 그녀에게 큰 충격이긴 했나 보네.

탈모까지 왔다는 대목에서 그녀의 눈물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안돼. 화장 번져······아 참.”

손수건을 꺼내 톡톡 닦던 그녀가 갑자기 홱 나를 돌아봤다. 다행히 짙은 화장은 그대로였다.

“이번 안무가 이렇게 빨리 나온 건, 서윤이 때문도 있어요.”

하서윤?

항상 생각지도 못할 때, 튀어나오네.

“중간중간 막힐 때마다 서윤이가 도와줬거든요.”

“그래요? 그때 같이 작업한 이후로 친해지셨나 보네요?”

“엄청 친해졌죠. 최근 들어 급속도로.”

의왼데? 뭔가 둘 다 기가 세서 잘 안 어울릴 것 같은······.

“남 욕하면서.”

어울리네.

“그 중엔 대표님 욕도 엄청 했죠.”

그럼 그렇지.

내가 푸스스 웃으며 억울해했다.

“그래도 저 꽤 친해졌는데, 서윤 씨랑.”

그러자 정수연이 날 빤히 본다.

······왜 혀를 차지?

#“그치, 그렇게! 거울 보고! 선 생각해야지, 선! 춤이 틀리고 맞고를 떠나서 보기 좋을지부터 생각해!”

지하 안무실이 쩌렁쩌렁 울린다.

나는 슬그머니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혹여나 방해될 것 같아서.

얼른 따라 나온 한동휘가 혀를 내둘렀다.

“엄청······열정적이시네요.”

“독하게 마음먹고 오신 것 같더라고요.”

설욕전을 위해.

“그래도 애들은 밝네요.”

늘 밝던 애들이지만, 유난히 더.

플래시 몹 이후로 티끌만큼 남아있던 후속곡에 대한 부담감마저 벗은 듯하다.

땀이 스프링클러처럼 휘날리는 와중에도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고, 숨이 거칠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정한 음정으로 소릴 내고 있었다. 분명히 댄스 수업인데도.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는지 한동휘가 끄덕거렸다.

“이젠 정말 즐기는 게 보여요. 춤도, 노래도.”

즐기고, 원한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얘기다. 지난 삶에서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멜로디가 들리게 하는 스위치이기도 했다. 짐작일뿐이지만, 던컨과 하서윤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꽤 확신하고 있지.

물론 다른 이유가 하나쯤 더 있을 거라 생각하긴 한다.

노래 부르는 걸 즐기고, 간절한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나.

마지막 열쇠 같은 조건이 있겠지.

나와 맞는 이들이 따로 있는 거 아닐까? 마치 주파수가 맞아 떨어진 것처럼.

그게 아니라면······.

“대표님 덕분이죠.”

생각을 이어가려는데, 한동휘가 불쑥 말했다.

나는 순간 어리둥절해져 되물었다.

“네?”

“대표님은 던컨이 밝아진 게 팬들 덕분이라 하지만, 사실 전 그게 대표님의 능력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저요?“

여전히 갸웃거리자 그가 덧붙였다.

“던컨 만이 아니거든요. 저도 지금 이 일을 즐기고 있어요. 대표님 덕분에.”

“하하. 그런가요.”

멋쩍게 웃으며 다시 안무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던컨은 잠깐의 쉬는 시간도 없이 연달아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덩달아 달아오른 정수연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

가만히 지켜보다가 여러 생각들이 번졌다.

과거로 돌아온 건 나다.

멜로디를 듣게 된 것도 나고.

그러면 만약에······.

멜로디가 들리게 하는 것도 나라면?

한동휘의 말에 꼬리를 물다가 튀어나온, 어디까지나 가정뿐인 생각이지만.

순간,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차올랐다.

#곡도 안무도 완성된 상태에서 녹음까지 들어갔다.

오차드의 말콤과 케이트는 ‘아무리 그래도 이번 달에?’라며 여전히 안 믿겨 하는 반응들이었다.

‘한국에선 이틀 만에 곡을 만들어 하루 만에 녹음 따고, 믹싱, 마스터링까지 일주일 안에 끝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라고 말을 하자, 그때부턴 퀄리티 걱정을 하더라.

오히려 이건 간단했다. 데모를 틀어놓고 춤을 춘 영상을 보여줬더니 조용해졌지.

이번 달 말에 깜짝 공개를 해보자며 오히려 자신들 홍보팀을 독촉하겠다고 다짐하더라.

그렇게 이젠 뮤직비디오 촬영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

오차드가 연결해준 현지 스튜디오에서 던컨이 몇 날 며칠을 밤새 촬영하는 동안, 나는 간단히 짐을 쌌다.

뜬금없지만,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

“제이든 브라가.”

“루크 윌리암스.”

“코델리아 조이.”

“엘라 힐튼.”

그리 크지 않은 월드 TKM 사무실.

직원들이 이름을 줄줄이 읊어댔다. 하나같이 어디 시상식에서나 불릴 법한 쟁쟁한 이름들.

맨 끝에 앉아있던 윤 이사가 펜대를 돌리며 감탄했다.

“그렇게나 많이 온단 말이야?”

이름 호명을 멈춘 직원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배우, 뮤지션, 영화감독, 작곡가······무슨 유명한 사람들은 죄다 오는 것 같아요.”

“자선 파티가 시상식장을 방불케 하네요.”

“게다가 초대장이 없으면 아무리 유명해도 들어가지 못한 대요. 완전 현대판 귀족 파티네.”

“그래도 거기서 하룻밤에 300만 달러가 모인데요. 대단하죠.”

“작년 사진 보니까 입이 떡 벌어지네요. 제이든 미술관에서 엄청 성대하게 열렸네. 크흐······.”

직원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걸터앉아있는 쪽으로.

그걸 시작으로 부러움 그득한 눈빛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갤 돌리자 김지희와 이강훈 팀장도 비슷한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다.

“호텔에 옷 보내뒀으니까, 꼭 잘 입으셔야 해요?”

옷인데, 잘 입는 건 뭐지.

“혹시 엘라 힐튼 사인받아오실 순······윽!”

이강훈 팀장이 슬쩍 말을 꺼냈다가 김지희에게 저지당했다.

“기회를 한 번 볼게요.”

내가 동조하자 이강훈 팀장의 표정이 밝아졌고, 김지희는 세차게 고갤 저었다.

그런 곳 가서 제발 그러지 말라면서.

그나저나, 내가 저런 파티에 가야 한다니.

과거로 돌아온 뒤로 지금까지 신기하고, 낯선 경험들투성이였지만 이건 또 다른 느낌이다. 말이 자선 파티지 완전 사교계 모임 같잖아.

미셸은 거기서 대체 누굴 소개해주려고 하는 걸까?

덜컥 긴장을 집어먹고 있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이강훈 팀장이 내게 물었다.

“대표님은 누구 보고 싶은 사람 없으세요?”

보고 싶은 사람?

“있죠.”

“오, 누군데요?”

사실 많다. 그들 중 몇 명이나 파티에 참석할진 모르겠지만······.

“말해도 모를 거예요.”

아직은.

한동안 뒷전이었던 미래의 기억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LA에 도착한 건 해가 옆으로 눕고 있는 느지막한 오후였다.

호텔에 짐을 풀고 곧장 호텔에 맡겨뒀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색하다. 매우. 헤일리 쇼를 비롯한 각종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도 이렇게 불편한 옷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거울을 보니 직립보행을 터득한 새하얀 물개 한 마리가 서 있는 것 같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다가 옷의 문제가 아니란 걸 받아들이고 밖으로 나왔다. 약속했던 대로 호텔 안쪽으로 길쭉한 검은색 세단이 들어온다. 보랏빛 드레스를 입은 미셸이 뒷좌석에서 푸근한 미소로 날 반겼고.

가벼운 안부 인사를 하는 동안 놀랍도록 조용한 차는 네온사인 불빛이 가득한 할리우드로 내달렸다.

“유란 씨도 함께 가고 싶었는데, 정말 바쁘더라고요.”

“그렇죠. 지금 LA에 있지도 않아요.”

오늘 스케줄은 어디랬더라.

그래, 뉴올리언스.

여기와 같은 주인데 비행기로 4시간 거리다.

일산에서 영등포로 방송국을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 아니지.

이렇다 보니, 꽉 찬 스케줄을 보고 흐뭇해하던 은유란도 지금은 살인적인 스케줄 더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미셸은 살짝 걱정하는 눈치였다. 작은 체구의 그녀가 괜찮을까 싶다며. 나도 걱정이긴 하다만, 그래도 공연할 때 보면 체력 하나는 끝내줬으니까······.

그렇게 은유란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리 물어볼 게 많았는데, 하나도 질문을 못 했네.

‘결국, 부딪혀봐야 하나.’

세단에서 내리자 세상이 온통 불그스름해져 있었다. 야자수들이 그사이를 가르듯 쭉쭉 뻗어있고.

“막상 내리니까 긴장돼요?”

“사실 오기 전부터 긴장됐는데, 저걸 보니 이제 겁이 나는데요?”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 같다.

커다란 분수대를 감싸는 길. 그 길 위에 주차된 각양각색의 슈퍼카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어째 여긴 내가 올 곳이 아닌 것 같다고.

“지나치게 화려하죠. 환경을 위한 자선 파티라면서.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화려할수록 모금액이 더 높다더라고요.”

확실히 이런 곳에 있으면 원래 낼 금액보다 더 쓰게 되겠단 생각이 든다.

흠······난 어쩌지?

허전한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대리석 계단을 올라 샹들리에가 일렬로 내려온 로비를 지났다. 그리고 두꺼운 문 너머의 파티 현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날 겁주던 외관은 시작에 불과했다. 여긴 진짜다. 어둑한 조명 사이로 보이는 반짝이는 것들이 시선을 제대로 어지럽힌다.

덕분에 이상한 걸 느낀 건 몇 발자국을 더 내디뎠을 때였다.

어······?

수많은 시선이 느껴진다.

잔 하나씩 손에 들고 리듬을 타며 담소를 나누던 이들이 모두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역시 미셸은 미셸이라고.

그녀의 등장만으로 저 대단한 사람들(- 누군진 잘 안 보이지만)의 이목을 사로잡는구나.

하긴, 살아있는 전설, 재즈의 거장 아닌가. 한편으론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며 납득할 때였다.

미셸이 날 보며 피식 웃는다.

그리고 납득 못할 소릴 해왔다.

“다들 대표님이 궁금했나 보네요.”

저 시선들이 너도나도 맞춰대는 과녁이.

자신이 아닌, 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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