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거장을 가르친 신예 (2)
“건방진 새끼. 던컨 하나 성공했다고, 주제도 모르고.”
채드 이사가 잔뜩 헝클어트렸던 금발 머리를 정리했다.
탁상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시계를 차며 말없이 서 있는 자신의 비서를 노려봤다.
“세비슨 너플러가 자기 곡을 원한다는 건 어떻게 안 겁니까? 가서 설득하랬지 하소연하고 왔었어요?”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눈치가 빨라서······.”
“상대방을 띄우면 자기 무능함이 좀 덜어질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제 불찰입니다.”
붉게 물든 피부가 원래대로 새하얗게 돌아오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그동안 채드 이사는 답답하다며 풀어헤쳤던 윗단추를 다시 채우곤 숨을 골랐다.
“은유란 스케줄 알아보란 건 어떻게 됐어요?”
앨범 준비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있다면, 마케팅팀이 바쁘게 움직이는 중일 터.
라디오나 방송, 잡지사 쪽에 기록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미팅을 했다던가, 출연 약속을 했다던가, 아니면 인터뷰를 요청했다던가.
“그게, 인터뷰 몇 개와 지역 라디오 말고는 별거 없었습니다.”
비서의 말에 채드 이사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는 짙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렇지. 그 쪼끄마한 재즈 레이블 따위가 뭔 마케팅을 한다고. 아, 그래도 확실한 게 좋으니까. 인터뷰랑 라디오 전부 못 하게 막아버려요. 우리 쪽에서 적당한 애로 골라 출연시켜준다고 하면 넙죽 그렇게 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길로 사무실을 나서려는 채드 이사에게 비서가 물었다.
“바로 미하엘 대표에게로 가시는 건가요?”
채드 이사가 끄덕이자, 비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평론가 문제와 세비슨 너플러 때문에 부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안팎으로 시끌시끌하다.
뮤즈하임이 의문을 제기한 덕에 여론이 안 좋아지기도 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간판격인 세비슨 너플러가 컴백을 미루면서 그쪽 팬들한테도 욕을 먹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미하엘 대표가 채드 이사를 따로 찾는 걸 보니, 위의 두 문제에 관해 물어볼 게 뻔한 상황.
하지만 채드 이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후원을 해왔다는 건 대표도 알고 있었어요. 대표씩이나 되는 양반이 순진하게 후원만 하고 끝이라 생각했을 리도 없고. 세비슨 너플러야 계약 기간이 다가오니 지 몸값 높이려고 괜히 트집 잡는 거라 얘기하면 아무 말도 못 할 겁니다.”
전신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그가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끄덕이는 비서를 보며 말했다.
“내가 시킨 일이나 제대로 처리해 놔요. 그 건방진 새끼한테 제대로 보여주라고요. 지금 누굴 건든 건지.”
#수화기를 내린 마케팅 파트장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사무실을 건너와 지켜보던 밥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거기도 그래요?”
느릿하게 끄덕이는 마케팅 파트장.
“어, 인터뷰를 취소하고 싶다네?”
그는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단 얼굴이었다.
갑자기 인터뷰와 라디오 출연 약속들이 줄줄이 취소되기에 의아했는데, 기어이 마지막 남아있던 인터뷰마저 취소된 것이다.
다른 곳과는 달리 규모가 꽤 있고, 예전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잡지사라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여기가 그나마 가장 큰 곳이라 미셸에 대해 밝히기에 가장 좋겠다 싶었는데 말이지.”
“갑자기 왜 안된다는데요?”
마케팅 파트장이 으쓱거렸다.
“다른 뮤지션 인터뷰가 잡혔대.”
“아니, 그럼 인터뷰를 미루면 될 일이지 취소는 웬 말이래요?”
“그러니까 말이야. 나도 당황스럽네. 담당자도 난감하다면서 횡설수설이고.”
“미셸 얘긴 했어요?”
“안 했지. 그 전에 미안하다면서 끊어버리더군. 솔직히 알려주기도 싫었고.”
“잘하셨어요. 지금 자기들이 무슨 기사를 놓쳤는지도 모르고!”
어처구니없어하는 밥을 보며 마케팅 파트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재즈에 대해 관심도 많이 가져주던 잡지사라 우리도 의리를 지키려 했는데 말이지.”
“차라리 이렇게 된 거 대형 잡지사에다가 전화해서 이러이러하니까 얼른 인터뷰 받들어 모셔라! 라고 하죠? 맨발로 튀어나올 겁니다.”
“그렇긴 하겠지.”
마케팅 파트장이 침음성을 삼키며 고민을 이어갔다. 밥은 어디가 좋을까, 라면서 대형 잡지사들을 떠올렸고.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마케팅 파트장이 슬쩍 말을 꺼냈다.
“······장 대표 의견도 한 번 들어볼까?”
“그럴까요?”
밥이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거의 통보식으로 연락이 왔고, 마지막 남아있던 잡지사도 방금 전화해보니 인터뷰 못 하겠다고 하네요. 아니, 안 하겠다는 건가.
밥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답답한 말투로 토로했다.
하지만 채드 이사와 통화를 했던 나에겐 그리 놀라울 게 아니었지.
확실하진 않지만, 자꾸 확신이 가네.
이번에도 그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란 심증이 물길처럼 밀려왔다.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우리에게 딱히 피해랄 건 없지만, 별개로 언짢음은 충분히 들어찼다.
지금쯤 은유란의 앞길을 틀어막았다고 자축하고 있을 생각 하니 더더욱 심사가 뒤틀리네.
-그래서 지금 마케팅 파트장님과 얘길 해봤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대형 잡지사에 언질을 주고 인터뷰를 잡는 게 가장 효과적일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도 괜찮죠.”
-그럼, 잡지사 하나 뽑아서 그쪽에 전화 넣어볼게요. 혹시 원하시는 곳 있으세요?
그의 물음에 잠시 고민했다. 시선은 창밖에 둔 채로. 건너편 건물 유리로 내가 서 있는 건물이 비친다.
왜곡되어 꿀렁이는 것처럼 보이는 간판.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LA 같은 큰 도시엔 웬만한 잡지사 지부들이 모두 들어와 있죠?”
“아무래도, 그렇죠? 할리우드가 있는 도시잖습니까.”
“그럼, 뮤즈하임도 거기 있겠네요?”
*전화를 끊고 창밖에서 시선을 뗐다. 발걸음을 옮기자 카펫이 어석어석 밟힌다.
이젠 이게 익숙하네. 미국에 오래 있긴 했지.
‘향수병인가?’
딱딱한 마룻바닥을 떠올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얼마 안 남았다. 돌아갈 날 말이다.
애초에 미국으로 떠나올 때 계획했던 일들이 거의 마무리 되고 있었다.
‘물론 또 나오게 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복도 중간쯤에서 멈춰 서서 문을 열었다.
안쪽에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던 중년 기자가 펜 뚜껑을 닫으며 고개를 들었다.
“미안합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사실 저흰 인터뷰이(Interviewee)가 전화를 받으러 나가는 걸 반기거든요.”
“왜죠?”
“무슨 일이 더 생겼다는 뜻이니까요.”
음흉하게 웃는 기자를 보며 나도 마주 웃었다.
오브리 케인.
초대형 잡지사인 뮤즈하임, 거기서도 꽤 유명한 베테랑 기자다.
플래시 몹 때 던컨과 팬 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얘길 써주기도 했고.
‘입맛이 바뀐 걸까, 아니면 그들의 주머니 사정이 바뀐 걸까?’ 라는 제목으로 롭 테일러를 비롯한 평론가들을 월드덕 레코드와 엮어 의문을 제기한 이도 바로 그였다.
롭이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라는 서두로 시작했던 기사였지. 지금 그거 조회수가 몇이라더라···?
내가 그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는 동안, 그가 더 캐낼 생각은 없는지 음흉한 시선을 거두며 내게 말했다.
“오늘 인터뷰 감사했습니다. 모쪼록 앞으로의 활동은 문제없이 잘 풀리셨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제가 별로 말씀드릴 게 없어 기삿거리가 나올지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애초에 위에 보고용이라 본인 얘길 직접 들은 거라서요. 월드덕에서 명예 훼손이니 오히려 오차드와 우리가 관계가 있는 거 아니냐느니 으름장을 놓는 모양입니다.”
사실 그건 나도 좀 궁금하다. 뮤즈하임은 오차드와 무슨 관계지?
궁금증을 삼키며 물었다.
“그럼 어떡합니까?”
“그래 봤자 고소는 못 할 겁니다. 기자들이랑 척지는 게 얼마나 골치 아픈지 아는 양반들이라.”
“그건 다행이네요.”
내가 주억거리다가 파일 정리가 한 창인 그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LA 쪽에 인터뷰 가능한 기자가 있나요?”
“인터뷰요? 누굴 말입니까?”
“미셸이 피처링한 곡.”
어떤 곡인지 제대로 된 장르나 곡명조차 알려지지 않은.
오로지 미셸이 피처링했다는 이유만으로 유명해진 곡.
이번엔 내가 오히려 음흉한 눈일 것 같지.
오브리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입까지 쩍 벌어졌다.
“그 곡, 주인이요.”
#LA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채드 이사가 잔을 채웠다.
금빛 액체가 소용돌이치며 둥그런 얼음을 굴렸다. 그 모습을 만족스레 바라보던 그가 잔을 단숨에 비워버리곤 다시 한 잔을 따라 소파로 향했다.
“전화 연결되었습니다.”
비서가 다가와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새 술기운이 올랐는지 벌게진 얼굴로 채드 이사가 말했다.
“오늘 낮엔 너무 급하게 끊어버리길래.”
-적당했던 것 같은데요. 딱히 더는 통화하고 싶지가 않았거든요.
툭 받아치는 목소릴 들으며 채드 이사가 피식 웃었다. 은유란에게 잡혀있던 인터뷰와 라디오를 전부 뺏어왔단 얘길 비서에게 들은 터라 한껏 여유로웠고, 이를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아, 그리고 유란 씨 스케줄을 이사님이 정리해주셨던데요?
“내가? 그랬나요?”
채드 이사가 모른 척 되묻는 목소리에 조소를 줄줄 흘려보낸다.
-아무튼, 감사하다고 해야겠네요.
“감사?”
-더블타임 측에서 잡아준 스케줄들인데, 사실 썩 내키진 않았거든요. 앞으로 바빠질 거라.
장기로의 말에 채드 이사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그가 테이블 쪽으로 허릴 굽히며 마저 이죽거렸다.
“바빠져요? 그 은유란이라는 뮤지션이? 어디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기로 했나?”
상대방의 침묵이 그를 더 신나게 했다.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시네. 뭘 믿고 그러시는진 모르겠지만. 더블타임하고 잘 회의해보세요. 그래도 혹시 압니까, 인지도 있는 우리 뮤지션들을 마다하고, 그 어설픈 아시안 재즈를 흥미롭게 생각하는 괴짜 같은 기자가 있을지?”
은근슬쩍 자신들이 손썼음을 어필하던 채드 이사가 들려오는 대답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미 있더라고요. 괴짠진 모르겠지만.
“뭐요?”
-인터뷰, 이미 했다고요.
채드 이사가 시선을 들어 비서를 보았다.
비서는 황급히 고갤 저었고.
장기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또 비서님한테 뭐라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 잡아서, 오늘 한 거예요.
“우리가 손이라도 쓸까 봐 겁먹고 후다닥 해치웠나 보네요?”
-글쎄요. 어차피 이사님이 아셨어도 손쓸 수 있는 곳은 아니었을 겁니다.
콧방귀를 뀌며 여전히 느긋하게 잔을 굴리는 채드 이사. 그 사이, 패드를 가져온 비서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허세는. 뭐 대학 동아리 기자단, 뭐 그런 곳인가? 그런 데면 우리가 손 쓰기 뭐하긴 하겠······.”
사무실이 어두워 눈치채지 못한 채드 이사가 마저 비웃으려는데, 비서가 슬쩍 다가왔다.
이윽고, 그가 건넨 패드를 받아든 채드 이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뮤즈하임?”
요새 사사건건 방해하는 놈들의 로고가 보였다.
그리고 그 밑에 방금 올라온 따끈따끈한 인터뷰.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바로 그 곡의 주인. 그녀와의 독점 인터뷰>
채드 이사는 기사를 더 내리지도 않고서 비서를 보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게 맞냐는 듯이. 비서는 말이 없었고, 그게 답이 되었다.
-기사 보셨나 보네요?
기대에 찬 목소리가 넘어왔다.
그리고 그 기대 대로, 채드 이사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혹시 이미 올라온 기사까지 내릴 능력이 있으신 건······.
약 올리는 듯한 목소리.
콰직. 채드 이사가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집어 던져서.
곧이어 술잔도 조각조각 깨져 바닥을 나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