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플래시 몹 (2)
“제이미, 오늘이랬지?”
대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몇몇 여학생들이 가방을 챙기는 학생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제이미 킴, 한국이름 김수정이 가방을 들며 끄덕거렸다. 설레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웃음을 지으며.
“이따 우리도 구경 갈까 하는데?”
가장 먼저 온 친구의 말에 김수정이 놀랐다.
“에? K-POP 별로라며.”
“그렇긴 한데, 춤 보는 건 좋아하니까. 플래시 몹도 실제로 본 적 없어서 제대로 보고 싶기도 하고.”
의외라는 듯 끔뻑이던 김수정이 옆에 애들을 돌아봤다.
“너네도?”
“응, 뭔가 재밌을 것 같아서. 오랜만에 타임스퀘어도 한 바퀴 돌 겸.”
“근데, 플래시 몹이면 몇 명이나 참여하는 거야? 막 100명 넘고 그러나?”
반짝이는 눈들을 보며 제이미가 입을 뻐끔거렸다.
‘100명······.’
프로듀서님한텐 그렇게 말해 놓긴 했지.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땐 지원자들이 그만큼 있었으니까.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금은 반 토막이 나버렸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프로듀서님한테 상황을 말하기도 뭐했다.
‘그러다 던컨한테 안 보여주면 어떡해?’
사실 답장도 없어 보여줄지조차 미지수긴 하지만······.
‘그래도 정성스레 보냈는데, 답장 정도는 좀 해주시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돈 안 되고. 한 30명 정도?”
혹시 몰라 더 작게 말했다. 괜히 쪽팔리는 일이 생기는 것보단 나으니까.
근데······30명은 오겠지? 그치?
“그래? 생각보단 적네. 내가 막 영상으로 봤던 플래시 몹은 스케일이 큰 것들이었나 봐.”
“그래도 재밌을 거 같은데? 몇 시라고 했었지?”
예정된 시간을 알려주고 학교 건물을 벗어났다.
널따란 캠퍼스를 가로질러 가는데, 괜스레 불안해져 던컨 영상을 틀었다.
수천 번은 보고, 따라 했을 동작들. 그걸 머릿속에 다시 입력하며 불안감을 가라앉혔을 때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메일 한 통이 들어왔다.
“어······?”
김수정은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서 굳었다.
기로 프로듀서님한테 보낸 메일에 답장이 도착했다는 알림.
그것도.
[오늘이죠? 라이브 꼭 켜요. 던컨에게 보여줄게요.]
무려 이런 내용인······.
“꺄악!”
김수정이 소릴 지르며 한 줄짜리 텍스트를 읽고 또 읽었다. 지나가던 뉴욕대 학생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지만, 상관없었다.
엄청난 희소식이니까!
그녀는 정신없이 SNS 팬 채널에 들어갔다. 그리고 뭔가를 마구 치다가 지우고, 또 치다가 지우고를 반복했다.
“으으으······.”
앓는 소릴 내던 그녀가 마침내 게시물을 올렸다. 메일 내용까지 일부 캡쳐해서.
[오늘 우리 플래시 몹, 던컨이 라이브 방송에 들어와서 볼지도 몰라!]
#띠링-.
띠링-.
띠링-.
알림음이 계속 울려 진동으로 바꿨다. 그러자 이젠 주머니 속에서 야단법석이다.
그리고 그건 김수정과 이번 플래시 몹을 계획한,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친구들이 아닌, 던컨의 팬이 되면서 인연이 맞물리게 된 친구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건데?”
흑인 친구가 호들갑을 떨며 묻길래 올린 그대로라며 약간의 허세를 떨었다. 그러자 흑인 친구의 손이 그녀를 붙잡고 사정없이 흔들었다.
“너 기로 프로듀서랑 아는 사이였어!?”
“그때 공항에서 마주쳤다고 했잖아. 불법 굿즈 대신 한정판 받고. 저기 어지러워······.”
“야, 마주쳤다고 아는 사이면 난 윌 스미스랑 친척이야. 세 번이나 봤거든.”
흑인 친구의 유쾌한 농담에 킬킬대며 웃는데, 옆에서 머리를 똥머리로 올려 묶던 백인 친구가 물어왔다.
“그래서, 진짜 어떻게 된 건데?”
“메일 보냈어. 감사 인사 뒤에 우리 플래시 몹 한다고도 썼고. 꽤 자세히.”
“그거 보낼까 말까 고민하더니 진짜 보낸 거야?”
“응, 혹시 모르잖아. 던컨이 우릴 봐줄지.”
“그게 현실이 돼버렸네?”
“아마도? 확실하진 않지. 이렇게 답장이 왔어도 사실 진짜 봤는지 알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자 흑인 친구가 넌 의심이 너무 많다며 끼어들었다.
“기로 프로듀서가 답장까지 보냈는데?”
“내 생각도 그래. 믿어도 될 거 같아.”
각자의 바람이 섞이기야 했겠지만, 나름 일리 있었다.
덩달아 끄덕거리는 김수정에게 백인 친구가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불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음으로 해놨더니 이 난리야. 팬 채널 지금 폭발하기 직전이라고.”
“나도. 계속 진동 울리는···오!”
자신의 핸드폰을 훑어보던 흑인 친구가 놀라 했다.
“그 주근깨 많고 춤 잘 추는 애 있잖아. 아르바이트 때문에 못 온다던.”
“메건?”
“어, 걔! 걔 그냥 아르바이트 안 가고 온 대. 점장 엿이나 먹으라면서.”
“진짜?”
“근데, 걔뿐만이 아니야. 못 올 것 같다던 애들 대부분이 지금 어떻게든 오려고 난리야. 거기다 애초에 지원 안 했던 애들까지 연락 엄청 오고 있어.”
“지원 안 했던 애들? 왜?”
흑인 친구가 그루브를 타며 신나 했다.
“왜긴! 껴달라고 그러는 거지!”
“아······.”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는 김수정에게 백인 친구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근데 이거 쫌 난감해. 우린 개인 연습 영상까지 찍고 서로 피드백까지 하면서 준비했잖아.”
“그랬지?”
“근데 아무나 막 끼면 우리가 구상했던 던컨 같은 칼군무는 물 건너는 거라고.”
백인 친구의 말에 흑인 친구도 핸드폰 보는 것을 멈추고 주억거렸다.
“그런 문제가 있었네. 그럼 뭐라 답장하지?”
두 친구가 동시에 김수정을 보았다. 어떡하면 좋겠냐는 표정으로.
멍청한 표정을 풀고 잠시 고민하던 김수정이 이내 자기 의견을 풀어냈다.
“그냥 모두 오라고 하자. 원래 그런 게 플래시 몹의 묘미 아니겠어? 인원이 많으면 칼군무야 힘들겠지만······.”
그러면서 그녀가 이번 플래시 몹의 취지를 꺼내 들었다.
“그래도 던컨한테 확실히 보여줄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팬들이 응원하고 있다고.”
#“웬 도넛이에요?”
이강훈 팀장이 종류별로 들고 온 도넛을 보며 내가 물었다. 옆에 앉은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도넛 한 조각을 건넨다.
“애들이 대기하고 있는 골목 바로 옆 도넛 집에서 사 왔습니다. 미국식 잠복근무랄까요?”
피식 웃으며 도넛을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퍼석퍼석하다. 이 맛에 먹는 거지.
“그나저나,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넓네요. 사람도 그만큼 바글바글하고.”
“상징적인 곳이잖아요. 뉴욕, 브로드웨이, 타임스퀘어.”
“그리고 도넛.”
이강훈 팀장이 웃으며 도넛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흠, 미국 생활이 고됐나. 매일 같이 정장 차려입고 가죽 수첩 들고 다니며 점잔 빼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더분해져 있었다. 실없는 드립도 많이 치고.
“근데, 버스커들이 이렇게 많아서 어떤 팀인지 어떻게 찾죠?”
그가 눈을 돌리며 의아해했다.
던컨 팬들이 아닌 버스커를 찾는 이유는 이번 플래시 몹의 방식 때문이었다.
아직 던컨의 곡은 싱글 하나뿐이라 메들리로 플래시 몹을 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현지 팬들이 머리를 썼더라.
소수 인원이 다른 곡들로 댄스 버스킹을 한 뒤 마지막 곡에서 준비한 플래시 몹을 시작하는 거로.
그러면 사전에 충분히 구경꾼들도 몰릴 거고, 확실히 일석이조겠지.
“제 정보통을 찾는 수밖엔 없죠.”
“이것 참, 전 얼굴을 모르니. 어떻게 생겼다고요?”
내가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이미지를 설명했다. 끄덕이며 듣던 이강훈 팀장의 표정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버렸고.
내 묘사가 별로였나?
“제가 여기서 대표님 정보통을 한 100명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별로였나 보네.
도넛이나 먹게 두고 혼자 눈을 바삐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기억 속의 얼굴을 찾은 건, 하얀 티셔츠를 맞춰 입은 네 명의 댄서들이 버스킹을 하는 곳에서였다.
“저기 있네요. 회색 민소매 입은 유학생.”
“저 친구요? 그러면 저쪽 버스커들이 애들 팬이겠네요?”
끄덕이자 이강훈 팀장이 얼른 핸드폰을 들어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영상 촬영까지 시작한다.
“브이로그에 넣으려고요.”
“그렇게 흔들리게 찍어서요?”
덜덜거리는데?
“끙, 그렇지 않아도 지희 씨한테 몇 번 잔소리 들었어요. 앵글로도 혼나고.”
“제가 한 번 찍어보죠.”
“······아무래도 우리 둘 다 혼날 것 같습니다.”
이내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깔끔히 포기했다.
이강훈 팀장은 흔들리는 영상이라도 필요할 거라며 여전히 의욕적이었고.
“근데 이거 언제 시작하는지 어떻게 알죠? 애들도 미리 준비해야 할 텐데요. 도넛 집이 은근 거리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의 우려에 나도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2절부터 짠하고 나타날 생각인데, 노래가 이미 시작되고서 우왕좌왕 여기로 온다면 1분 남짓으론 턱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고민도 금세 해결돼 버렸다.
띠링-!
미리 팔로우해둔 SNS 계정에서 라이브가 시작된다는 푸시가 떠오르면서.
나는 곧장 핸드폰을 들어 던컨과 함께 있을 김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여전히 덜덜거리며 촬영 중인 이강훈 팀장에게 말했다.
“이 곡이 마지막이겠는데요?”
#“후아······.”
김수정의 굳은 표정 사이로 한숨이 비집고 나왔다.
댄스 버스킹은 성공적이었다.
댄스팀으로 위장(?)한 팬들이 멋들어진 공연을 선보인 덕분에.
구경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졌다. 둥글게 둘러싸고 지켜보는 이들부터, 지나가다 멈춰서 보는 사람. 아예 벤치 쪽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이들까지.
족히 수십 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곡이 끝나면 드디어 자신의 차례였다.
플래시 몹의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콘티는 간단했다.
댄스팀이 춤을 알려주겠다며 모르는 척 자신을 부를 거고, 자신은 나가서 춤을 배운다.
거기서부터가 플래시 몹의 진짜 시작이었다.
꿀떡. 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원래 촬영 중이던 카메라 옆에 어느새 라이브 방송용 핸드폰이 세팅되었다. 방송도 켜졌겠지.
‘들어왔으려나······?’
던컨이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미 한쪽에 모여 버스킹을 즐기고 있는 대학 친구들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엄지를 펼치는 그녀들.
‘아직, 뭘 했다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흘려보내며 머리를 질끈 묶고, 운동화 끈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고갤 드는데.
······어?
왜 그런 거, 있잖나.
무심코 시선을 훑는데, 순간 덜컥하고 걸리는 기분. 휙휙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은 그런······.
‘기로 프로듀서님?’
그때, 노래가 멈추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후! 사람들이 정말 많이 모여주셨네요. 이번엔 저희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한 분을 뽑아서 춤을 가르쳐 드려볼까 하는데요. 음, 어디 보자······거기 회색 민소매에 머리 묶으신 분?
“······.”
-회색 민소매에 머리 묶으신···.
“아, 네. 네!”
김수정이 정신없는 표정으로 얼른 튀어나갔다.
댄스팀인 척하던 백인 친구가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 작게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아냐.”
고개는 젓는데, 시선은 계속 한 곳으로 흐른다.
“시작할게?”
“어, 어.”
백인 친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자, 저희를 한 번 따라 해 보시겠어요? 먼저 이 동작. 다음엔 이 동작. 그리고 이렇게.
동작을 완벽히 따라 한 김수정에게 백인 친구는 본격적인 플래시 몹의 시작을 알리는 대사를 읊었다.
-와, 진짜 잘하시네요. 이 구분 동작들을 연속으로 한 번 해보실까요?
백인 친구를 비롯한 댄스팀들이 슬금슬금 물러나고.
둥글게 만들어진 공터에 김수정이 덩그러니 섰다.
힐끔.
김수정이 시선을 움직였다.
벤치엔 여전히 익숙한 느낌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실제로는 한 번 봤을 뿐이지만, 방송을 통해, 혹은 던컨 옆에서 계속 봐왔던.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만, 공항에서도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저 모습이 더 익숙하다.
그냥 닮은 사람일까?
사실 흔한 얼굴이잖아?
일련의 생각들로 긴장감은 어느새 뒤로 밀려나 있었다.
아차.
자신을 지켜보는 수많은 시선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잡았다.
그녀가 댄스팀이 가르쳐준 세 개의 동작을 이어서 추자, 약속된 대로 노래가 틀어졌다.
빌보드 싱글차트 19위의 기염을 토하고 있는, 던컨.
그리고 그들의 데뷔곡, This is DUNCAN.
스피커에서 뛰쳐나온 음원이 타임스퀘어 한쪽에서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시작은, 그녀 한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