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길과 방향 (6)
“미셸이 설마, 그 미셸 루바니인가요?”
확인하려고 묻는 밥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의 심박 수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넘실거린다.
현기증이라도 날 것 같은 얼굴이라 얼른 끄덕이자 다시 한번 침묵이 흐른다.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지.
뜬금없고 충격적이다. 갑자기 세계적인 거장이 피처링으로 참여한다는 게 결코 흔한 일은 아닐 테니까.
특히나 패스트푸드 점에서 오렌지 주스로 입가심하며 나눌 얘기는 더더욱 아니고.
대체 어떻게? 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보며 내가 푸스스 웃었다.
“어쩌다 보니 미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어쩌다 보니 되는 거였습니까?”
“운이 좋아 마음이 맞았고요.”
“······그것도 운으로 되는 거였군요?”
나로서도 여전히 얼떨떨한 부분이라 그냥 끄덕일 수밖에.
“그렇죠.”
“그럼 전,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서 그런 사람과 일을 진행하는 중이고요?”
“그건 운이 아니죠.”
“그럼요?”
“파트장님이 은유란이란 뮤지션을 알아본 덕택이죠.”
그러자 밥이 헛웃음을 짓는다. 동시에 끄덕거리는 걸 보니 아예 부정할 생각은 없나 보다.
“전부터 느꼈지만, 대표님의 뮤지션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네요. 틈새 홍보를 저한테 하시네.”
“제 곡을 불러주잖아요.”
내 꿈을 실현 해주는 사람들이지.
그러니 더 잘 됐으면 싶고.
내게도 그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어···하 참. 아직도 당황스러워서 뭘 여쭤봐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 그래. 그녀와 얘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된 상탭니까?”
“오늘 계약서를 보내왔어요.”
“미셸 쪽에서 먼저요?!”
“네.”
“그, 그래서요?”
“바로 도장 찍었죠.”
호텔로 그녀의 남동생이 찾아와 먼저 계약서를 펼치기에 나도 얼른 도장을 찍었다.
어차피 곡에 관해선 전적으로 아더 레이블의 소관이기도 하고, 애초에 제안을 하러 가는 시점에서 비용에 대한 것도 염두에 뒀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내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밥이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자, 잘하셨네요!”
좀 묘한 기분이었지. 내가 제발 해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도 이상한 게 없는 상황인데, 오히려 상대방 쪽이 적극적으로 나서니.
“그럼 제가 뭘···아, 보고. 보고해야죠.”
“네, 이 정도면 보고하셔도 될 겁니다. 단, 벌써부터 떠들썩해질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이에 밥이 격하게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진짜 안 드시고 가셔도 되겠어요?”
“안 먹어도 배부릅니다!”
밥이 체구에 맞지 않는 민첩함을 보여주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깐 사이 얼굴에 활력이 돋은 얼굴이었지.
계약 문제에 대한 줄다리기 덕분에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는 걸 알기에 괜스레 나까지 기분이 말랑해지는 것 같았다.
반쯤 남은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콜라가 나았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밥이 다시 달려왔다.
“벌써 다녀오셨어요?”
“네? 아하하, 그게 아니라 홍보비 말입니다.”
“아, 네.”
“그거 확정되었습니다. 곧 월드 TKM 기획팀과 연락하겠지만, 대표님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이건 나도 의외였다.
세상 신중한 더블타임이었는데 말이지.
그래서 미셸의 피처링 소식으로 줄다리기의 중심을 우리 쪽으로 끌어올 생각이기도 했는데, 웬일이래,
“일이 갑자기 잘 풀리네요?”
“저희 대표님이 며칠 고민하시더니 화끈하게 결정 내리셨습니다.”
“유란 씨 덕분이겠네요. 파트장님처럼 가능성을 보셨나 봅니다.”
밥이 학을 떼는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어쩌면, 좀 더 끌어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우선, 가서 회의 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또다시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버렸다.
“흐음.”
사방이 뚫린 건물 안으로 기분 좋게 바람이 불어왔다.
다시 수첩을 열어 아까 적어둔 것들을 쭉 훑었다. 동시에 미소가 그려진다.
대표로서의 일이 거의 다 마무리되었으니, 이제야 비로소 프로듀서로서 음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그럼 저희가 그거 나눠서 더 지원받았을 수 있단 거 아녜요.”
“그렇지.”
“게다가 거긴 디지털 싱글이라면서요. 한 곡 만드는데 돈을 그렇게 쓰는 게 말이 돼요? 무슨 대중음악 하는 것도 아니고?”
“내 말이.”
더블타임의 매니지먼트 파트장과 소속 뮤지션.
환상의 쿵짝을 자랑하는 대화였다.
“이러면 진짜 서운하죠. 제가 그래도 몇 년째 더블타임 안 떠나고 의리로 있는 건데.”
“알지, 알지.”
“이젠 신인을 구하다 못해 수입까지 해오는 거예요?”
“나도 답답하다. 곡 하나 빌보드 문턱에서 놀았던 것 가지고 밥이건 대표님이건 무슨 신예라도 나타난 듯이. 내가 보기엔 별것도 없더만 쓸데없이. 너처럼 레이블에 애정이 있는 뮤지션한테 더 투자하고 그래야 하는 건데.”
매니지먼트 파트장이 혀를 찼다.
뮤지션도 그게 맞는 거라며 고개를 파닥거렸고.
그때였다. 누렇게 변색 된 전화기가 요동치듯 울린 것은.
수화기를 든 파트장이 ‘네’를 연거푸 말하더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왜요?”
“아니, 무슨 하루에 회의를 두 번씩이나 하자는 거야?”
“또요?”
파트장이 끄덕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뭔가를 떠올렸는지 갑자기 입매를 올렸다.
“가만, 이거 아까 했던 얘길 취소하려고 그러시나?”
그러면서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85만 달러가 누구 집 애 이름도 아니고.
가능성 따위만 보고 걸 금액은 아니지.
‘도박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조소를 흘리며 4층으로 올라서자 각 파트의 파트장들이 보였다.
“오셨어요?”
“갑자기 무슨 일일까요?”
“그러게요.”
“혹시 아침에 했던 결정을 후회하시는 건 아닐까요?”
그들의 대화를 듣는 매니지먼트 파트장의 웃음이 짙어졌다.
파트장들까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며 그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대표가 아침의 회의를 번복하리라고.
앞장서던 파트장이 문을 열어젖혔다.
상석에 앉은 대표와 바로 옆에 있는 퍼블리싱 파트장, 밥이 시야에 들어왔다.
‘먼저 와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확신이 눈을 가리자 계속 생각이 그런 쪽으로 흐르는 그였다.
누군가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누군가는 조소를 띄운 채로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대표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또 회의를 하자고 했지만, 이번엔 간단하게 끝낼 걸세. 얘긴 밥 파트장이 할 거고.”
파트장들의 시선이 밥에게로 향했다.
밥도 파트장들을 번갈아 가며 시선을 맞췄다.
“아더 레이블에서 추가로 얘기해 온 게 있어서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뭐?”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잖아? 라는 표정으로 되묻는 매니지먼트 파트장.
밥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갑자기 피처링을 넣게 되어서 홍보 계획을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겠다고 판단······.”
“뭐야, 고작 피처링 하나 때문에 우리가 모인 거라고?”
따지듯 묻던 매니지먼트 파트장이 이내 대표의 눈치를 보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밥이 끄덕인다.
“네.”
지금 날 약 올리는 건가.
매니지먼트 파트장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칠 무렵, 다른 파트장들의 표정에도 의아함이 떠올랐다.
“피처링을 우리 측에서 구해줘야 하는 건가?”
파트장 중 한 명의 질문에 매니지먼트 파트장이 코웃음을 쳤다. 그 가라앉을 배를 누가 올라타겠냐고 중얼거리며.
“아닙니다. 피처링을 누가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홍보 스케일을 더 키울지 말지 정하는 겁니다.”
“스케일을 키워? 지금보다 더?”
“네, 제 생각엔 키우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황당한 물음에 밥은 끄덕였다. 문제 될 게 있냐는 듯.
그 당당함에 매니지먼트 파트장의 고개가 돌아갔다.
“대표님, 이게 지금 무슨 상황······.”
말을 맺기도 전에 밥이 덧붙였다.
“무려 미셸 루바니가 피처링할 곡이니까요.”
순간, 회의실에 정적이 일었다.
누구 하나가 ‘억!’ 소릴 내기 전까지는.
#밥에게 미셸의 피처링 소식을 알리고 난 후부턴 일이 조용히, 그리고 빠르고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결과적으로 더블타임이 홍보비로 제시한 금액은 100만 달러. 거기에 TKM의 지원으로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큰 금액인 150만 달러가 책정되었다.
한동안 역풍처럼 앞길을 막는 것 같더니 이제 완전히 순풍으로 흐름이 바뀐 듯하다. 노를 저으면 쭉쭉 나아갈 것 같네.
그 사이, 나는 잔가지처럼 남아있던 일들을 서둘러 해결하고 비로소 호텔 방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오래되어 꾀죄죄한 노트북. 하지만 아직도 스케치 정도를 하기엔 손색없는.
미니 마스터 건반을 앞에 두고, 프로그램을 띄워 트랙을 하나 만들었다. 밑에서 사 온 콜라를 홀짝이며, 머리를 깨웠다.
캠버스에 첫 선을 그으려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화가처럼, 팔짱을 끼고 텅 빈 트랙을 보려 보았다.
첫 음이 중요했다. 들려오는 멜로디가 없는 지금, 거기서부터 시작이니까.
“흐음······.”
한참을 앓는 소릴 내다가 벌떡 일어났다. 유레카를 외치거나 그런 거라면 좋을 텐데, 단지 핸드폰이 울려서였다.
-피디님, 저예요.
“네, 누님.”
-쓰읍.
“···유란 씨.”
발끈하는 소리에 킥킥대며 콜라를 집어 들었다. 창가 쪽으로 다가서자, 호텔 커튼 너머로 LA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티 팝이 가미된 재즈를 들으면 술 없이도 취하겠네.
-저희, 방금 남아있던 스케줄 모두 끝났어요.
“주변이 시끄러운데요?”
-코엑스에요. 캐리어도 사고, 가방도 사고, 옷도 좀 사려고요.
“이민이라도 오시려고요?”
뒤쪽에서 ‘그것도 좋습니다!’라는 대답이 들려오는데, 은유란이 단호하게 잘라냈다.
-그건 안 돼요. 이번에 공연하면서 느낀건데, 저희 팬이 생각보다 너무 많더라고요. 그분들 두고는 못 가죠. 심지어 오늘 선물 주고가신 분은 마이원 때부터 팬이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은유란이 쿡쿡대며 웃는다.
그리고 이윽고, 들뜬 목소리로 불쑥 내게 말했다.
-피디님, 감사해요.
이거 유어 웰컴을 자동응답으로 해놓든가 해야지.
“그만 감사해도 돼요. 여러분 어떻게든 잘 되게 만들어야 하는 게 제 일인걸요.”
-방치하는 대표도 많아요.
“그래서 지금 마이원이 휘청휘청하죠.”
-성공시켜주겠다면서 하기 싫은 음악 시키는 대표도 많고요.
“저도 누가 시킨다고 하기 싫은 음악 억지로 하는 건 사양이라.”
은유란의 듣기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콜라를 털어 넣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문득 뭔가 떠오를 것도 같아서.
-애들이 그러는데, 피디님이 제게 유일하게 안 해주신 건 프로필 나이 수정뿐이래요.
“정직하게 사셔야죠. 아더 레이블 큰 어른이.”
-···끊을게요. 곧 봐요, 우리?
“네, 캐리어 너무 아기자기한 거 사지 마시고요. 나이도 있으신-.”
뚝. 전화가 끊겼다. 감사가 오래 안 가는 타입이란 말도 했던 것 같다.
핸드폰을 침대에 던져놓고 한참을 피식거리다 다시 노트북 쪽으로 몸을 끌었다.
‘어디 보자······.’
3일 후면 LA에 도착할 테니, 그때까지 곡을 기가 막히게 뽑아놔야 내가 죽지 않을 것 같지.
다행히 은유란의 목소릴 들은 게 힌트였는지 머리가 트인 기분이다.
방금 들었던 음색을 최대한 풍성하게 떠올리며 그 끝을 붙잡고 이리저리 길을 찾았다. 음색에 가장 어울리는 방향으로.
건반을 누르고 멜로디를 그리면, 머릿속에서 은유란이 곧바로 따라부른다. 그걸 듣고 또 다른 멜로디를 만들어내고.
계속 반복되는 과정. 나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건반을 눌러댔다.
그렇게 3일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