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길과 방향 (5)
피처링(featuring).
방송계에서 게스트를 섭외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이듯, 피처링도 마찬가지다.
가창자에겐 부담을 덜어주고 부족한 부분을 메우며,
프로듀서에겐 선택지를 다양하게 넓히고,
마케터들에겐 누구누구가 피처링 한다는 소식만으로 다양한 대중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훌륭한 마케팅 수단이기도 했다.
자칫 잘못하면 케미가 아닌 이질감만 주어, 되려 역효과가 나기도 하지만.
은유란과 미셸.
머릿속에 떠올려봐도 알쏭달쏭하다. 과연 좋을까, 의심이 든다기보단 이게 어떤 효과를 낼지. 그런 긍정적인 의문에 가까웠다.
홍보 적인 측면이야 말할 것도 없이 초대박이고.
‘누구는 자기네 가수 피처링을 하라던데, 여긴 본인이 피처링을 하겠다네.’
월드덕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는데, 겉으로 보이는 내 표정은 아직도 벙쪄있었나 보다.
미셸이 내게 설명하듯 말했다.
“안 그래도 연락하려 했다고 했죠?”
“그게···.”
“맞아요, 이것 때문이었어요.”
그녀가 끄덕이며 덧붙인다.
“옆에서 지켜보고 싶은 후배예요. 아니, 후배라고 부르면 안 되겠네요. 내가 배우고 싶어 가는 거니까. 겸사겸사 프로듀서님의 곡도 불러보는 셈이고요.”
이 저택에 들어온 지 30분 만에 남은 웰컴 드링크 잔을 훅 비웠다.
목구멍을 날카롭게 긁으며 내려가는 술.
기침은 하지 않았다. 알콜이 하도 세니까 오히려 머리가 맑아진다.
“그렇게 쉽게 결정하셔도 되는 건가요? 아직 노래도 안 들어보시고?”
판에 초를 치는 게 아니다. 확실히 하는 것뿐.
“안 되나요?”
안 될 리가.
고개를 내젓자 미셸이 안도하듯 옅게 미소를 띄웠다.
“프로듀서님 실력이야 이미 유란 씨의 첫 곡에서 모두 확인했고요. 대략적인 그림은 프로듀서님 머릿속에 그려져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오늘 얘길 나누다 보면 그것도 엿볼 수 있겠네요.”
가뜩이나 은유란을 떠올리며 조금씩 쌓여가던 부담감이 더 묵직해진다. 손이 근질거리고, 심장이 그루브를 탄다.
이 무게감이 불편할 것 없이 딱 좋았다.
꽤 많은 얘길 나눠야 할 것 같았다.
이 거장과.
나도 모르는 사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데, 미셸의 매니저인 남동생이 안쪽에서 나타났다. 조만간 팍 터질듯한 앞치마를 두르고서.
“식사하시면서 얘기 더 나누시죠.”
어쩐지 전투식량을 만들어 놨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 같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식사는 훌륭했다.
다만, 그 뒤로 나눈 이야기들이 더 강렬해서 저택을 나설 때쯤엔 내가 뭘 먹었는지도 까먹을 지경이었다.
고기 대신 블루스, 과일 대신 스윙, 술 대신 보사노바······.
호텔로 돌아가는 길.
머릿속이 포만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쪽 대표가 욕심이 과하네. 우리가 대중적인 곡을 하는 것도 아닌데, 홍보 비용으로만 85만 달러(-약 10억)라니.”
더블타임 레이블의 회의실. 대표의 호출로 모인 이들 중 한 명이 퉁명스러운 목소릴 냈다. 매니지먼트 파트를 맡은 파트장이었다.
“대중음악 쪽은 150만 달러가 기본입니다. 그리고 아더 레이블이 모회사인 TKM을 통해 지원받는 걸 생각하면 85만 달러가 그리 큰 금액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니까 이해가 안 간다고. 그쪽에서 싸 들고 온 돈이 큰데 왜 우리까지 덩달아 리스크를 감내해야 하냐 이 말이야. 그냥 처음 제안했던 대로 하면 우린 거의 리스크 없이 가는 거 아냐.”
“그건 우리 쪽 제안일뿐이었죠. 장 대표 입장은 달랐고, 그래서 미팅을 계속 진행하며······.”
매니지먼트 파트장이 혀를 찼다.
“나 원 참. 이거 파트장까지 단 녀석이 회사를 생각해야지 어디 편을 드는 거야? 홀랑 돈 다 갖다 바칠 놈이네, 이거?”
매니지먼트 파트장이 옳다구나 하고 커졌다. 시선은 당사자인 밥이 아닌 그의 너머에 있는 문 쪽을 향했다.
대표의 사무실.
아직 나오지 않은 대표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다른 파트장들은 그가 날을 잡았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별다른 중재를 하진 않았다.
매니지먼트 파트장이 밥 샤이더를 싫어한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에.
경력도 일천한 놈이 재즈에 대해 가르치려 든다며 꾸준히도 싫어했었지. 밥이 같은 파트장 직책을 달고 나서도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밥의 편인 건 아니었다.
“85만 달러면 좀 과하긴 하네요.”
“빌보드 장르별 차트에 들었다곤 하지만, 사실 재즈 쪽이 워낙 신곡들이 많지 않으니 그것만으론 능력을 증명했다고 하기에도 좀 뭐하죠.”
“아더 레이블 대표의 유명세가 재즈에서도 통하리란 보장도 없고요.”
회의적인 의견들이 하나씩 얹어지자 매니지먼트 파트장의 표정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그리고 그때, 때마침 안쪽 문이 열리며 대표실에서 더블타임 대표가 걸어 나왔다.
“자네들 싸우라고 만든 회의실이 아닐 텐데.”
상석으로 다가선 그가 좌중을 천천히 훑었다. 그래 봐야 다섯 명. 잠깐이면 충분했다.
예전엔 이 두 배의 인원이 모였던 걸 생각하면 회사가 얼마나 작아졌는지 실감되는 부분이었다.
“논의가 잘 안 되나 보지?”
더블타임 대표가 자리에 앉자마자 밥에게 물었다.
“잘 안 된다기보단, 협상 중입니다. 서로 원하는 규모가 다르다 보니······.”
매니지먼트 파트장이 욕심이 과한 놈들끼리 맘이 맞으니 회사 기둥 뽑는 건 순식간이겠다며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그의 조소와 일주일간의 줄다리기가 무색하게 더블타임 대표는 툭 던지듯 결정을 내려버렸다.
“시간 더 끌지 말고, 이쯤에서 원하는 대로 해줘.”
“대표님!?”
매니지먼트 파트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른 파트장들의 눈도 놀란 듯 확 커졌다.
그리고 당사자인 밥조차도.
“새로운 재즈 스타가 탄생할 수 있다면, 그만한 투자는 할 법하지. 그리고 일주일 동안 그쪽도 꽤 양보했잖아?”
“대표님, 그 아시안이 성공한단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더 레이블 대표가 탐나시는 거면 차라리 저희 소속 뮤지션에게 프로듀싱을 맡기시는 게······.”
열을 끌어올리던 매니지먼트 파트장이 움찔했다. 대표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어서.
“그렇게 열 내지 말게. 지금 앨범 준비 중인 친구들 모두 홍보비로 80만 달러 이상 책정되지 않았나.”
“그건······.”
“크게 배팅하는 것도 아니고 소속 뮤지션들이랑 비슷하게 가는 거야. 밥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으니 일을 진행하고 있는 거고. 이게 자네가 계획한 일이었어도 이렇게 반대할 건가?”
매니지먼트 파트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뱉지 않고 도로 삼켰다. 더 흥분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대신 한층 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밥을 노려보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항상 저러시니, 다들 더 좋은 조건 찾아 떠나지.”
계단을 내려가던 매니지먼트 파트장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았다.
그 날선 말들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파트장들은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뒤따르던 밥이 멈춰섰다. 앞서던 그가 계단 아래 서서 자신을 노려보았기에.
“조 레닉도, 모비 하디도 다 이런 식으로 떠났어. 회사 먹여 살린 공으로 예산 탈탈 털어줘도 모자랄 판에 신인들 키우겠다고 동분서주하니 남고 싶겠나. 나 같아도 대형 레이블로 가버리지.”
밥도 지지 않았다.
“그들은 신인인 시절이 없었답니까?”
“누구든 그런 시절이 있지. 그렇다고 누구나 성공하는 건 아니고. 그러고 보니 내년 초에 계약이 끝나는 뮤지션들이 꽤 많아.”
그러면서 매니지먼트 파트장이 차갑게 덧붙였다. 날 선 조소는 덤이었다.
“남은 뮤지션들마저 다 떨어져 나가도, 너나 대표님이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보자고.”
*고작 4층짜리 건물을 내려왔을 뿐인데, 밥은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이번 일을 알게 된 뮤지션들이 그 돈을 차라리 자신들에게 투자했어야 한다며 불만을 품고, 내년에 우르르 레이블을 옮긴다면?
복잡해진 머리통을 얹고 비틀비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아내며 직원들 사이를 지나가는데, 그의 비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직원이 일어났다.
“파트장님. 아더 레이블 쪽에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기획팀이요? 아니면 장 대표님이요?”
“장 대표님이요.”
“알겠어요.”
밥이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비행기 모드를 풀자 그녀의 말대로 부재중 통화가 찍혀 있었다.
도톰한 엄지로 슥 밀어 전화를 다시 걸었다. 이윽고, 시끌시끌한 소리가 깔리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넘어온다.
“장 대표님, 전화하셨었다고요.”
-아, 네. 그렇···음, 그럼네요.
“식사 중이셨나 봐요?”
-하하, 네.
이어서 빨대를 쪽쪽 빠는 소리도 들려온다.
괜히 입꼬리를 늘어트리며 코끝을 찡그렸다.
‘팔자 좋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홍보비 늘려보겠다고 욕만 먹다 내려왔는데, 누구는 한가로이 점심이라니.
실상은 그렇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괜히 심술이 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식사 끝나시면 다시 전화 드릴까요?”
-아닙니다. 이거 다 먹고 레이블로 찾아가도 되는지 여쭤보려고 연락 드린 겁니다.
“네?”
-한 가지 조건이 추가되었으면 해서요.
“······또요?”
-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 드려야겠네요.
겨우겨우 홍보비를 늘려왔는데, 무슨 조건을 또?
강도라도 만난 듯한 얼굴로 되묻던 밥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레이블 상황상, 그가 이리로 오는 건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아, 레이블은 좀 그렇고요. 지금 어디세요?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먹는 것에 집중했다.
부드러운 빵 사이에 들어가 있는 도톰한 패티, 그리고 완벽한 써니사이드업의 계란까지. 노란 국물이 줄줄 흘러 고기와 빵을 적시고 있었다.
에그슬럿.
과거 빌 앨런과 녹음을 마치고 온 적이 있는 가게였다. 그때와 다름없이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오렌지 주스는 여전히 오렌지 향 따위 없이 달았다.
‘내일쯤엔 한국에 연락해야겠네.’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을 불러들여야 하니까. 그들이 준비를 해서 올 동안, 나는 뉴욕을 잠시 갔다 와야 할 것 같고······.
반 실내(?)라고 불릴 법한 건물 안에서 도로 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러다 수첩을 꺼내 들었다. 머릿속에 어느 정도 정리가 되니 글로 옮기긴 쉬웠다.
또 한참을 스케줄과 아이디어를 끄적거리다 보니 미국에선 익숙한 실루엣을 가진 남자가 건물로 들어왔다.
“오셨어요?”
“네, 대체 무슨 조건일까 무서워서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밥이 껄껄거리며 그에겐 다소 작아 보이는 의자에 앉는다.
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무서워하시진 않으셔도 됩니다. 가뜩이나 홍보비 문제로 팽팽한데 무리한 조건을 얹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거 다행이군요.”
“하나 드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그래서, 추가하신다는 조건이 뭔지 말씀해주세요.”
단호하게 고갤 젓는 밥을 보며 내가 끄덕였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빼곡해진 수첩을 내려다보며 손에 쥔 펜을 굴렸다.
무리한 조건이 아니라 예고했지만, 그럼에도 살짝 긴장한 듯 입술을 적시는 밥.
“피처링을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을 듣고는 그가 안도한 얼굴로 주억거렸다.
“휴. 그런 거라면, 매니지먼트 파트에 얘기해서······아.”
“왜 그러시죠?”
“아, 아닙니다. 제가 매니지먼트 파트장님과 얘길 해서 으뉴란 씨와 어울릴만한 괜찮은 뮤지션으로 한 번 엄선을······.”
뭔가 난감해 보이는 밥에게 내가 손을 저었다.
“아뇨, 피처링을 구해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생각하신 사람이 있으시군요?”
있었지. 근데, 그 사람이 먼저 제안을 해왔고.
“대표님 쪽 뮤지션인가요?”
“아닙니다.”
“이름이 뭐죠?”
“미셸이요.”
“소속은요?”
“1인 소속사예요.”
“아~1인 소속사로 활동하는 미셸······.”
늘어지던 말꼬리가 끊어지며 고개가 홱 올라왔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