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69화 (169/221)

169. 길과 방향 (4)

“어디와 논의 중이라고요?”

월드덕 레코드 채드 이사가 총괄하는 월드 퍼블리싱 팀. 그곳의 시니어 매니저(-과장급)가 올린 보고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황당한 표정으로.

“더블타임입니다.”

“더블타임이면······아트 디스트릭트에 있는?”

기억을 더듬는 채드의 물음에 매니저가 끄덕였다.

이윽고, 채드의 눈살이 사나워졌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프로듀서. 채드는 당연히 그가 오차드에게로 달려갔을 거라 예상했다.

자신의 뮤지션을 데뷔시키기 위해 읍소를 하든, 아양을 떨든 그러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거긴 왜······.”

되물으려던 채드의 머릿속에 기로 프로듀서가 은유란을 데뷔시키려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그 은유란이란 뮤지션이 재즈 장르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어정쩡하게 열려있던 그의 입술이 들썩이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설마, 자기 뮤지션 재즈 시켜주려고 거길 찾아간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더블타임이면 재즈 명문 레이블로 통하니까요.”

매니저가 말을 맺기 무섭게 채드가 차갑게 말했다.

“언제 적 얘길 하는 겁니까? 명문은 무슨···레코드판이나 떼다 팔면 딱 어울릴 것 같은 골동품 가게겠죠.”

“아, 그, 그렇죠. 지금은 제대로 된 뮤지션 하나 없는 그런 곳입니다.”

매니저가 재빨리 맞장구를 치며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채드는 굵직한 만년필을 집어 책상을 툭툭 쳤다.

“박차고 나갈 때 무슨 꿍꿍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멍청한 사람이었네? 우리 제안을 뿌리치고 간다는 게 고작 그런 곳이라니.”

과거를 학습한 매니저가 이번엔 빠르게 장단을 맞췄다.

“가뜩이나 비주류 장르인데, 거기서 홍보를 한다면 성적이 아주 처참할 겁니다. 앨범을 찍기라도 했다면 전단지 돌리듯 공짜로 돌리고 뭐라도 해볼 텐데, 디지털 싱글은 그마저도 안 되잖습니까.”

채드의 머리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애먼 돈만 쓰다가 다시 던컨에 집중하겠군요. 뭐, 던컨이라고 오래 갈까 싶지만요.”

지금이야 SNS나 뮤튜브를 통해 던컨의 인기가 삽시간에 번지고 있지만, 머지않아 그 기세는 한풀 꺾일 게 분명했다.

그때가 되면 화력을 이어갈 후속곡이 필요하겠지만······.

대부분의 반짝 스타들의 종점이 바로 그쯤이었다.

‘신선함이 모두 빠져버릴 테니까.’

덩달아 기로 프로듀서도 던컨처럼 잊혀질 테고 말이다.

그래서 몸값이 가장 오른 지금, 세비슨 너플러의 앨범 말석에 앉혀 작업하려고 했었던 채드였다.

뭐, 불발이 된 건 아쉽지만, 그깟 프로듀서 하나 못 잡았다고 문제 될 건 전혀 없었다.

자신이 맡은 팀의 작은 실적 하나가 누락 되었을 뿐이니까. 더 큰 거로 채워 넣으면 되었다.

우선 세비슨 너플러가 이번 앨범도 성공하도록 때깔 좋은 음원들을 공수하는 것부터.

“세비슨에게 프로듀서들 매칭한 건 어떻게 됐어요?”

기로 프로듀서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빌보드는 밥 먹듯이 들어가고 매년 그래미에도 노미네이트 되는 프로듀서들로 준비했다. 그렇기에 채드의 자신감은 탄탄했다.

매니저의 대답을 듣기 전까진.

“아, 저 그게······.”

미묘한 분위기에 채드가 매니저를 닦달하듯 지그시 보았고, 매니저는 아찔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부 마음에 안 든다고 거절···했습니다.”

“전부요?”

“네.”

“정상급 프로듀서들로 추려서 보낸 건데, 그런데도 깠다고요?”

끄덕여지는 매니저의 머리.

그 이유가 더 가관이었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데모가 들어오는 족족 별로라고 치워버린다고 합니다. 담당 매니저 말로는 뭔가에 확 꽂힌 것 같다고 하는데······자세한 얘긴 담당 매니저랑 만나 따로 얘기하기로 했습니다. 정확히 뭘 원하는지 확인한 다음에 바로 보고 하도록-.”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던 매니저가 입을 닫았다. 채드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게 자신 때문인 줄 안 매니저는 말을 삼키코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정작 채드는 그의 반응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젠장, 애초에 알려주는 게 아니었는데.’

오히려 스스로를 자책하며 얼굴을 굳혔다.

#웰컴 드링크. 손님이 왔을 때 반갑다는 의미로 작고 예쁜 잔에 따라서 주는 가벼운 술 말이다.

이거, 보통은 먹기에 가벼운 도수의 주류를 따라서 주지 않나? 샴페인처럼?

하지만 비버리힐즈에 위치한 저택. 미셸 루바니의 집은 달랐다.

웰컴 드링크라며 줬는데 입에 가져대자마자 뜨거운 느낌이 훅 들어와 경종을 울리듯 목젖을 쳐댔다. 술은 잘 모르지만, 한가진 확실하다. 이거 데낄라야.

“쿨럭.”

기침까지 해대자 방금 내가 마신 데낄라를 글라스로 음미하고 있던 미셸이 피식 웃었다.

“웰컴 드링크라 적게 준 건데, 보드카나 위스키가 더 나았을까요?”

뭐든 똑같았겠지.

투명한 유리 탁상에 잔을 내려놓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미셸의 옆을 지키던 남자가 가져온 물을 마셨다.

40대쯤 되어 보이는데?

목에 스며든 알콜을 세척 하면서 눈으론 그 남자를 힐끗 보았다. 그러자 미셸이 그를 소개했다.

“제 매니저예요.”

“아.”

“그리고 하나뿐인 남동생이기도 하고요.”

미셸의 말에 시선을 돌리니 남동생이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인다.

1인 소속사로 활동 중인 그녀의 매니저가 가족이란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회사나 사무실이 아닌 집으로 찾아오게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미셸을 보는데, 그녀가 푸근하게 웃으며 물어왔다.

“근데 LA에는 무슨 일로 왔나요? 깜짝 놀랐어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한 번 연락하려던 참이었거든요.”

미셸도 연락을 하려고 했다고?

의아함에 갸웃거리는데 미셸이 날보며 말을 이어갔다.

“제 앨범에 참여해주려는 건······아무래도 아닌 것 같고.”

“하하. 그게 제 얼굴에 쓰여있나요?”

“그렇다기보단, 그때 서울에서 했던 말 때문이죠. 지금은 자기 뮤지션들에게 집중하고 싶다고 했었죠? 그 모습이 너무 확고해서 이건 설득한다고 될 일이 아니구나 싶었거든요.”

내가 멋쩍게 웃으며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자 미셸도 웃는다. 어쩐지 안심한 것 같은 표정으로.

“묘하네요.”

“네?”

“변한 게 아니라 아쉬운데, 또 변했으면 좀 실망했을 것 같기도 해서요. 뭐, 늙은이의 변덕이라 생각하는 게 편할 거예요. 최근 들어 꽤 심해졌거든요. 좋았던 게 아니게 되고, 아니라고 생각했던 게 좋아지고.”

푸념에 가까운 그녀의 말에 나는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아마 그녀가 오랜 공백기를 깨고 나온 이유와도 연관이 있으리라.

갑자기 진중해진 분위기에 미셸이 괜한 말을 했다며 손사래를 쳤다.

“어쨌든 잘 왔어요. 정말 반갑네요. 서울에서 하고픈 얘기가 많았는데, 리허설에 유란 씨 무대도 보고 싶어 시간이 촉박했거든요.”

“그날, 유란 씨 무대를 보셨습니까?”

“그럼요. 영상으로만 봐서 궁금했었거든요.”

싱긋 웃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떠셨나요?”

불쑥 궁금해진 물음에.

“글쎄요, 어땠을 것 같나요?”

오히려 미셸이 질문을 던져왔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내가 여기로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이 대답을 아주 잘 해야겠다고. 그래야 내가 들고 온 제안이 제대로 먹히겠다고.

“···놀라셨을까요?”

“제가요?”

“네.”

“흐음, 유란 씨 노래의 어떤 점에 제가 놀라야 했죠?”

본인 뭘 보고 놀라야 했는지 묻는다. 언뜻 들으면 부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럼, 놀라지 않았나?

아니지. 그럴 리 없었다.

그녀가 내 대답에 기분이 언짢았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대답이 틀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히 그날 은유란의 모습은 미셸이 놀랄만했으니까.

훗날 미셸이 지향하게 되는 뉴 재즈와 똑 닮아 있었으니까.

“깊숙한 곳을 긁는 듯한 음색.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듯한 끈적한 리듬감. 느리지만 지루할 틈이 없는 스캣.”

“···?”

내가 나열한 것들에 미셸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어느 것 하나 은유란에 해당하는 건 없었으니까. 오히려.

“미셸의 시그니처로 유명한 것들이죠. 동시에 모든 재즈인들이 동경하고 지향점으로 삼는 지점이고요. 그리고······.”

미셸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유란 씨는 모든 게 정반댑니다.”

“···!”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들썩인다.

역시 맞나 보다. 놀란 게.

“그래서요?”

“만약 제가 미셸이었다면······나와 모든 게 정반대의 길을 간 노래가 저렇게 좋을 수도 있구나, 그거에 놀랐을 것 같습니다.”

내 대답에 미셸이 느릿하게 말했다.

“꽤······비슷하네요.”

옅게 웃고 있다.

하지만 대답이 좀 시원찮다.

뭔가 더 있는 것처럼.

이윽고, 글라스를 깨끗하게 비워낸 미셸이 말을 이어갔다.

“내게 공백기는 슬럼프였어요.”

나는 내심 놀랐다. 미셸에게 슬럼프라니. 그것도 오래전의 일이 아닌 불과 얼마 전의 이야기였다.

“문득 뭔가 변화해야 한다고 느꼈죠. 그래서 하나씩, 그리고 조금씩 바꿔봤어요. 근데 달라지는 건 없더군요. 재즈는 무료하고, 노래는 시시했죠. 제가 간과한 게 있었던 거죠.”

“···?”

“슬럼프가 왔을 땐, 찔끔찔끔 바꿔선 소용이 없다는 걸.”

미셸이 다시 글라스를 채웠다.

“모든 걸 비워내고 다시 채워 넣어야 했던 거죠. 옛날 버드(Bird)가 무대 위에서 망신을 당하고 수년 만에 전혀 다른 재즈를 들고 왔던 것처럼, ‘뉴 재즈’를 찾아야 하는 시기가 온 거예요.”

그리고 날 본다. 소름이 돋았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그녀는 지금 자신의 ‘뉴 재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신이 은유란의 어떤 점에 놀랐는지를 설명하면서 말이다.

설마······.

“저도 직접 보기 전까진 설마 설마 했어요. 그런데 그날 공연을 보니 확실해졌죠. 아직 다듬어질 구석이 많았지만, 그녀는 분명 내가 찾던 ‘뉴 재즈’에 가까운 재즈를 하고 있었어요.”

말을 마친 미셸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린다. 그리고 나는 가슴이 벌컥거려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극찬이었다. 40년간 재즈라는 한 우물만 판 거장이 한참 어린 후배에게 하는 평가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미셸이 은유란을 좋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라면······.’

내가 들고 온 제안이 미셸에게 먹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입을 달싹였다. 지금이 타이밍이다 싶어서.

그런데, 글라스를 기울이던 미셸이 불쑥 내게 물었다.

“유란 씨의 신곡 작업은 언제쯤 시작되나요?”

“네? 아, 그게······.”

“혹시, 벌써 진행 중인 건가요?”

내가 얼른 고갤 저었다.

“아닙니다. 준비 중에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네?”

뭐가 다행이란 걸까.

나는 되물었고.

이윽고 들려오는 그녀의 대답에 그대로 벙쪄버렸다.

“유란 씨 신곡에 제 목소릴 얹고 싶어요.”

“······그 얘긴, 피처링을 얘기하시는 건가요?”

“네, 제가 참여할 자리가 있을까요?”

내가 들고 온 제안을, 그녀가 먼저 제안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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