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68화 (168/221)

168. 길과 방향 (3)

벽지 대신 레코드판들이 벽면을 가득 채운 사무실.

펜던트 등 하나가 책상 위만 간신히 밝혔고, 벌어진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각진 햇빛이 떠다니는 먼지를 비추고 있었다.

더블타임의 퍼블리싱 파트장인 밥 샤이더의 사무실이었다.

밥 샤이더가 커피를 건넸다. 솥뚜껑만 한 손에 들려있던 컵이 내 손으로 건너오자 더 이상 에스프레소 잔처럼 보이지 않는다.

‘옆에 있으면 비스트로가 표준으로 보이겠는걸?’

거구의 흑인 남자, 밥을 보며 그런 생각을 이어가는데, 그가 빠글빠글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대표님이 오신다고 해서 급하게 사 온 원두라 맛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의자에 엉덩이가 간신히 들어간 모양새로 내 잔을 뚫어져라, 보는 밥. 얼른 잡숴보라는 눈빛이길래 하는 수 없이 잔을 도로 들어 올렸다.

“오, 맛있네요.”

“하하,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제가 평소에 커피를 잘 마시지 않아 직원 추천을 받았거든요!”

음······.

차마 그 직원이 흙을 커피라 속여 판 것 같다는 말은 못 하고, 사 온 사람 성의를 생각해 한 모금 더 입에 밀어 넣고 내려놨다. 텁텁해 죽겠네.

이에 안심한 듯 히죽 웃은 밥이 그제야 책상에서 가져온 파일을 펼치며 목을 가다듬었다.

뭔가 비장한데?

“으뉴···으뉴···.”

“···?”

“으뉴란.”

가까스로 세 음절을 따라 읽은 밥이 내 눈치를 본다. 나는 옅게 웃으며 끄덕였다.

“네, 맞아요. 은유란 씨요.”

“하핫, 제 발음이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나 봅니다. 아무튼, 저흰 으뉴란 씨를 빌보드 장르별 차트에 이름을 올렸을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음색이면 음색, 성량이면 성량. 모든 게 자신의 노래와 정말 잘 맞는다고 생각했었죠.”

그러면서 그가 파일을 슥 밀었다.

거기엔 은유란에 대해 알아본 흔적들이 있었다.

“그땐 아직 퍼블리싱 파트장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일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쌓여있는 일들부터 처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대표님이 티비 쇼에 나오기 시작하시더군요. 유명세를 얻으시고, 뒤이어 던컨까지 대박이 났죠.”

자신의 시점으로 시간을 나열하던 밥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차 싶더라고요. 뭐랄까······한정판 LP를 살 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그 사이 경매가가 뛰어버린 느낌이었죠.

대표님이 유명해지시고, 던컨이 흥행할수록. 대표님의 뮤지션들에게도 슬슬 좋은 조건으로 연락이 갈 테니까요.”

좋은 조건이 오긴 왔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쪽이 아닌, 엉뚱한 쪽으로 왔지. 그래서 엎어졌고.

재즈 불모지에 파묻혀있는 은유란을 수면 위로 올리려는 나에겐 사실 그렇게 좋은 조건이라 할 수도 없었다.

내가 주억거리며 듣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면 더블타임은 은유란 씨에 관심이 있다는 거죠?”

말 바꾸는 거에 PTSD라도 생긴 건지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야 얘길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밥은 당연하다는 듯 활짝 웃었다.

“그럼요! 애초에 제안서부터가 그거였는 걸요.”

격하게 끄덕이는 그를 보며 이 정도면 절반은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나머지 절반이지.’

*아더 레이블은 은유란의 프로듀싱을 맡고.

더블타임 레이블은 그 앨범을 유통하고, 홍보한다.

이 간단한 계약에도 수많은 조건들이 맞물려야 했다. 그래야 계약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서로의 조건을 말하면서 아쉬운 부분들이 툭툭 걸렸다.

더블타임이 재즈 명문 레이블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재즈에 깊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아는 얘기.

소니라는 국제적인 기업을 두고 있는 오차드나,

금융사의 돈줄을 이어받은 월드덕 레코드와는 제안의 규모가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TKM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더 앉아 있을 필요도 없었겠는걸.’

리스크의 총량은 같은데, 그만큼 더블타임이 짊어질 수 있는 리스크가 크지 않았다.

이들이 몸을 사리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레이블의 규모가 그렇게 되지 못할 뿐.

월드덕 레코드를 기준으로 준비했던 모든 내용들이 밭 갈 듯 모두 갈려 나갔다.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다시 두드려진다.

디지털 싱글이기에 앨범 수십 만장 찍을 비용은 아낄 수 있었지만, 그게 무색하게 돈 들어갈 구석이 솟아났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홍보.

더블타임은 5억을 얘기했다. 우리가 생각했던 15억에 비하면 3분의 1토막이 난 숫자. 이것도 상황에 따라 줄어들 수도 있다고 하니 고민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재즈라는 비주류 장르가. 뭐 하나 홍보하기 너무나 넓은 미국 땅에서, 최소한의 홍보로 입소문을 타고 성공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턱도 없겠는데요? 너무 적어요.

미팅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한국으로 전화를 했고, 미팅 내용에 대한 대답이 들려왔다.

주재윤이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것도 처음인 것 같지.

“그렇죠?”

-네, 안 그래도 지금 PDF로 받아서 검토 중인데, 이거 이도 저도 안 될 가능성이 있겠어요. 확실히 리스크가 확 커지네요.

“그래서 더블타임 쪽도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 않는 얼굴이더라고요. 제 표정 때문에 그랬는진 모르겠지만요.”

-그런 것 치곤 미팅이 꽤 기셨는데요?

“그 외의 얘길 좀 많이 했네요. 재즈에 대해서, 유란 씨에 대해서···.”

내 대답에 불쑥 주재윤이 물었다.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더블타임이요?”

-네.

내가 잠시 고민하다 끄덕였다.

“단순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명문 레이블이라 불리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밥만 해도 퍼블리싱 파트장이란 직책을 떠나 재즈가 다시 부흥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새로운 재즈 뮤지션들이 계속 대중들을 흔들어야 한다고 말했지. 그래서 은유란에게도 관심을 가진 거고.

은유란에 대해서도 꽤 자세히 분석한 듯 그녀의 음색이나 스캣에 대해 얘길 쏟았다.

그런 그의 얘길 들으면서 내심 생각했다.

월드덕과는 달리 은유란의 진면목을 알아본 이들이잖나.

홍보 비용은 변변치 않더라도, 제대로 된 홍보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내 얘길 들은 주재윤은 단호했다.

-피디님이 뭘 말 하시는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홍보 쪽이 너무 약해요. 계획했던 것과 어느 정도 차이가 나야 한 번 믿어 볼 만할 텐데 말이죠. 설사 TKM에서 더 큰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비용을 떠나서, 더블타임 레이블에게 부족한 건 빈약한 인프라도 있으니까요.“

주재윤의 말에 살짝 답답해져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역시 계획을 새로 세워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주재윤이 말을 이었다.

-갑자기 더블타임 레이블이 떠들썩해져서 덩달아 유란 씨까지 저절로 홍보가 된다면 모를까요. 근데 사실 걸어다가 돈 떨어지길 바라는 거나 마찬가지라······.

#이후에도 나는 더블타임 레이블과의 미팅을 두 번 정도 더 진행했다. 그 사이, 밥은 따로 월드 TKM의 기획팀과 연락하며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갔고.

양보할 수 없거나, 힘든 부분들이 있었지만 은유란이란 공동의 목적이 있었기에 꽤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내용이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위태위태한 외줄 타기 같았지만.

그렇게 회사 간의 의견을 개미 땅 따먹듯 좁히는 동안.

나는 틈틈이 레드리시의 합주실을 방문해 그들의 곡 작업을 도왔다.

레드리시가 완성시킨 멜로디는 내 마음에도 쏙 들어 건들 게 없었다. 대신 편곡을 중점적으로 점검했다.

가장 우선적인 장르 선정과 보컬 톤에 따른 다이내믹부터, 디테일한 편곡 방향까지.

항상 편곡에서 가장 고민되는 부분이 악기를 얼마나 집어넣을지였는데, 밴드라는 레드리시의 특성상 애초에 하우스밴드에 가깝게 악기군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후에 건반을 도울 패드나, 스트링. FX 같은 효과음들 믹싱 전에 추가 되겠지만 그건 턴투더 레이블에 전담팀이 있으니 크게 신경쓸 필요 없었고.

나는 딱 이 단계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것들을 훑어주었다.

“특히나 이 곡은 다이내믹이 확실한 쪽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다른 곡들에 비해 고음 부분이 가장 강렬해서 타이틀로 쓰기에도 적합할 것 같네요.”

“이 곡은 기타 리프 하나로만 쭉 가는 건 어때요? 건반은 코드 정도 짚어주고, 드럼도 잔잔하게. 다이내믹은 오로지 보컬로만 만들어 보는 거죠.”

“그다음 곡은, 지금까지 정직하게 갔으니 좀 꼬아 볼까요? 사비 뒤에 항상 간주를 붙여서 일렉트로닉 장르의 드랍처럼······.”

그렇게 마지막 곡까지 점검을 마치고.

레드리시와 둘러앉아 샌드위치 포장을 뜯었다.

옆에서 유지은과 이병국이 베이컨의 유무로 투덕거리는 동안, 기성운이 내게 슬쩍 물어왔다.

“미팅은 잘 진행되고 계신 거예요?”

크게 한입 베어 물고 우물거리다 끄덕였다.

“나름···그런 것 같네요.”

이러다 갑자기 안 맞는 조건이 나타나 별안간 엎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다행이라며 끄덕이는 기성운을 보다가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레드리시가 미국에서 잘 된 이유가 뭘 거 같아요?”

그러자 유지은이 냉큼 대답한다.

“피디님!”

“······그거 말고요.”

“사장 놈?”

“······.”

역시 진지하게 고민해주는 건 기성운 밖에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기성운이 넌지시 말했다.

“아무래도 턴투더 레이블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그런가···.

“레이블의 인지도가 중요하긴 하죠.”

내 말에 기성운이 주억거린다. 그러면서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얘길 이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죠. 앤 더글라스라는 페스티벌의 제왕이 있는 곳이니까요.”

*실제로 레드리시가 첫 투어를 돌 때, 턴투더 레이블 소속 밴드는 믿고 듣는다는 여론이 존재했다.

그건 레이블의 인지도 덕분도 있었지만, 페스티벌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앤 더글라스가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앤이 한국 공연을 갔다가 관심을 보이고 직접 컨택한 밴드라는 기사들이 퍼지며 레드리시가 앤의 후계자처럼 둔갑 되어 그 덕을 톡톡히 본 것도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기성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블타임엔 그런 뮤지션이 없지.’

아닌 게 아니라, 앤 더글라스의 인지도에 비하면 그 반의반에 미치는 뮤지션조차 없었다.

그나마 유명세가 있던 재즈 뮤지션들 조차도 최근 재계약에서 대형 레이블들에게 모두 빼앗겼다고.

“피디님도 같이 쳐요!”

밴드에서 포켓볼로 종목을 옮긴 레드리시에게 손사래를 쳐주고,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언젠가 받았던 번호.

끈적한 스탠다드 재즈가 연결음으로 울리고, 이내 응답이 넘어왔다.

-기로 프로듀서님? 깜짝 놀라서 제 눈을 의심했네요.

전화상으로 들어도 여지없이 소름이 돋는 목소리.

마른 침을 삼키며 지금 LA 어딘가에 있을 살아있는 전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어요, 미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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