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길과 방향 (2)
월드덕 레코드사의 1층 로비로 내려가자 중앙에 놓인 커다란 소파에서 론 스미스가 일어났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터라 반가운 얼굴로 다가섰다.
“오랜만이네요.”
그러자, 론이 괜히 퉁퉁거린다.
“난 아냐. 최근에 TV에서 너무 많이 봤어.”
“그래서 팬심이 사라진 겁니까?”
“그런 건 아닌데, 나만 알고 있던 걸 모두가 알게 되면 섭섭한 감정이랄까?”
“트위터로 그렇게 홍보를 해줘 놓고요?”
“내가 원래 변덕이 심한 편이지.”
킬킬대는 론 스미스를 보며 따라 웃었다.
우리는 월드덕 레코드사 건물을 빠져나와 LA 도심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까지 테이크아웃해서.
궁금해하는 론 스미스를 위해 미팅 내용을 간략하게 풀었다. 얘길 듣는 내내 불편한 듯 끙끙거리던 론 스미스는 결국 욕지기를 내뱉으며 빈 테이크아웃 잔을 구겼다.
“젠장. 어째 미하엘 이 양반이 내 연락을 피하더라니. 일이 그렇게 진행됐군. 내가 대신 사과하지.”
“월드덕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녜요.”
던컨의 성공이 나와 레이블의 역량을 어느 정도 증명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리스크가 커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유재완 대표에게 지원 약속까지 받아 왔던 거고.
물론 그것마저 무색하게 단칼에 까였지만.
“채드, 그놈은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앞에선 젠틀한 척, 이성적인 척 다하면서 뒤에선 제 성과와 이익만 생각하는 놈이라니까? 이번에도 던컨의 인기를 이끌어낸 자네의 인지도만 쏙 빼먹겠다는 의도였잖아?”
한참 험담을 하다가 갑자기 씩 웃는 론.
“물론 세비슨 너플러라는 카드가 안 먹힐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만.”
“당황하는 것 같긴 하더라고요.”
“그건 좀 쌤통이야. 근데, 신기하단 말이지?”
“뭐가요?”
“솔직히 나도 자네 입장이었으면 솔깃했을 거야.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잖아? 세비슨 정도면.”
세비슨 정도······.
문득 쓰레기통이 보이길래 빈 잔을 버리며 말했다.
“다이아 도끼도 거절했는데, 은도끼 받아서 뭐해요. 그냥 둘 다 내 거 아니라 생각하고 내 사람한테 집중하려고요. 또 모르죠, 착하다고 행운을 줄지.”
아닌가, 착하다고 둘 다 주는 건가?
론 스미스가 아리송한 눈빛으로 쳐다보길래 한국인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조크라며 얼버무렸다.
미국인들 특유의 제스처로 으쓱거리던 론 스미스가 빌딩 숲 사이로 뾰족하게 솟아있는 월드덕 레코드사를 보며 툴툴거린다.
“나도 계약 끝나면 회사 옮겨버려야겠어. 돈 많이 주길래 왔더니 아주 지들 멋대로야.”
“론 정도면 하나 차리는 건 어때요?”
“레이블을? 일 없어. 차라리 자네가 미국에 하나 차려줘. 내가 들어갈 테니.”
“돈 없는데요?”
“괜찮아. 그건 내가 많으니까. 그리고 자네에겐 배울 점이 많잖아?”
진심인 듯 진지한 눈빛에 멋쩍게 웃으며 고갤 내저었다.
“론은 절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요. 절 만나기 전부터 그랬었죠.”
“글쎄, 네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겸손이 동양의 미덕인 건 알지만 그게 과하면 오히려 역효과라고. 빌보드에 네 번이나 이름을 올린 프로듀서가 그따위 말을 하고 있으면 어떻겠어?”
밥맛이겠지.
그럼에도 나는 이런 문제에서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10년이란 시간이 되감긴 것도, 그동안 멜로디가 날 도와준 것도 사실이잖나.
게다가 내 실력이 비약적으로 올라간 것도 어떻게 보면 멜로디가 들린 덕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뭔가 치트키를 쓰고 여기까지 온 느낌이랄까.
이제는 멜로디에서 꽤나 자유로워진 상태지만 그럼에도 아직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
휘적휘적 걷다가 다운타운 중심부에 위치한 퍼싱 스퀘어에 다다라서 론이 내게 슬쩍 물어왔다.
“아무튼, 이제 어떡하려고?”
“요즘 LP 모으는 취미가 생겨서, 근처에 앨범 매장이나 좀 들려볼까 해요.”
이에 론이 헛웃음을 짓는다.
“미팅에서 까였는데 한가로이 앨범 매장 투어를 하는 대표라. 자네 회사 들어가는 건 고민을 좀 더 해봐야겠네.”
“고용하겠다고도 안 했는데요?”
“나 참, 어떻게 팬을 이렇게 대하나. 됐고, 앞으로 어떡할지나 얘기해봐.”
공원 쪽을 보며 실없이 웃던 론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짐짓 진지한 얼굴로.
“플랜 B라도 있는 거야?”
#내 책장에 꽂아둘(-아직 턴테이블이 없으니) LP를 몇 개 샀다.
은유란에게 줄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의 The Art of Duo 앨범도 눈에 띄어 쇼핑백에 넣었다.
골든 보이스 주최의 슈퍼 페스티벌에서 앤 더글라스 바로 밑에 큼직하게 들어가 있는 레드리시의 이름을 찾아 사진을 찍기도 하고, 매장 구석에 무더기로 쌓아놓고 판매되고 있는 던컨의 브로마이드도 구경했다.
그러다 옆에서 고심하고 있는 팬에게 정체를 들켜 사진도 찍었지.
할 일 없다며 함께 온 론은 세상 부러운 눈빛을 쏘아댔다. 이 양반도 태생이 관종이라.
그렇게 호텔로 돌아와 레이블 직원들과 연락을 하고, 잠시 쉬다가 레드리시와의 약속을 위해 다시 거리로 나섰다.
알려준 위치로 가니 입구부터 호화스러운 레스토랑이었다.
LA이 다운타운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복도를 지나 프라이빗하게 칸칸이 나눠진 공간으로 안내를 받았다.
광원이 보이지 않는 간접 조명들로 꾸며진, 너무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공간.
반짝반짝 광택을 뿜어내는 가격대가 상당해 보이는 식기들. 어딘가에 숨겨진 스피커에서 잔잔히 흘러나오는 음악.
‘여기가 맞는 거야?’
의뭉스레 걸어 들어가는데, 장소와는 맞지 않게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온다.
맞나 보네.
테이블로 다가서자 레드리시 멤버들의 고개가 홱, 하고 내 쪽을 향했다.
“일찍 오셨네요?”
“미팅이 너무 일찍 끝나버려서 좀 쉬다 왔어요.”
“미팅이 일찍 끝날 줄 알았으면, 만나서 같이 올 걸 그랬네요.”
일찍 끝났다기보단, 엎어졌지.
기성운의 말에 이병국이 옆에서 너스레를 떤다.
“난 금방 끝날 줄 알았어. 피디님이 또 음악만큼 협상도 잘하시잖아?”
응, 아니야. 엎어진 거야.
뒤이어 유지은도 한마디 거든다.
“이제 레이블 뮤지션들의 이름이 점점 더 미국에 알려지겠네요.”
살짝 들뜬 말투였다.
“그럼 피디님도 미국 자주 오실 테고. 그지?”
이병국의 말에 유지은이 키득거렸다.
나도 옅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후배들 오면, 미국 진출 선배로서 조언 많이 해줘요.”
“당연하죠! 제가 또 그런 거···.”
“못하지. 유지은이 조언이라니.”
“디지고 싶냐.”
오늘도 인간 샌드백을 자처하는 이병국을 보며 내가 말했다.
“그나저나 한국 팬들도 이번 앨범 엄청 기다리던데요?”
내 말에 테이블 밑으로 꼬집기를 시전하던 유지은이 얼른 끄덕였다. 옆에서 허물어지는 이병국이 보인다.
“그러니까요. 한국에 있을 땐, 허구한 날 밴드 불모지라고 궁시렁댔는데. 이젠 한국 좀 가고 싶어요.”
“얼른 와요. 팬들도 좋아할 거예요.”
“그럼 뭐해요. 가짜 사장놈이 아직 한국 가긴 이르다고 방해하는데.”
“가짜 사장놈?”
갸웃거리자 기성운이 설명해줬다.
“브랜이요.”
“아하? 그럼 진짜 사장놈은······.”
“피디님죠, 헤헤.”
실실거리는 유지은을 보며 내가 머릴 긁적였다.
“다음에 헤일리 만나면 말해줘야겠네요. 레드리시가 날 그렇게 부르더라고.”
농담 따먹기를 하며 웃다 보니 어느새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우리는 그걸 배에 꽉꽉 채워 넣었고.
이후에 와인도 한 잔씩 들어가고 나서부턴, 자연스레 어제 못다 한 레드리시의 미국 스토리를 듣게 되었다.
바다 건너에선 비단길을 달리는 것처럼만 보였는데, 막상 들어보니 고생길이 따로 없었다.
끈덕지게 따라다니던 은근한 차별부터, 관객들의 야유까지. 그걸 모두 버틴 지금의 레드리시가 유쾌하게 지난 일들을 풀어냈다.
“미안해요.”
예정된 미국 진출이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내가 등 떠밀어 가게 된 거니까.
차라리 지금 상황이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그땐 내가 급했다. 혹시라도 미래와 어긋날까 봐.
그러나 레드리시는 단호히 고갤 저었다.
“피디님이 미안해하면 어떡해요. 우린 항상 고마워하고 있는데.”
“맞아요. 차별이건 야유건 한국에서도 충분히 겪었던 것들인데요, 뭘.”
“여기선 턴투더 레이블과 골든 보이스가 제대로 지원을 해줘서 오히려 훨씬 나았죠. 그리고 결국 성공했잖아요?”
저런 얘길 들으며 술을 마시니 술이 달다.
와인이라 원래 단 건가?
잔 위쪽으로 몰리는 포도 향을 맡으며 물었다.
“그래서, 이번 앨범 준비는 잘 돼 가요?”
“그럼요! 예전의 저희가 아닙니다!”
“예전 같지 않다니, 다행이네요. 10분짜리 곡은 없겠어요.”
“앗, 그건 흑역사······.”
벌게진 얼굴로 민망해하는 이병국.
옆에서 자작하게 남은 와인 잔을 툭 털어 넣은 유지은이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2차는 저희 합주실로 가는 거 어때요? 가서 새로 만든 곡들 들려드릴게요!”
이병국도 맞장구를 친다.
“오, 그거 좋다. 안 그래도 불안했는데.”
“자신만만하던 게 어떻게 1분을 안 가요?”
빈 접시만 남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곧장 레드리시의 합주실로 향했다. 사진으로 몇 번 보긴 했는데, 실제로 가보는 건 처음이다.
고급 빌라 꼭대기에 인더스트리얼하게 꾸며진 합주실. 아래 두 층이 전부 그들 숙소라 소음문제는 전혀 없단다.
그나저나, 무슨 합주실에 포켓볼 다이가 있어?
널찍한 합주실을 휘둥그레져 구경하는데 기성운이 냉장고에서 병맥주를 잔뜩 꺼내온다. 한 병 집어 들어 침대인지 소파인지 모를 곳에 앉았다.
‘완전 vip 좌석이네.’
붉은색 카펫 위에 세팅된 악기들 앞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는 레드리시.
흐뭇한 마음으로 그들의 공연을 기다렸다.
조율이 끝난 유지은이 페달을 탁, 밟으며 톤을 바꾼다. 그리고 곧바로 노래가 시작되었다.
-!
꽉 닫힌 통유리창들. 그런데도 어디 하나 활짝 열린 것처럼 시원하다.
유지은의 입에서 밀려 나온 목소리가 단단하게 공간을 채운다. 고음은 머리를 곤두세우고, 저음은 가슴 아래를 두드린다.
멜로디는 변하지 않았을지언정, 실력까지 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모든 게 코첼라 때와는 또 달랐다. 게다가 도약한 만큼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멜로디까지.
지금 당장 이 멜로디가 멤버들 중 누군가에게 들려도 전혀 놀라지 않을 정도로.
한 곡, 한 곡이 모두 레드리시다웠다.
#2집에 수록될 곡들을 연달아 듣고 나서,
레드리시와 새 앨범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아쉬운 편곡에 대해서 의견을 던져보기도 하고, 즉석에서 고쳐보기도 하며 광란의 파티를 하듯, 음학(音學)을 했다.
결국, 나는 자정을 넘겨서야 호텔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천천히 걸어오다 보니 술기운은 거진 날아가 있었고, 아직도 레드리시와 했던 작업들의 흥은 날아가지 않아 들떠 있었다.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후다닥 씻고 침대에 반쯤 누워, 월드 TKM 윤 이사가 보내온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장 대표, 더블타임 레이블에 답신을 보냈어. 그쪽에선 당장이라도 볼 수 있다는데, 오늘 레드리시랑 시간을 보낸다고 했던 게 생각나 내일 오후로 얘기해뒀어. 자세한 건 번호 남길 테니 내일 오전에 이 사람에게 연락해봐. 더블타임 파트장, 밥 샤이더. 213-······]
감사하단 답장을 보내자 그 말을 고민하느라 이렇게 답장을 늦게 줬냐는 농담이 돌아온다.
피식 웃으며 이모티콘 하나 보내놓고, 핸드폰을 옆에 내려놨다. 그리고 창가 쪽 테이블에 어제부터 올려져 있던 노트북을 끌어왔다.
화면이 켜지며 어제 확인했던 월드덕 레코드사의 레퍼런스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나는 커서를 움직여 창을 닫았다.
그리고 새로운 창을 띄우며.
[더블타임 레이블 관련 레퍼런스]
터치패드를 쭉쭉 밀어 올린다.
혹시 몰라 정리해둔 자료들을 미끄러지듯 읽어내려갔다. 밤을 지새우고, 기어이 날이 밝을 때까지.
한참을 내달리던 스크롤이 화면 끄트머리에 걸려 멈췄을 때.
나는 노트북을 경쾌하게 덮고, 핸드폰이 있는 침대맡으로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