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길과 방향 (1)
“웬일로 이 시간에 작업실에 있어?”
정장 차림의 백인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꽂고서 천천히 걸어왔다.
월드덕 레코드의 이사직을 맡고있는 채드.
며칠 전, 월드덕 회의실에서 기로 프로듀서를 세비슨 너플러의 앨범에 참여시키자고 제안했던 젊은 임원이 바로 그였다.
그의 등장에 아날로그 믹서 앞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리던 백인 여자, 세비슨 너플러가 피식 웃었다.
“곡들이 좀 들어왔다길래, 확인차 왔어요.”
“그래서, 괜찮은 곡은 있고?”
남는 의자에 앉는 채드를 보며 세비슨이 입을 삐죽였다.
“그닥이에요. 내 목소리도 모르고 작업을 한 건지, 애초에 만들어뒀던 골동품 같은 노랠 꺼내서 보낸 건지 전부 형편없네요.”
“유명한 작곡가의 곡들만 받으면 그런 문젠 없을 텐데 말이지.”
이에 세비슨이 단호하게 고갤 저었다.
“그러면 퀄리티는 모두 괜찮지만, 작곡가만의 색깔이 너무 강해서 이거 누구 노래네, 하고 단번에 알아차릴걸요?”
채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으쓱였고, 세비슨도 설득할 마음은 없는지 말을 돌렸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채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프로듀서 한 명을 추천할까 해서.”
“프로듀서? 누군데요?”
관심을 보이는 세비슨에게 채드가 슬쩍 얘길 꺼냈다.
어차피 세비슨만 동의한다면, 상대방이야 옳다구나 군침 흘리며 달려들 테니까.
“기로라고 알아? 요즘 꽤 유명해진 한국의 프로듀서인데.”
#LA 공항에 내려앉은 비행기가 어정쩡한 공터에 멈춰 서서 계단을 내렸다. 마침 사람으로 가득 찬 버스가 슥 문을 닫고 공항 쪽으로 움직인다.
인천공항에선 캐리어를 기다렸는데, 이번엔 버스구나.
잠자코 기다리는 동안에도 몇몇 사람들이 날 알아봤다. 단번에 누구다! 한 건 아니고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혹시?’라고 묻는다.
‘아무래도 마스크를 써야겠네.’
기내에 가지고 탄 가방에서 주섬주섬 마스크를 꺼내는데, 공항버스가 도착했다.
공항으로 이동해 입국심사를 마치고 캐리어를 찾아 게이트로 나서려는데, 언뜻 보이는 모습에 다시 들어갈까 고민했다.
“피디니이이임!”
저 멀리서 소리 지르는데, 어째 옆 사람 통화 소리보다 가깝게 들린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공항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유지은을 필두로 손을 흔들고 있는 이병국과 기성운. 레드리시였다.
‘저래도 되는 거야?’
나름 마스크에 모자까지 썼지만, 한국어에 저 목소리로, 저렇게 고음까지 내지르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설상가상 올림픽 단거리 선수들이 선보이는 스프린트 자세를 취하는 유지은을 보며 내 입국을 괜히 알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트를 끊고 뛰어오려는 순간, 이병국이 붙들고 말려서 참 다행이지.
“오랜만입니다, 피디님.”
기성운이 밝은 얼굴로 다가와 인사했다.
“인상이 많이 밝아졌네요?”
“하하, 피부가 밝아졌어요. 지은이 따라 관리를 좀 받았더니.”
“거기 저도 좀 가야겠네요.”
“피디님이요?”
“네, 누가 저보고 얼굴에 유려한 선이 흐른다는데, 그것 좀 진하게 만들 방법이 없나 해서요.”
기성운과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아 쫌 놔바! 니가 뭔데 내 허그를 방해해! 여기 아메리카라고!”
“우린 한국인이야.”
아직도 이병국에게 잡혀 바둥대는 유지은.
시선을 돌리자 이병국이 힘겹게 웃었다.
“하하, 제가 지금 피디님을 지키느라 인사가 좀 예의 없어도······.”
“결코, 예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힘내주세요.”
“푸흐, 넵.”
“아 왜!!”
유지은이 포효했다.
그 덕에 우릴 알아보는 이들이 생겨 황급히 공항을 탈출해야 했고.
*“얼른 성공해서 피디님한테 꼭 가겠다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피디님이 먼저 왔네요.”
유지은이 가운데 자리에 낑겨 앉은 이병국을 밀쳐내며 말했다.
“하하, 그러게···.”
“이 제 야.”
“···요.”
“어떻게 기다리란다고 진짜 기다리고 있어요? 아, 이병국 너 머리 너무 커, 치워 봐.”
“갑자기 왜 내 머리 기를 죽이고 그래.”
“피디님한테 따지는 중인데 피디님이 안 보이잖아.”
“아깐 허그한다고 난리더니 이제 피디님 혼내려고?”
“허그로 혼내주려고 했거든?”
정신없네, 진짜.
귓가가 왱왱거리는데, 입꼬리는 올라간다.
이게 레드리시지.
정말 오래간만인 이 분위기가 어디 나사 하나 빠진 듯, 싶으면서도 유쾌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고생 많으셨겠어요.”
운전대를 잡고 있는 턴투더 레이블 직원에게 말했다.
앤 더글라스의 내한 공연에도 함께 왔었던, 한국말을 꽤 할 줄 알았던 그 직원이다.
지금은 레드리시의 매니저이고.
“하하하······.”
레드리시의 매니저가 되고 한국말을 잃었는지 처연한 웃음소리만 들려왔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LA 시내였다.
숙소로 예약해 둔 호텔 앞에 내려, 짐부터 풀고서 레드리시와 함께 밥부터 해결했다. 포크를 내려놓자 어느새 밖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캔맥주 사서 피디님 방에서···!”
“피디님 쉬셔야지. 내일 미팅이신데.”
“그니까. 지은아, 얼른 가자.”
“그치만 이게 얼마 만인데······.”
국수에 담긴 숙주마냥 풀이 팍 죽은 유지은에게 내가 말했다.
“우리 내일 마시죠. 레드리시의 활약을 더 듣고 싶은데 요거 밥 먹는 시간으론 턱도 없었네.”
“진짜죠?”
“네. 진짜 듣고 싶어요. 그동안 레드리시가 어땠는지.”
“오케이,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금세 풀려선 발랄해진 유지은이 은근슬쩍 허그를 하려다 멤버들에게 끌려 사라지고,
나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호텔 방으로 올라왔다.
편안해진 마음.
고급 호텔 특유의 조도와 습도.
‘일하기 딱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혀서.
어쩌겠나. 아직도 과거의 갈증이 다 채워지지 못했는지 여전히 음악이 즐겁고, 좋은데.
내 뮤지션들과 함께라면 더욱더.
침대 옆 테이블에 노트북을 펼쳐두고 생수 한 병을 꺼내왔다. 달고 짠 미국 음식에 절여진 혀를 물로 적셔가며 모아놨던 월드덕 레코드의 레퍼런스를 쭉 훑었다.
‘좋네.’
‘좋은걸?’
‘이건 진짜 대단하네!’
거를 타선이 없었다. 좋은 곡들 투성이랄까. 특히 세비슨 너플러, 랜스 맥쉐인 등을 필두로 한 팝 장르에선 더욱이 강세를 보였다.
‘팝을 낳는 오리’라는 말이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란 거지.
그렇게 연신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도 차곡차곡 쌓였다.
미국에서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선 큰 자본력과 넓은 발이 필요해 회의 끝에 결정한 월드덕이지만.
월드덕은 재즈를 낳는 오리가 아니었다. 심지어 스탠다드한 정통 재즈를 손댄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
그런, 그들이 은유란을 제대로 서포트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어떻게 그들을 핸들링할 수 있을까?
고민이 길어졌다. 늦은 밤까지 호텔방 안을 서성이다,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침대에 누웠다. 잠깐 눈을 붙이자 곧, 한 거 없이 알람이 울렸고, 어제의 여파인지 꽤 피곤한 상태로 몸이 일으켜졌다. 비척대며 샤워를 하고 어젯밤에 미리 걸어둔 단정한 정장을 입고나니 한결 머리가 맑아진다.
거울에 비친 멀끔한 모습을 슥슥 훑어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일부러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기에 천천히 걸어가도 충분했다.
핸드폰이 알려주는 곳으로 들어가 카운터 쪽으로 다가서자 직원이 싱긋 웃는다. 그리고 미리 내용을 전달받았는지 물 흐르듯 나를 어떤 사무실로 안내했다.
고층. 복도 끝.
‘임원급은 되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직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에 채드 이사님이 계신다며 문을 열어젖혔다.
‘저 사람이 채드 이사.’
백인이라 나이를 쉽사리 짐작하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꽤나 젊어 보였다. 이사라는 직책을 생각하면 더 그래 보인다. 30대 초, 중반쯤 되려나?
그런 그가 웃으며 나를 반겼다.
“기로 프로듀서님? 아, 이렇게 부르는 게 실례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한 레이블의 대표시니까.”
“어떻게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기로 프로듀서님이 유명하니,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젠틀하게 웃는 채드를 보며 끄덕였다.
자리에 앉자, 뒤이어 맞은편 자리에 앉은 채드.
슥 머리를 뒤로 넘긴 그가 느긋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헤일리 쇼를 아주 재밌게 봤거든요.”
“레전드 편을 보셨네요.”
“하하, 그렇죠. 레전드 편이었죠. 여러모로.”
유쾌하게 끄덕인 채드가 덧붙였다.
“그때부터 기로 프로듀서님과 던컨이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니까요.”
나도 푸스스 웃으며 끄덕였다.
분위기 희석을 위한 농담은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이제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겠지.
서두를 저쪽에서 떼려나, 내가 꺼내야 하나 생각하는데, 채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가 가장 처음 제안을 했던 게, 아더 레이블 소속 뮤지션 둘에 대한 미국 진출 건이었죠?”
“네.”
“론 스미스의 추천으로 진행된 제안이었는데, 보류하셨었고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레이블에 TKM이란 모회사가 있습니다. 그곳의 지원이 필요했고, 그래서 시간이 좀 걸렸죠.”
내 대답에 채드가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짐작은 했습니다. 뭐, 우리 쪽에서도 차라리 잘 됐다 싶었어요. 론 스미스와 CEO를 제외한 대부분의 임원들이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제안이라.”
“···?”
“그래서 이번엔 저희가 다른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아마 더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나는 눈을 좁혔다.
다른 제안?
고개를 기울이자, 채드가 손깍지를 끼고서 여유롭게 나를 본다. 그리고 마치 선심 쓰듯 제안을 던져왔다.
“세비슨 너플러의 앨범에 참여시켜 드리죠.”
“누굴···말입니까?”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말을 잇는다.
“당연히 프로듀서님이죠. 설마 세비슨 너플러가 아더 레이블 뮤지션들을 피쳐링으로 쓸 거라 생각하신 건 아니시죠?”
차라리 그거였다면.
아더 레이블 뮤지션을 피쳐링으로 쓰겠다는 거라면, 조금 고민할 여지라도 있었을지도 모를 텐데.
이건 뭐, 다시 미팅 제안이 왔길래 은유란과 최정아에게 욕심이 생겼나 했더니 전혀 엉뚱한 제안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무려 세비슨 너플러야, 어때 군침 흐르지? 라는 표정으로.
어쩌지. 애석하게도 군침이 전혀 안 흐르는데?
미셸 루바니의 앨범도 거절했는데, 세비슨 너플러가 무슨 대수일까.
“그거 말고, 보류됐던 제안을 계속 협의하는 건 어떠신가요?”
내가 원하는 방향을 말하자 이번엔 채드가 눈을 좁혔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거기 레이블 뮤지션들의 미국진출 말입니까?”
끄덕이자 그의 눈길이 변했다. 답답함은 짜증으로 번져갔다.
“좋은 제안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으니 천천히 설명드리죠. 우선, 론 스미스가 추천했던 그 둘 말입니다. 재즈, 발라드.
미국에서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장르들입니다. 하지만 세비슨 너플러의 앨범은 시작부터 주류죠. 게다가 이미 스타고요. 프로듀서님이 미국진출에 꿈이 있으신 것 같아서 하는 얘깁니다.”
“충고는 감사합니다만, 그럼에도 제가 원하는 건 제 뮤지션들의 미국 진출입니다. 전 아무래도 원래의 제안대로 얘길 이어가고 싶은데요?”
그러자 채드가 불편한 듯 자세를 고치며 반 협박조로 말꼬릴 올렸다.
“그렇다면, 저희와 함께하긴 어려울 텐데요?”
#-그 프로듀서 노래, 전부 들어봤어요.
세비슨의 말에 창밖을 내려다보며 서 있던 채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런데?”
-너무 마음에 들어요. 자기 색을 고집하지 않고, 뮤지션에 맞추는 멜로디와 편곡. 딱 제가 원하던 작곡가예요. 어쩌면 타이틀 곡으로 쓸만한 노래를 만들어 줄지도 모르겠는걸요?
한껏 들뜬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채드가 입술을 핥았다.
“그래?”
-네, 마음에 들었어요. 연결시켜줘요.
“······.”
-채드?
유리창에 비친 그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