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65화 (165/221)

165. 완성된 다리 위로 (4)

“피곤하지? 이제 거의 끝났으니까······.”

밤샘 촬영으로 피곤함에 찌든 스태프들이 장비들과 함께 굴러다니는 남양주의 한 세트장.

화장품 광고 촬영이 막바지인 가운데 하서윤 매니저가 쩔쩔맸다.

무려 14시간.

최근 들어 특유의 지랄 맞음이 희석되고, 비교적 얌전(-이게 하서윤에게 어울리는 단어인지 의문이지만)해진 하서윤이라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감독에게 들이박고도 남을법했기에 매니저의 목소리엔 긴장감이 녹아있었다.

그런데 웬걸.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하서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휘저었다.

“괜찮아. 얼른 끝내고 올게.”

그녀가 건넨 핸드폰을 받아들고 잠시 멍해진 매니저는 어느새 촬영이 재개된 조명 아래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경악했다.

‘하서윤이 변했어···!’

단지 좀전의 상황만 두고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아주 가끔, 한정판 명품 가방이 제 손에 들어왔을 때나, 앨범이 크게 성공했을 때. 특히 춤 선이 자기 마음에 쏙 들게 나왔을 때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긴 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모습이 빈번해지고 있다는 건 확실히 괄목할만한 변화였다.

‘그러고 보니 팀장님도 요새 쟤 이상하다고, 이상하게 정상이라고 그러셨었지.’

그게 몇 달 전이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꽤나 정상이었다. 이상하게도.

‘이걸로는 변했다는 증거가 부족한가?’

다른 이도 아닌 하서윤이다.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갑자기 탐정에 빙의한 듯 추리를 이어가던 매니저의 시선이 떨어졌다. 그녀가 주고 간 핸드폰을 보는 순간, 매니저는 전율했다.

심할 땐 월 단위로 집어 던져 깨져나가던 핸드폰. 그렇기에 하서윤의 핸드폰은 언제나 최신폰이었는데······.

‘이거, 작년에 나온 거잖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핸드폰을 던진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뭐가?”

“허음마, 깜짝이야.”

어느새 촬영을 마친 하서윤이 세트장 구석에 있던 그에게로 다가왔다. 자신이 달려가 아이스티를 건네지 않았음에도 소리 한 번 지르는 것 없이.

“오빠, 무슨 귀신 본 얼굴이다?”

“하하······피곤했나 봐. 얼른 감독님께 인사드리고 가자.”

상쾌한 미소로 감독 이하 스태프들과 일별한 하서윤이 밴 위로 올라탔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의 매니저가 운전대를 잡자, 하서윤이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툭 말했다.

“아더 레이블로 가줘.”

“아더 레이블? 거긴 왜?”

주차장을 벗어나던 매니저가 갸웃거렸다. 소속사인 TKM도 두문불출하는 그녀가 갑자기 아더 레이블을 간다니 의아할 수밖에.

“그······왔더라고.”

“와? 누가?”

“누구겠어.”

끔뻑이던 매니저가 ‘아!’ 소릴 내며 백미러를 보았다.

“장 대표님?”

갑자기 정전기라도 느껴진 건지 움찔하는 하서윤.

정답을 맞힌 매니저의 호기심이 한발 더 나아갔다.

“근데 그렇다고 거길 왜 가는 건데?”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행동에 놀랐다.

하서윤이잖나.

갑자기 무슨 짓을 벌여도 그 하서윤이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왜’가 통용되지 않았던, 하서윤.

원래대로라면 ‘가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시동을 걸었으리라.

근데 반문을 했지.

‘역시, 변했어. 그래서 나도 이런 게 가능해진 거고.’

매니저가 집요한 눈빛을 보냈다. 백미러 프레임 안에 갇힌 하서윤은 침묵했고.

“서윤아, 너 혹시······.”

“응? 뭐, 뭐?”

“아냐.”

“···말해라.”

설핏 예전 모습을 보이길래 매니저가 화들짝 놀라 이실직고했다.

“그냥, 진짜,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기로 프로듀서한테 뭐 관심이 있다거나······.”

“오빠.”

“으, 응?”

“지금까지 나한테 들이댔던 연예인들 다 잊었어?”

“······아니, 다 기억하지.”

새파랗게 어린 아이돌부터, 중후한 배우들까지. 하서윤한테 찝쩍거린 이름들을 나열하자면 과장 좀 보태서 대한민국 연예계를 발칵 뒤집을 수도 있을 거다.

“근데,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걔들 추근대는 것도 다 깠는데, 내가 누구한테 관심이 있어?!”

엄밀히 말하면 네 본 모습을 보고 떨어져나 갔지.

뭐, 그게 깐 건가?

“그럼······.”

원래의 하서윤이 튀어나올까, 눈치 보는 매니저에게 하서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으쓱거렸다.

“왜겠어?”

“···?”

“미국 진출.”

“···!”

분홍빛 입술이 슬그머니 호를 그렸다. 하서윤답게.

“그걸 가능하게 해줄 사람이잖아? 안 그래?”

“그, 그렇긴 하지. 근데, 너 그때 미국 진출 안 할 거라고······.”

하서윤이 팍 인상을 찌푸렸다.

“그땐 그때고. 상황이 달라졌잖아.”

매니저는 금세 수긍했다. 원래대로 돌아온 듯한 하서윤을 보고 겁이 나기도 했지만, 실제로도 맞는 말이긴 했으니까.

장 대표의 연이은 성공이 미국까지 이어지며,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장 대표라면 해볼 만할지도.’

이미 던컨을 빌보드에 올려놨잖나.

예전에 하서윤이 5년 안에 빌보드를 가겠다고 했을 땐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고개가 주억거려졌다.

‘근데 장 대표가 하려고 할까?’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털어냈다.

이미 저렇게 막무가내로 찾아가 곡을 받았던 전적이 있잖나.

주억거리며 운전에 집중하는 매니저.

그를 보며 하서윤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즈넉한 시골 풍경 너머로, 당사자인 그녀조차 모르게 안도하는 표정이 스쳤다.

*밑에서 기다리겠다는 매니저를 기어코 집으로 돌려보낸 하서윤이 건물 앞으로 걸어갔다.

카페 안쪽, 테라스 할 것 없이 사람들의 시선이 쉴새 없이 날아든다. 선글라스를 꼈음에도 ‘하서윤’이란 이름이 들려왔다.

하서윤이 싱긋 웃으며 인사하자 감탄사들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하서윤이 선글라스를 재빠르게 벗었다. 의문 섞인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내린다.

‘뭐야, 왜 이렇게 긴장되지?’

레이블로 들어서자 퇴근을 준비하던 여직원이 그녀를 반겼다. 어색하게 웃으며 홀 안쪽으로 들어갔다. 기다란 테이블. 간이 주방. 프로듀서들의 작업실, 작업실, 작업실···그리고.

“왔어요?”

입구와 가장 가까운 작업실에서 주인이 나왔다.

순간 바이킹이 훅 내려가는 느낌이 든 하서윤이 얼떨결에 답했다.

“아, 네.”

굉장히 예의 바르고 순종적인 대답에 잠시 오묘한 표정을 짓던 장기로가 물었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예상했던 질문.

그러나 당당히 해외 진출을 논하려던 하서윤은 멈칫했다. 그녀의 와인 색 입술이 벌어진 채로 움찔거렸다.

너무 갑자기인가?

또 얼굴 두껍다고 뭐라고 하겠지?

좀······.

그래 보이려나?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걱정이었다.

상대방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는 것 따위.

그런데 지금 그런 걱정이 불쑥 떠올라 머리를 움켜쥐었다. 엉뚱한 문장을 조합해 버리더니 허락도 없이 입 밖으로 내민다.

“축하······축하해주려고 왔죠.”

‘맙소사,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나는 물끄러미 하서윤을 보았다.

솔직히 좀 당황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예상 밖이네.’

왜 왔는지 질문은 던졌지만, 내 나름대로 짚이는 게 있었지.

아마 이쯤이었으니까. 그녀가 해외에 진출을 병행하기 시작했던 시기 말이다.

처음엔 간 보듯 왔다 갔다 하다가 이내 미국에 집중해버리는 게 내년쯤일 테고.

그럼 그쪽 반응이 좋아서 전력투구했냐? 아니었다. 안 되니까, 되게 하려고 돌진했다는 걸로 기억한다.

그땐 인터넷 기사들로 지켜보며 참 무모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안다.

그게 하서윤이란 사람인걸······.

어쨌거나 의외네.

축하 라니.

“왜, 왜요?”

본인이 내뱉고 스스로 당황하는 듯한 그녀를 빤히 보다가 시선을 뗐다.

축하를 해주러 왔다고 하니, 커피 한 잔 먹여 보내긴 좀 그렇고. 마침 허기도 지니까······.

“저녁 먹었어요?”

“저녁···이요?”

“아, 다이어트 때문에 저녁은 안 먹나?”

하다못해 학준이 형도 저녁은 조심하는데, 하서윤이라면 당연히······.

“먹어요.”

먹는구나?

내가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녁같이 하죠.”

“이렇게, 둘이서요?”

내가 두리번거렸다.

여직원은 하서윤과 대화하는 사이, 소리도 없이 손만 휘적이다 퇴근했고, 이미 사무실도 텅텅 빈 지 오래다.

“아쉽게도 오늘 야근은 저뿐이라. 그게 싫으면······.”

그러자 하서윤이 발작하듯 외쳤다.

“좋아요!”

“···?”

“아니, 그게 아니라···배, 배가 너무 고팠거든요. 그래서 좋다고요.”

국내 최고의 댄서이기도 한 그녀.

그 유연하던 몸이 목석처럼 뻣뻣하게 돌더니 삐그덕 삐그덕 걸어 나간다.

“···?”

나는 갸웃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메뉴는 자연스레 하서윤이 정했다.

초밥집.

초다이가 정면으로 보이게 나란히 앉아,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초밥을 하나씩 먹었다.

굳이 서로를 마주 보지 않아도 되니 편하긴 하더라. 아마, 이래서 하서윤도 굳이 널따란 테이블을 놔두고 여기에 앉은 거겠지.

코스가 끝나는 동안, ‘이게 맛있다’, ‘저게 맛있었다’ 등의 얘기만 오갔기에 딱히 기억에 남는 대화는 없었다. 차라리 앞에서 초밥 만드시는 분과 더 많은 대화를 했을 거다.

그렇게 초밥집을 나와 아더 레이블 방향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대화 없이 걷다 보니 문득 일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던컨은 잘 하고 있으려나?’

팻 라이브 쇼 오프닝에 들어갈 그림을 위해 사전 녹화를 진행하는 날이었다.

야외 공연을 하고, 그 장면을 라이브 쇼 앞부분에 넣기 위한 녹화.

꽤 이른 시간에 시작할 거라고 했으니 아마 곧 촬영할 것 같은데······.

순간 일 생각으로 빠져들었다가 익숙해진 주변 거리에 정신이 들었다.

레이블 바로 앞. 별말 없이 나란히 걷던 하서윤도 발걸음을 멈추길래 내가 물었다.

“매니저 부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자나 봐요. 전활 안 받네.”

저런···

깨어나면 부재중 보고 식겁하겠다. 차라리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하서윤 매니저를 안쓰러워하며 조금이나마 편을 들어줬다.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밤샘 촬영은 매니저에게도 곤욕이죠. 그럼 택시 타고 가요?”

“저 원래 택시 안 타요.”

“그럼······.”

홀에서 좀 기다려 보라고 하려는데, 하서윤이 불쑥 말했다.

“노래.”

“네?”

“노래 좀 봐줘요.”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라고 중얼거리며 꼼지락거리는 하서윤이 보였다.

뭘까.

통 적응이 안 되네.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요, 그럼.”

#턱!

밴의 문이 닫히고.

“······.”

유리 너머로는 배웅 나온 장기로가 보였다.

안에선 잘 보이지만, 밖에선 시커멓게만 보일 선팅.

‘뭐가 보인다고 저렇게 손을 흔드냐.’

그 모습을 보며 흐릿하게 웃는데,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오래 있었네?”

“어? 아, 오빠 푹 자라고.”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았고.

매니저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나? 하하! 아까 일어나서 대기 중이었는데? 전화를 하지 그랬어! 바로 왔을 텐데!”

하서윤은 뒤쪽을 돌아보며 침묵했다.

알게 뭐람.

“그나저나 어땠어?”

“뭐가?”

기대 가득한 눈빛이 백미러에 반짝였다.

“당연히 미국 진출 얘기지!”

이윽고, 하서윤의 큰 눈이 데구루루 굴렀다.

‘아, 맞다······.’

#“대단하네.”

커피머신 앞에 서서 나지막히 읊조렸다.

하서윤에 대한 감상이었다. 정확히는 녹음실에서 부른 노래에 대한.

평소에 이미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그건 다소 부정적일 때가 종종 있었는데, 지금은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노래가 그냥 는 정도가 아닌데?’

이미 더 늘 게 있나, 싶었던 하서윤이었는데.

음색, 성량, 음역대. 모든 게 스탠다드한 그녀라 더욱 그렇게 생각했는데.

변화가 뚜렷할 정도로, 멜로디가 바뀌지 않은 게 의아할 정도로 실력이 달라져 있었다.

‘이러면 다음이 궁금해지는데······.’

커피잔을 집어 들며 피식 웃었다.

소속 뮤지션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한눈팔아선 안 되지.

거장, 미셸 루바니의 제안도 거절했는데.

한 눈 팔릴 뻔한 대상이 하서윤이라는 게 의외라 퍽 웃겼다.

고갤 절레절레 내저으며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을 눌렀다.

연결음 끝에서 들려오는 김지희의 목소리.

-네, 피디님!

잘 했구나!

잔뜩 흥분한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다.

역시나 곧바로 김지희의 자랑이 이어졌다.

이른 시간임에도 거리에 몰린 사람들.

펜스가 무너질 뻔해, 팻 라이브 쇼에서 얼른 경호원들을 더 부르고, 스태프들까지 달려들어 인간 펜스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가볍게 생각했다가 ‘오 마이 갓’만 외쳐댔다는 메인 피디까지.

“멋졌겠네요.”

프로그램 제작진 입장에선 죽을 맛이었겠지만.

-그렇다니까요?! 진짜, 피디님도 보셨어야 했는데! 그나저나, 예정대로 모레 오시는 거예요?

“회의를 좀 해봤는데, LA를 들렀다 가게 될 것 같아요.”

내 말에 김지희가 손뼉을 치며 외쳤다.

-아, 월드덕!

“네. 직접 가서 만나보려고요.”

-와···진짜 대박이네요. 오차드에 이어 월드덕이라니!

목소리가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던 김지희가 제작진과 얘길 해야 한다며 목소릴 가다듬고 전화를 끊었다.

이럴 땐 또 듬직하단 말이지.

언젠가 학준이 형과 스튜디오에서 벌벌 떨던 그 김지희라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모두 변하고 있구나.’

천천히, 혹은 빠르게.

작게, 혹은 크게.

나도 마찬가지겠지.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계속 커피를 홀짝였다.

그렇게 무수한 생각들이 스치고, 마지막으로 코앞에 당면한 과제에 직면한다.

바로 은유란의 미국 진출.

이제, 완성된 다리 위로 은유란이 먼저 건너갈 차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