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완성된 다리 위로 (3)
“결국, 론의 판단이 맞았네요.”
회의 말미. 좌중을 향해 월드덕 레코드의 CEO, 미하엘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자 곧바로 임원들의 표정에 텁텁함이 차오른다.
듣기 싫은 걸 들었을 때의 표정들.
그들 중 한 명이 삐뚤어진 입매로 반박했다.
“엄밀히 따지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죠. 론 스미스가 추천한 뮤지션은 여자 둘이지 않았습니까? 그, 고루한 재즈랑 사랑 타령하는 발라드. 하지만 이번에 성공한 건 던컨이란 보이그룹이고요. 그러니 론 스미스가 옳았다는 말엔 동의하기 어렵네요.”
의자가 버거워 보이는 풍채의 남자가 그게 뭔 대수냐는 듯 조소했다. 주변 임원들이 이때다 싶었는지 얼른 끼어들어 한마디씩 얹는다.
“맞습니다. 재즈라니···미셸 루바니라면 모를까. 하물며 아시안 재즈를 누가 듣겠습니까?”
“미셸 루바니였다면 우리가 마중까지 나갔겠지요. 안 그래도 지금 1인 소속사라 군침 흘리고 있는 회사 많던데, 하하.”
“그리고 던컨 노래는 완벽한 댄스곡이더만요. 차라리 그걸 들고 왔다면 우리도 고민을 좀 했을 텐데요.”
“맞습니다. 이거 생각해보니 오히려 우리 쪽에선 언짢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오차드엔 그런 뮤지션을 주고, 우리한텐 시장성 없는 뮤지션들을 넘기려 했으니 말이에요. 그마저도 멋대로 보류하겠다고 연락해왔다죠?”
“허! 듣고 보니 그렇네요. 졸지에 소니 뮤직도 아닌, 오차드 밑이 돼버렸군요.”
미국에서 재계 순위에 언급될 정도로 손꼽히는 금융사 월드덕. 그리고 이를 모기업으로 두고 있는 월드덕 레코드.
임원들의 드높은 자존심이 불편한 눈빛과 섞여 CEO 미하엘에게로 향했다.
이런데도 우리 잘못이야? 라고 묻는 듯한 반응에 미하엘은 지끈지끈 골이 아파 왔다.
전문 경영인으로 왔더니 임원들은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으며 주주들과 붙어 배당금만 늘리기에 급급하다.
소니 뮤직이 당장의 수익보단 오차드를 만들어 음악계 부흥을 선도하려는 것과는 매우 상반되는 분위기.
뭔가를 해보고자 했지만 요즘 들어 턱없다고 느끼는 미하엘이었다.
자금력이 탄탄한 금융사가 모기업인 게 매력적이었는데, 고지식함까지 물려받았나 보다. 회사끼리도 유전이란 게 있는 것 마냥.
회의감을 느끼며 마무리 지으려는 미하엘.
그때 이곳에 모인 이들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임원이 처음으로 얘길 꺼냈다.
“론 스미스가 그 둘을 추천한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천이었을 뿐. 그가 강조했던 건, 기로 프로듀서의 가능성이었죠.”
젊은 임원의 말에 나머지가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헛기침을 해댔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헤일리 쇼에 나온 건 나도 봤습니다. 능청스러운 게 꽤 재밌는 그림을 만들더군요. 거기다 뮤직 비디오 티저에 흥미를 가진 대중들이 뮤튜브까지 찾아보면서 던컨에게 그야말로 다이너마이트급 유명세가 찾아왔죠.”
미하엘이 임원을 보며 격하게 끄덕였다.
내 말이 저 말이다!
-라고.
“결국, 물꼬를 튼 것도, 몰린 관심이 흩어지긴커녕 오히려 입소문이 날 정도로 노랠 잘 만든 것도 기로 프로듀서가 맞습니다.”
젊은 임원이 말을 맺었다. 그리고 좌중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건 어떻습니까?”
이목이 쏠린다. 그가 원했던 대로.
“이번에 준비 중인 세비슨 너플러의 앨범에 넘버 하나 정도 주는 겁니다. 기로 프로듀서 입장에선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여수도 못 내려가 보시는 거예요?”
“그럴 것 같네.”
“어머니께서 속상해하시겠다.”
“그렇지만도 않더라. 기사로 보니 참 좋으시대. 왕성하게 활동해서 계속 기사에 나오라고 하시던데?”
“그게 다 걱정 말고 일에 집중하라는 부모님의 마음이져. 피디님은 그걸 곧이곧대로 믿으시면 안 되고요.”
“그런가······근데 아까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 만져?”
내가 시선을 내려 갸웃거렸다.
최정아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카메라를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각도 조절이요. 피디님이 너무 밋밋하게 나오더라구요. 브이로그에서 매번 그래서 대체 누가 찍나 했더니, 피디님이 찍으셨던 거였어요?”
“아니? 그때그때 두루두루······근데 그냥, 나처럼 나오던데? 원래 내가 선 굵은 얼굴은 아니잖냐.”
“아녜요. 자세히 보면···자세히 보면 흐릿하지만 유려한 선이 있어요. 그 뭐냐. 동양의 미랄까.”
분명히 긍정적인 말을 해주는 말 같은데 왠지 부정적인 것보다 쿡쿡 찔리는 것 같지.
괜찮은 각도를 찾았다며 LCD를 돌려 보여주는데 역시나.
‘똑같네. 그냥 나야.’
오히려 밑에서 위로 찍어 더 넙데데해 보인다.
이건 대체 무슨 앵글이냐고 물으니 살짝 내 쪽을 올려다보며 빨대로 입술을 가져갔다. 빙글빙글 웃으며. 애가 못 본세 밝아진 건가, 실없어진 건가. 헷갈리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떠오르는 게 있어 말을 꺼냈다.
“이번 콘서트 못 가는 건······.”
다음 달에 잡혀 있는 그녀의 두 번째 단독 콘서트.
꼭 가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이번에 미국으로 가면 그때 나오긴 힘들 것 같았다.
“에이, 괜찮아요.”
최정아가 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피디님이 일 더 열심히 해서 기사에 더 많이 나오셨으면 좋겠어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며. 안 괜찮다는 거야?”
“오, 눈치가 점점···.”
낄낄거리며 웃는 최정아. 그녀가 장난이라며 말했다.
“아 참, 그래서 이번 콘서트 티켓을 여수로 보내드릴까 해요. 비행기 표랑 같이요.”
“어? 네가?”
작은 머리통이 격하게 끄덕인다. 거절은 듣지 않겠다는 듯.
뭐, 생각해보니 좋아하시긴 하시겠다.
매일 정아, 기영이, 하시면서 아들 딸 마냥 좋아하시는데 정작 한 번도 본 적은 없잖나.
“내가 할 일을 네가 하네.”
“그런 게 어딨어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흐흐.”
음?
뭐지. 방금 굉장히 음흉한 표정을···.
“그래서 미국에 얼마나 계실 것 같은데요?”
“이번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빨대에서 입술을 툭 떼어낸 최정아가 묻는다.
“네? 어, 얼마나요? 몇 달이나요?”
“아마 서너 달은 족히 걸릴 것 같은데.”
“그럼 저흰 그 뒤에나 다시 보는 거예요···?”
금세 허물어지는 표정에 대고 말했다.
“그건 아닐지도.”
알쏭달쏭한 최정아의 표정을 보며 내가 피식 웃었다.
“그 전에 네가 올 일이 생길 것 같거든.”
#‘미국에요?’
‘피디님이랑요?’
‘언제요?’
‘얼마나요?’
잔뜩 들떠 질문 세례를 쏟아내는 최정아를 진정시켜 돌려보냈다.
샵 예약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별수 없이, 하는 수 없이 김 실장에게 끌려갔다.
저래서 단독 콘서트는 제대로 하려나 싶을 정도다. 오늘부터라도 짐을 싸둘 기세던데.
문제는······.
‘어째, 미국 진출 때문에 들뜬 게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그렇담 뭐 때문에 들떴을까?
“······.”
솔직히 떠오르는 게 없진 않다. 다만, 이게 떠올랐다는 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 상정하기 어려울 뿐.
나에게 최정아는 특별하다.
내가 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게 했으니까.
학준이 형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뭔가 내가 키워온 느낌이랄까······아니, 이건 아닌가.
아무튼, 이렇게 내가 최정아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최정아가 날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어느정도 느끼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지 (-사실 꽤 오래 몰랐다).
그게 처음엔 단순히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동경 같은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농도가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 있는 것 같지.
내가 너무 파고드나?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푸는 사이 레이블에 도착했다.
다 풀지도 못했다. 오히려 더 엉킨 것처럼 단단히 묶였다.
10년의 노련함 같은 건 쥐뿔도 없었다. 적어도 이 분야에서만큼은.
‘나잇값을 1원도 못 하는구나.’
한탄하며 자동문을 넘어서자 홀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있던 몇몇 직원들이 보였다.
“플래시가 파파박. 요만한 마이크들이 피디님 앞으로 수십 개가······.”
그 틈에 끼어 공항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히 전하는 주재윤도 보이고.”
인기척에 고갤 돌리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다가갔다.
주재윤을 비롯한 직원들이 벌떡 일어나 반긴다.
“본사엔 잘 다녀오셨어요?”
“네. 아주 잘 요. 원하는 것도 얻고, 주고 싶었던 것도 주고.”
“원하는 것? 주고 싶었던 것?”
“아더 레이블의 해외 진출을 최대한 지원하시겠대요. 대표님이.”
내게로 향해있던 눈들이 동그래진다.
던컨을 지원해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였다. 그건 TKM이 오랜 시간 준비해온 프로젝트였으니까.
“그럼 저번에 얘기하신 것처럼 먼저 유란 씨와 정아부터···?”
여직원의 물음에 내가 느릿하게 끄덕였다.
“우선······정아는 단독 콘서트부터 여러 일정들이 몇 달간 꽉 잡혀 있으니 유란 씨부터 추진해볼까 해요.”
단순히 스케줄 때문만은 아니다. 장르의 특성도 순서 결정에 한몫을 했다.
미국이라고 재즈가 열약하지 않겠냐만, 그래도 한국보단 훨씬 나으니까.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가치를 은유란이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곳으로 얼른 보내주고 싶었다.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은유란의 무대를 보며, 그리고 거장 미셸 루바니의 무대를 보며 키워온 생각이었다.
언젠가, 은유란이라면.
‘저렇게, 아니 저보다 더 대단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때 여직원이 물었다.
“혹시 오차드에서 다른 제안을 해오진 않았나요?”
오차드가 던컨의 성공으로 아더 레이블의 다른 뮤지션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냐는 물음이었다.
‘관심이야 보였지······.’
하지만 은유란도 아니었을뿐더러 오차드는 지금 그럴 여력이 없었다.
“오차드는 당분간은 던컨에 집중할 것 같아요. 가뜩이나 많은 뮤지션들을 케어하고 있는데, 던컨이 생각보다 너무 터져버려서 업무량을 감당하기 어렵나 봐요.”
내 말에 직원들이 끄덕였다.
내심 뿌듯한 듯 옅은 미소가 면면에 그려진다.
“오차드 직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뭔가 기분 좋네요.”
“그러게요. 그 오차드가 버거워한다니! 보도 자료로 아주 자극적이고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네요, 흐흐.”
“그러면 지난번에 보류했던 월드덕 하고 함께 하게 될 확률이 높아지겠네요?”
직원의 말에 내가 주억거리며 덧붙였다.
“그렇긴 한데······최근에 월드 TKM을 통해서 다른 곳에서도 연락이 오긴 했어요.”
“그게 어딘데요?”
“더블타임 레이블이요.”
직원들의 머리가 갸우뚱해진다. 얼굴엔 물음표가 반짝이고.
모를만하다.
역사가 깊은 레이블이지만, 그리 큰 레이블은 아니니까.
명문 재즈 레이블이라고 설명하려는데, 갑자기 품 안이 간질거렸다.
“잠시만요······.”
발신인을 확인하고 돌아서서 전화를 받았다.
-한국 왔죠?
“네.”
-레이블이에요?
“지금은요.”
-······뭐예요, 어디 가게요?
“아뇨?”
-근데 왜 그렇게 말해요!
빽 들려오는 소리에 피식 웃으며 물었다.
“여전하네요?”
-끙.
볼륨조절 기능을 다시 탑재한 하서윤이 낮게 말했다.
-······무튼 기다려요. 지금 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