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완성된 다리 위로 (2)
“기로 프로듀서님, 맞으시죠?”
시선을 돌리자 ‘진짜 맞네!’라며 놀라는 여자가 보였다. 외모에서 풍겨오는 인상이 아무래도 유학생인 것 같은.
기내에서도 몇 번 있었던 일이라 능숙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여자가 갑자기 크로스백을 홱 돌리더니 수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던컨의 사진이 표지로 되어 있는 스프링 수첩이 내 앞으로 배달되었다.
아직 포장 비닐도 뜯어져 있지 않은 새 수첩.
“사인해주세요!”
“이건······.”
“던컨 찐 팬 인증 수첩! 이거 사려고 차이나타운까지 돌아다녔어요!”
해맑게 웃는 여자를 보며 내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해맑게 웃고 있는 표지 속 던컨 애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거 불법 굿즈예요.”
“······네?”
“저희 이런 거 만든 적 없어요.”
툭, 하고 떨어져 내리는 수첩.
내가 그 수첩을 도로 주울 때까지도 여자는 입만 벙긋거리며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얼굴이었다.
“찌, 찐 팬이라 자부했는데······.”
처량한 목소리와 함께 힘없이 푹 숙여지는 머리.
내가 수첩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이건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회사 가서 얘길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네, 가져가세요. 안 그럼 제가 불살라버릴 거거든요. 하지만 던컨 얼굴이 나온 걸 불사르면 그건······.”
“대신.”
오락가락한 여자의 말을 자르며 기내용 캐리어를 열었다. 맨 위에 접힌 쇼핑백 하나를 꺼내 들어 확인해보니 조금 구겨지긴 했지만, 내용물엔 전혀 이상이 없었다.
“이거 드릴게요.”
“네? 이게 뭐예요?”
받아든 여자가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고갤 들어 올렸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예상했던 것보다 더 격한 반응에 내가 피식 웃었다. 찐 팬 맞구만.
“이, 이거 설마 한정판 굿즈예요!? 던컨 친필 사인까지 같이 들어있는!?”
내게 질문 세례를 퍼부으면서도 누가 뺏어갈까 끌어안는다. 취급 주의 스티커가 붙어도 저것보단 덜 조심하겠다. 쇼핑백을 신생아 안듯이 품에 안은 여자는 비행기에서 늦게 내린 게 행운이었다며 급기야 눈물까지 글썽였다.
아이돌이 왜 아이돌(Idol)인지 알 것 같은 장면이지.
연신 감사하다며 인사를 한 여자는 굿즈를 품에 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졌다.
“거기 내 사인은 없는데···.”
들리지 않나보다. 뭐, 애초에 필요 없었겠지만.
나는 푸스스 웃으며 다시 컨베이어 벨트 위로 시선을 올렸다. 어디보자······.
‘이 정도면 한 바퀴 돌고 들어간 것 같은걸?’
김지희가 눈에 띄게 만든다고 캐리어에 온갖 스티커를 다 붙여놨는데, 이렇게 안 보일 리가 없지.
캐리어가 떨어져 내리는 쪽에서 내 캐리어를 기다리며 핸드폰 비행기 모드를 풀었다.
하루 사이에 쌓인 연락들이 연달아 핸드폰에 도착한다. 그중에 가장 최근에 온 연락이 레이블이길래 얼른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리기도 전에 달칵, 하고 전화가 받아졌다.
-피디님!
“네, 은우 씨. 전화하셨어요?”
-네, 네! 지금 어디세요?
“공항이죠.”
-공항 어디요?
왠지 다급한 목소리에 의아해졌다. 무슨 일이 있나?
“캐리어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좀 늦게 나와서 다시 들어갔나 본데······근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지금 게이트 앞에 기자들이 와 있거든요?
“아, 네. 얘긴 들었어요. 인터뷰하러 올 거라고.”
-네, 그랬죠. 근데요, 저희 생각보다 많이 온 것 같아요! 아니, 왔어요!
“네?”
-기자들이, 지금 게이트 앞에 엄청 많이 몰려있대요!
*“지난 한 달 동안 정말 헐리웃 배우라고 해도 과장이 아닌 스케줄을 소화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헤일리 쇼와 패트릭 쇼, 카풀 인 뉴욕, 스트릿 토크쇼까지 미국의 유명한 TV쇼들은 모두 섭렵하셨는데요, 대표님이 느끼기에 지금 현지 반응은 어떤 것 같나요?”
뜨겁지.
얼마나 뜨겁냐면, 던컨은 5성급 호텔로 옮겼고, 이동할 땐 제대로 된 밴을 타고 다니며, 공연이라도 있는 날엔 주최 측에서 경호원들까지 붙일 정도다.
“빌보드 HOT 100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최대 음원 사이트인 스포티파이에서 30위대로 올라섰습니다. 이렇게 되면 빌보드 차트에서도 상위권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노려보고는 있다.
아니, 째려보고 있지. 눈도 안 깜박거리며. 빈틈이 보이면 재빠르게 비집고 들어가려고.
나는 최대한 간략하게 던컨의 소식을 전했다. 미국에서 보글거리는 반응들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말을 아꼈다.
너무 큰 기대를 내비치는 게 오히려 사람들의 기대치를 높이게 될까 염려하는 게 첫 번째이고,
후에 던컨이 한국에 왔을 때 할 말을 남겨놓으려는 게 두 번째였다.
던컨이 한국에 돌아온다라···.
‘그땐 여기가 팬들까지 합세해 정말 인산인해가 되겠지.’
그리 멀지 않을 순간을 떠올리며 뿌듯함에 입꼬리를 올리는데, 갑자기 한 기자가 꽤 부담스러운 질문을 꺼냈다.
“어쩌면 던컨의 경제적, 국제적 가치가 앞으로 천억 단위를 호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서요.”
난이도가 어려운 질문이라 우스갯소리로 자연스레 말을 돌리려는데, 기자들 사이에서 누군가 카랑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하지만 음악 전문가시잖아요?”
자연스레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채연주가 씩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헛헛하게 웃으며 하는 수 없이 말했다.
“그럼 음악으로만 따져봐야겠네요. 제 생각에 던컨은······.”
#TKM 대표실.
유재완 대표가 뭐 그리 좋은지 크게 소리 내 웃고 있다.
그가 보고 있는 건 몇 시간 전 올라온 따끈따끈한 기사였다.
<기로 프로듀서, 던컨의 음악적 가치는 조 단위로 봐야······>
이런 제목을 가진···.
“이봐, 음악 전문가. 조 단위는 무리수였다는 의견이 태반이야.”
유재완 대표가 한참을 웃다가 찔끔 나온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천조국에 다녀왔더니 돈에 대한 개념이 바뀐 거로 하죠.”
“푸흐흐, 유학을 보낸 보람이 있군.”
내 말에 유재완 대표도 덩달아 능청을 떤다. 이 양반도 보통은 아니지.
기분 좋게 웃던 유재완 대표가 말머릴 돌렸다.
“내가 이번에 솔라톤, ENB, JME 대표들을 한 자리에서 볼 일이 있었어. 문체부 장관이 호출했거든.”
흥미로운 눈빛으로 기다리자 그가 말을 이어간다.
“근데 문체부 장관이 나한테 먼저 안부를 묻더군. 유치하지만 그게 참 기분이 좋았어. 특히나 솔라톤 대표 얼굴이 볼만하더라고.”
“전혀 유치하시지 않은데요? 저였으면 그 자리에서 문체부 장관님하고 던컨 얘길 주구장창 했을 겁니다.”
“나도 그러려 했지. 근데 그럴 필요도 없었어. 우리 불러다 놓고 얘기하는 요점이 그거였거든. 던컨처럼 좀 해봐라.”
완벽한 승리였다.
이전에 있던 퀀텀보이즈의 패배는 티끌처럼 보이게 하는.
그때의 기억을 음미하듯 찻잔을 기울인 유재완 대표가 불쑥 물었다.
“이제 앞으로 계획이 궁금한데?”
“던컨은 지금까지처럼 스케줄과 공연을 소화해 나갈 겁니다. 브이로그도 그대로 유지할 생각이고요. 후속곡은 좀 더 신중을 기해서 텀을 두고 작업할 생각입니다.”
“그렇군.”
주억거리던 유재완 대표가 다시 물었다.
“그리고 또? 하겠다던 말이 더 있었던 거 같은데?”
뉴하이가 차트 정상을 찍던 날, 내가 프로젝트 던컨을 성공시키고 말하겠다 했던 대가. 유재완 대표는 그걸 묻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말하려던 참이었기에 생각해온 말들을 꺼냈다.
“던컨 덕분에 월드 TKM과 아더 레이블에 대한 레코드사들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유통망도 안정적여졌고요. TKM의 적극적인 지원만 있다면, 이제 아더 레이블의 누구든 미국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된 거죠.”
“그것참 흥분되는 얘기군.”
어느새 얼굴이 벌게진 듯한 유재완 대표가 끄덕였다.
“그래서, 기둥 몇 개 더 뽑아가고 싶단 얘기지?”
이번엔 내가 끄덕였다.
유재완 대표는 그러라며 너털웃음을 지었고.
찻잔으로 손을 뻗던 그가 문득 내 뒤쪽으로 시선을 넘겼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근데, 그 쇼핑백들은 뭔가?”
#그 시각, TKM 캐스팅팀.
캐스팅팀 박 팀장이 어딘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팀장실에 앉아 있었다.
앞에 있는 캐스팅 디렉터는 눈알만 굴리는 중이었고.
“젠장, 내가 왜 그 자식이 왔다고 사무실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거지?”
캐스팅 디렉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기로가 왔다는 소식에 복도도 나가지 않을 거라 말한 건 본인이잖나.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가 박 팀장에게 솔직히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순간 욱해서 들썩이던 박 팀장이 다시 허리를 소파에 붙였다.
“아니지, 괜히 마주쳐서 좋을 거 없지. 별 볼 일 없을 때도 말 한마디 안 지던 놈인데, 지금 같을 땐 얼마나 으스대겠어? 건방진 새끼. 그 꼴 보면 혈압 오를라.”
합리화를 마친 그가 머리를 뒤로 젖히려는 때였다. 문밖에 실루엣이 아른거리더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박 팀장이 목욕탕에 앉아 있는 듯한 자세로 무성의하게 물었다.
“어, 누군데?”
이윽고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팀장님, 저 장기롭니다.”
순간 박 팀장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자세를 벌떡 일으킨 그가 캐스팅 디렉터를 보았다. 저놈 왜 왔냐는 듯이. 하지만 캐스팅 디렉터도 당황한 얼굴로 눈알을 굴릴 뿐이었다.
한동안 대답이 없자 장기로가 다시 말했다.
“저 들어가겠습니다?”
곧바로 문이 열렸다.
마치 제 사무실인 양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장기로를 보며 박 팀장은 얼른 당황한 기색을 지우려 애썼으나, 결국 과장되게 인상을 찌푸린 꼴로 그를 맞이했다.
“들어오란 말도 안 했는데 들어오네?”
“들어오지 말란 말을 안 하셔서 들어왔는데요?”
“······.”
한 방 먹은 박 팀장이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기로가 들고 온 쇼핑백 하나를 탁상 위에 올렸다.
“미국까지 다녀왔는데 선물 하나 없이 오긴 뭐해서 팀장님들 것도 챙겨왔습니다.”
쇼핑백을 내려본 박 팀장이 눈을 추어올렸다.
“미국에서 결과 좀 좋았다고 으스대려고 왔냐?”
“그렇게 한가하진 않아서요. 미국에서의 결과가 좀 좋았어야죠.”
빙그레 웃어 보인 장기로가 자리를 비키려는 캐스팅 디렉터에게 손을 저었다.
“아녜요. 앉아 계세요. 선물도 드렸으니, 전 얼른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휘적거리며 나가는 장기로.
약 올리려고 온 게 아니라, 정말 선물을 주려고 온 건가 싶을 정도로 간결한 방문이었다.
이에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있던 캐스팅 디렉터가 쇼핑백을 들췄다.
“이게 대체 뭔데······어?”
박 팀장이 황당하고 열 받은 표정을 가까스로 거두고 캐스팅 디렉터를 노려봤다.
“뭔데, 그래?”
캐스팅 디렉터가 쇼핑백 안에 든 상자를 천천히 꺼냈다.
아직 비닐도 안 벗긴 던컨 한정판 굿즈가 탁상 위에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