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급이 달라지는 (3)
“괜찮을까요?”
방청객들의 뒤통수와 스튜디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상황실.
개인 노트북을 콘솔 위에 올려놓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메인 작가가 불쑥 물었다.
무심한 눈으로 스튜디오와 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번갈아 보던 피디가 그녀에게로 고갤 돌렸다.
“뭐가?”
“기로 프로듀서요.”
“뭐, 문제 될 건 없잖아? 아예 인지도가 없는 사람도 아니고, 앤 앨범 타이틀 곡까지 함께 작곡했다는데. 메인으로 출연은 안 될 일이지만 앤 서브로 나오는 것쯤이야 뭐.”
으쓱거리는 피디를 보며 메인 작가는 여전히 찜찜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앤이야 워낙 유머러스하니 큰 걱정 없지만, 그래도 아쉬워요. 차라리 앤 혼자 섭외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요. 기로 프로듀서가 괜히 채널 돌아가는 구실을 주는 건 아닐지······.”
“이봐, 사라. 이미 불은 들어왔어.”
걱정스레 늘어놓던 말끄트머리를 피디가 단호하게 잘랐다.
메인 작가가 어쩔 수 없이 말꼬릴 삼켰다.
피디의 말대로였다.
이미 생방송 불은 들어왔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서 앤 더글라스가 스튜디오로 나와 인사하고 있었다.
헤일리와의 인사까지 끝이 나면 소파에 앉아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함께 나온 친구가 있다며 프로듀서를 소개하겠지.
레드리시와 빌 앨런, 올해의 기대되는 아티스트 등을 언급하면서 말이다.
풀이 죽은 메인 작가가 다시 키보드 위로 손을 올리는데, 피디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진 말라고. 헤일리한테 얘기해 놓은 게 있으니까.”
메인 작가가 갸웃거렸다.
“뭐라고요?”
“영 재미없다 싶으면 질문을 반으로 줄이라고.”
피디의 말에 메인 작가가 자신의 노트북을 확인했다. 그리고 되물었다.
“······여기서 더요?”
#먼저 스튜디오가 보였다.
여느 미국식 토크쇼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다 비슷비슷하잖나.
뉴욕의 전경을 띄운 배경.
덩그러니 놓인 상아색 가죽 소파.
거기에 어느 집 거실처럼 편하게 앉아서 날 보는 앤과 헤일리까지.
자연스레 방청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계적인 박수를 쏟아내는 방청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가 빠져라. 팔을 휙휙 돌리며 신호를 주고 있는 스태프들까지도.
그 광경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앤과 헤일리가 앉은 소파 앞에 당도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이 나를 반겼고, 가벼운 악수와 포옹을 하고서 내게 배정된 소파 끝자리에 앉았다.
‘하아···.’
정신이 하나도 없다. 커튼이 걷히고 한 걸음 내디뎠는데, 여기로 누군가 순간이동을 시킨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방청객들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보인다. 면면에 띄워진 표정들에서 알 수 있었다. 저들은 나에게 딱히 관심이 없다는 걸.
그렇게 분위기를 훑는데, 헤일리가 불쑥 물어왔다.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 완전 얼떨떨한 표정인데요?”
“아, 긴장은 안 했는데 좀 아프네요.”
“···네?”
“앤이 생각보다 너무 세게 안았어요. 분명히 가벼운 포옹일 거라 들었는데···.”
헤일리가 앤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쵸,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죠. 특히나 앤이라면 더요.”
끔뻑이는 앤을 보는 방청객들의 웃음소리도 커졌다.
잘 넘어갔나 보네.
어리바리하고 있다가 시작부터 꼬일 뻔했다. 질문하는 헤일리의 눈빛이 분명 간 보는 듯했거든.
내 능청이 나쁘지 않았는지 헤일리도 그 눈빛을 거두고 매끄러운 진행 실력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여배우라 그런지 목소리도, 발음도 팍팍 꽂힌다. 다행이지. 통역사 없이도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까.
계속 질문이 오갔다. 앤 더글라스의 이번 앨범에 대한 얘기가 단연 주된 화두였다.
세 번으로 나눠서 낸 의도는 뭐냐고 묻기도 하고, 특정 곡의 의도를 추궁하기도 했다.
앤은 그때마다 여유롭게, 그리고 유쾌하게 답변을 해나갔다.
“이제 타이틀 곡 공개까지 한 시간도 안 남았어요.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사실 이 타이틀 곡은 앤 혼자서 만든 곡이 아니죠?”
헤일리의 질문에 앤이 껄껄 웃었다.
“맞아요. 솔직히 전 제가 만든 곡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어요. 이 친구 덕분에 나올 수 있는 노래였거든요. 근데 그건 죽어도 안 된다네요.”
“누가요?”
“소속사 사장놈과 이 친구가요.”
헤일리가 크게 웃었다.
그녀는 브랜하고도 친분이 있는지 사장놈이란 단어에 브랜 얘길 꺼내며 꺌꺌 댔다. 그렇게 한참을 브랜 얘기로 넘어갔다가 소스가 떨어졌다 싶었는지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프로듀서님도 한 레이블의 사장놈이시죠?”
“맞아요. 제 뮤지션들이 뒤에서 절 그렇게 부르는진 모르겠지만요.”
방청객들이 또다시 터졌다.
능청을 거듭할수록 헤일리의 눈에 남아있던 의심들이 사라진다.
이제는 순수하게 흥미로운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걸 보니 그녀의 테스트에 내가 어느 정도 부응을 했나 보다.
“아더 레이블. 맞죠?”
“네, 맞아요.”
끄덕이자 헤일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실 프로듀서님 곡들을 제대로 들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전 원래 가사를 음미하는 편이라 해외 곡을 즐겨 듣진 않거든요.”
“편식가군요?”
앤의 말에 헤일리가 끄덕였다.
“절대적으로 타고난 편식가죠. 전 파인애플이 들어간 피자를 절대 안 먹거든요.”
······미식간데?
“아무튼, 그런데도 프로듀서님 노랜 계속 들을 수 있었어요. 가사를 전혀 알아듣지 못 해도요. 멜로디만으로 무슨 얘길 하려고 하는지 알 것만 같았거든요.”
칭찬을 늘어놓던 헤일리가 내게 물었다.
“대체 그런 멜로디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죠?”
옆에 있던 앤도 아예 내 쪽으로 몸을 틀어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들렸어요.”
“뭐가요?”
“멜로디가요.”
말하던 내가 피식 웃자,
방청객도, 앤도, 헤일리도 웃는다.
“차라리 스스로를 천재라 부르는 게 더 겸손해 보였을 것 같네요.”
고갤 내저으며 웃던 그녀가 탁상 위에 올려진 패드를 힐끗 보았다. 다시 앤에게 질문을 하겠지 싶어 긴장의 끈을 슬쩍 놓으려는데, 예상치 못한 얘기가 꺼내졌다. 예정에 없었던.
“아 참, 이번에 새로 준비하는 그룹이 있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데뷔를 한다죠?”
헤일리가 패드에 떠오른 질문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내게 시선을 보냈다.
순간, 이 스튜디오에 들어올 때보다 더 큰 흥분감이 울컥 올라왔다.
전 세계로 방영될 최고의 토크쇼에서 던컨에 대한 얘길 할 기회가 생긴 거다.
“어떤 그룹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난 이 기회를 덥석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누구보다 그들에 대해 잘 설명할 자신이 있었기에.
내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뗐다.
#“생각보다······잘하네요?”
상황실. 메인 작가가 스튜디오를 바라보며 말꼬릴 올렸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피디에게 괜찮겠냐며 물었던 그녀였지만 지금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이 안에 있는 제작진들의 표정이 훨씬 유해졌다. 피디까지도.
밑에서 스태프들 관리하느라 고군분투를 하고 온 조연출이 머릴 긁적이며 말했다.
“발음도 억지로 따라 하지 않아서 우스꽝스럽지도 않고, 말도 쉽게 하고, 캐릭터도 확실하네요. 특히 앤과 케미도 살아서 앤에 대한 질문이 많아도 토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요.”
이에 메인 작가가 격하게 끄덕인다.
그들 사이에 있던 피디는 제법 흡족한 얼굴로 기로 프로듀서가 술술 쏟아내는 얘길 들었다.
미국에서 데뷔를 앞두고 있다는 보이그룹에 대한 이야기.
각각의 멤버들에 대해 설명하고, 그들이 브이로그에서 보여주는 케미에 대해 듣다 보니 제법 흥미가 피어올랐다.
“브이로그 영상 한 번 찾아봐. 조회수 제일 높은 거로.”
그의 말에 제작진들이 일사불란하게 해당 내용을 찾아 모니터 위로 띄웠다. 빠르게 훑어본 피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배경으로 띄워줘. 그리고 뮤비 티저도 찾아놓고.”
뉴욕 전경을 보여주던 LCD 패널이 브이로그 장면으로 바뀌자 헤일리가 눈치껏 저 상황은 어떤 상황이냐며 질문을 이어갔다.
기로 프로듀서는 막힘이 없었다. 슥 보더니 전후 상황까지 일목요연하게, 그러면서도 질문의 답뿐만 아니라 듣는이가 재밌도록 풀어냈다. 덕분에 방청객들의 웃음 리액션은 마를 시간이 없었다.
그 사이.
“티저 찾았습니다.”
“그래? 그것도 한번 보자.”
피디와 조연출, 그리고 메인 작가를 포함한 상황실 제작진들은 짤막한 뮤비 티저를 감상했다.
“와, 죽이네.”
조연출이 거친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 표현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죽이는 비주얼이 모니터에서 플레이되고 있었다.
현재의 뉴욕과 미래의 뉴욕이 교차하는 듯한 장면들.
그 배경 속에서 마치 한 명을 복사해 배치해 놓은 듯 딱딱 맞아 떨어지는 다섯 명의 안무.
감질나게 끝나버리는 티저 영상에 제작진들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피디가 메인 작가에게 물었다.
“이따가 앤이 라이브 하기 전에 장비 세팅할 동안 말이야······차라리 이걸 내보내는 건 어때?”
#무사히 생방송을 마쳤다.
예상외의 성과를 품에 안고서.
생방송에서 브이로그를 틀어준 것도 모자라, 스튜디오를 다시 세팅하는 동안 던컨의 뮤직비디오 티저들을 연달아 내보낼 줄이야.
덕분에 방송이 끝난 후, 앤의 타이틀 곡에 대한 관심 만큼이나 던컨에 대한 관심도 올라갔다.
미국 각종 포털 사이트들에 던컨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보이기 시작했고, 뮤튜브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루 만에 영상 대부분의 조회수가 2배씩 뛰었고, 티저 영상들은 10배 가까이 올랐다.
쇼케이스 무대 리허설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며 헤일리 쇼를 보던 던컨은 막바지에 자신들의 뮤비 티저가 튀어나오자 패드를 떨어트리고 비명까지 질렀다고.
이후로도 던컨에 대한 반응들은 하루하루 달라졌다.
헤일리 쇼의 위력을 실감하며, 우리는 데뷔 준비의 끝을 향해 박차를 가했다.
쇼케이스 당일까지도.
김지희와 이강훈 팀장, 그리고 나와 윤 이사가 동분서주하며 음원은 제대로 넘어갔는지, 앨범 커버는 문제가 없는지 등의 모든 체크를 마쳤다.
“오셨어요?”
브루클린 세븐 타워 근처에서 내리자 마중 나온 김지희가 푸스스 웃는다. 피곤해서 그런지 퉁퉁 부은 눈으로.
“애들은요?”
“준비 중이에요.”
그녀를 따라 걸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곧 입장 시작이네요?”
“네.”
“사람은······.”
내가 말꼬릴 늘리자, 김지희가 빙그레 웃는다.
“예상보다 많이 왔어요.”
“그래요? 그것 참 다행······.”
코너를 꺾다가 멈칫했다.
내가 뭘 본 건가 싶어서.
김지희를 돌아봤다.
“생각보다 안 놀라시네요?”
“무진장 놀라는 중인데요?”
“전 아까 보고 놀라서 울었거든요.”
“아, 그래서 눈이······.”
김지희가 눈을 가리며 쿡쿡대고 웃는다.
나는 입을 벙긋거리다 다시 한번 대로변을 보았다.
끝도 없이 늘어선 줄.
할 말을 잃고 그저 웃는데, 김지희가 다시 울 작정인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예상보다 많이 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