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급이 달라지는 (2)
일주일 전.
말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여전히 느긋한 표정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던컨보다 더 빠르게 인지도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은근한 물음에 황당해하고 있는 것도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먼저 유명해져 던컨의 인지도를 끌어올려 보자, 뭐 그런 것 같은데······.
곧이어 케이트가 건네는 종이 한 장을 훑어보니 저들은 꽤 진지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생각보다 허황된 계획은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스쳤다.
그들은 나름의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종이에 나를 전면에 내세워 차근차근 인지도를 쌓아나갈 프로그램들이 한가득 적혀 있었다.
케이트가 말했다.
“지금 우리 쪽에서 연결해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에요. 메이저급 유명한 프로그램은 없어도 나름 시청률이 괜찮은 것들만 추렸으니 장 대표님에게 맞을 것 같은 프로그램들을 확인해주세요.”
새삼 오차드가 얼마나 큰 회사인지 실감이 간다.
메이저급 프로그램은 없을지 몰라도 이게 프로그램이 대체 몇 개야. 이걸 다 연결해줄 힘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윤 이사도 헛바람을 뻑뻑 흘려대며 내게서 받은 종이를 훑었다. 입이 곧 귀에 걸리시겠네.
그런 우릴 보던 케이트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던컨과 동반으로 나갈 수 있을 포맷의 프로그램들은 따로 추진하고 있어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 우선 그것부터 확인해주세요.”
심지어 이게 전부가 아니란 소리에 윤 이사의 입꼬리가 기어이 승천했다.
나는 천천히 끄덕이며 케이트에게 물었다.
“혹시, 헤일리 쇼는 어떤가요?”
이 종이엔 없는 프로그램.
넌지시 던진 질문에 시종일관 느긋하던 말콤의 미간이 좁아졌다.
동시에 케이트는 실소를 머금었고.
“대표님. 지금 헤일리 쇼라고 했어요? 거긴 완전 다른 세상이에요. 엄청나죠. 거기 적힌 프로그램 다 합쳐도 헤일리 쇼의 파급력 못 따라갈 정도로.”
“그런가요?”
“네. 설마 헤일리 쇼에 출연하고 싶단 얘긴 아니죠? 아무리 저희라도 대표님을 헤일리 쇼에 출연시켜드릴 순 없어요. 지난주 게스트가 누구였는 줄 아세요? 자그마치 미셸 루바니었다니까요?”
황당하다는 그녀의 말투에 내가 주억거렸다.
“그 정도란 말이죠?”
나도 이름이야 당연히 들어봤지. 유명 토크 쇼란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런데 여기 적힌 십 수 개의 프로그램을 모두 합친 것보다 파급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신기했다. 미국에 방송사와 프로그램이 워낙 많아서 격차가 심한 탓인가?
그런 생각을 이어가는데 케이트가 격하게 끄덕였다.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이를 어쩔까, 싶은 눈으로.
거기다 대고 내가 말했다.
“그럼 헤일리 쇼를 나가볼게요.”
“대표님? 거긴 못 나간다고 말씀······.”
“오차드에게 거길 내 보내달란 얘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말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이미 섭외는 왔거든요.”
*그때, 말콤의 벙찐 표정이 생각났다.
아마도 지금 주재윤의 표정과 비슷할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요?
주재윤의 물음에 소리 없이 웃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비행기에 있는 사이, 앤한테 연락이 왔었더라고요. 연락해보니 헤일리 쇼에 같이 나가자는 제안을 해왔어요.”
-앤? 설마, 앤 더글라스가요? 갑자기요?
“앤이 곧 새 앨범을 내거든요.”
-아아, 알아요. 앤 더글라스 본인이 엄청난 자신감을 내비쳐서 팬들이 엄청 기대하더라고요······근데 그거랑 피디님의 출연이 무슨 상관이 있죠?
“그게, 상관이 생겨버렸어요.”
나조차 아직 벙벙한 일이라 멋쩍게 입을 뗐다.
“앤이 타이틀 곡 작곡가로 내 이름도 넣어버렸거든요.”
-···!
핸드폰 너머가 또다시 고요해졌다.
#8월 1일.
앤 더글라스의 신보, ‘Everything’이 총 세 번에 걸쳐 발매되었다.
첫 번째엔 세 곡이 발표되어 팬들이 열광했고, 두 번째에도 역시 세 곡이 발표되어 대중과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북미 음반 시장을 스크루지처럼 짜게 바라보는 평론가 카림 안투네스조차 이번 앨범에 대해 극찬을 했다.
마지막 세 번째엔 타이틀 곡 하나만 남겨놨을 뿐이라며, 기대감까지 표했다.
팬을 비롯한 대중의 생각도 마찬가지.
각종 매체에서 이번 앨범에 대해 자신감을 내비치는 앤 더글라스를 보며, 그리고 지금까지 공개된 곡들의 퀄리티를 두고 이번엔 정말 빌보드 1위를 거머쥐는 게 아닌가 하는 의견들도 점점 더 많아졌다.
마침내, 타이틀 곡 공개 당일.
나는 목이 답답해지는 정장을 입고서 NBC 스튜디오 대기실에 들어섰다.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하길래 꺼냈더니, 뒤쪽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기실 안은 찍지 마요.”
날 대기실로 안내한 스태프였다.
원래 저런 얼굴인가 싶은 한결같이 불친절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그냥, 메시지가 와서요.”
대답은 없었다.
그냥 돌아서서 나가버릴 뿐.
‘야박하네.’
옷차림이 영 불편해 셔츠 단추 하나를 풀었다. 그리곤 소파에 앉아 대기실을 훑었다.
“어쩌다가 내가 여길······.”
내가 묶는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NBC 본사.
미국에서 가장 역사를 자랑하는 방송국에, 그것도 생방송 대기실에 앉아 있다.
감개무량이란 생각보단 아직도 어리둥절하기만 하네.
멀뚱멀뚱 있다가 김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장 안 되세요?
“아뇨.”
-제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아뇨.”
-쳇.
NBC 구경하고픈 마음이야 이해가 간다만, 던컨이 데뷔를 코앞에 두고 있는 만큼, A&R로서 그녀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거긴 어때요?”
쇼케이스가 진행될 무대를 확인하기 위해 브루클린으로 이동해 있는 그녀.
내가 묻자 김지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장소는 너무 좋은데, 대우는 형편없어요. 뭐 벌써 하냐면서 투덜대고, 여러 가지 요청하면 마지못해 들어주긴 하는데, 시종일관 시큰둥해요. 리허설 하는 거 보면서 저들끼리 낄낄대고······.
뭔지 알 것 같네.
나도 좀 전에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니까.
사실 지난 2주간 이런 경우가 왕왕 있었다.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도 이런 일로 수차례 마찰이 있었을 정도.
서러움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오히려 마음이 다 잡힌다.
그래서 내가 여길 왔지.
‘내 몸을 던져서라도 지름길을 뚫어보려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려는데, 대기실에 누군가 찾아왔다. 전화를 마무리하고 일어나 문을 열자 커다란 곰이······아니, 환하게 웃는 앤 더글라스가 시선에 걸렸다.
오랜만에 봤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아이 같은 표정이다. 덩치와 수염에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그가 털썩 소파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자넬 보면 할 말이 너무나 많았는데, 우선 이것부터 해야겠군.”
그가 주섬주섬 꺼낸 것은 이어폰이었다. 그걸 자신의 핸드폰에 연결하더니 두 개의 콩나물을 내 쪽으로 건넸다.
내가 받아들며 물었다.
“타이틀 곡입니까?”
“맞아! 사실 같이 만든 곡이니 자네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자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들려주고 싶더라고. 그래서 만나길 애타게 기다렸지.”
이 양반, 설마 이거 들려주자고 날 데려 나온 건 아니겠지?
터무니없지만 어째 이 양반이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이미 몇 번을 얘기했지만, 제가 이 곡의 공동작곡가로 이름을 올릴 만큼의 뭔가를 한 것 같지가 않네요. 어떻게 안 돼요?”
내가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말했다.
양심이 찔린다. 내가 해준 거라곤 미래의 기억을 끄집어내 전달한 것뿐이잖나. 결국, 내 힌트들 없이도 앤 더글라스는 이 ‘Around the world’란 희대의 명곡을 완성시켜 들고 나왔을 거다. 그게 원래의 미래니까.
내가 이런 시공간을 초월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앤은 그저 킬킬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미 80만 장 정도 찍혀져 나왔을 텐데?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겠군. 하나, 둘, 셋, 넷······.”
능글맞게 웃는 그를 보며 내가 입맛을 다셨다.
“일단 노래부터 들어보라고. 그러면 내가 왜 자넬 공동 작곡가로 넣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테니.”
그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며 노래를 재생시켰다.
‘Around the world’의 메인 기타 리프가 드럼과 함께 달려나갔다. 이어지는 펑키한 베이스 라인과 현란한 스트링.
시작부터 페스티벌의 종장처럼 클라이맥스를 분출한다.
앤 더글라스의 시선이 느껴져 그를 슬쩍 보았다. 어쩐지 돌연 긴장한 얼굴이다. 왜 저런 표정일까 생각해봤는데, 그 이유가 다름 아닌 나에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표정에 지금 느끼는 당혹감이 모두 드러나고 있어서.
그리고 나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곡이······빌보드 차트 정상을 찍고, 그래미 ‘베스트 록송’ 부문을 수상하게 되는 ‘Around the world’가.
‘너무 많이 달라졌는데?’
과거 빌 앨런의 작업을 마치고서, 앤은 내게 조언을 구했었다. 자신의 기타 리프가 미완성이란 사실을 내가 알아차린 것에 크게 놀라며 자신의 고민들을 쏟아냈었지.
그의 기대 어린 질문들에 답해주는 게 굉장히 곤란했다. 미래의 기억을 내 것인 양 행세하는 게 아무래도 걸렸으니까.
그러다 보니 어느새 힌트가 아닌 내 생각을 말하고 있었고.
그게 문제였나?
아니, 근데 이걸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곡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명곡이라 불렸던 미래의 버전보다, 지금의 버전이 적어도 내겐 더 좋게 들렸다.
내 취향이 묻은 의견들이 너무 많이 반영된 탓이려나······.
어색하지 않게 표정을 풀었다.
더 인상 쓰고 있다간 앞에 앉은 주황 수염 난 곰이 오해를 할 것 같아서.
내가 짐짓 미소를 그리자 앤의 표정에도 안도감이 번졌다.
“왜 공동작곡가를 강하게 주장했는진 알 것도 같네요.”
노래가 끝나고, 이어폰을 툭툭 뽑으며 말했다. 그러자 앤이 끄덕거린다.
“난 표절 논란에 시달리기 싫거든.”
“그 정도까진 아니었고요.”
“푸흐, 어쨌든 얼른 자네의 평이 듣고 싶은데? 아주 솔직하게!”
바다. 그것도 몰타의 에메랄드빛 바다 같은 앤의 푸른 눈이 반짝였다.
내가 돌돌 만 이어폰을 건네며 빙그레 웃었다.
“완성이네요.”
짧은 대답에 앤이 입꼬리를 한껏 올린다.
“최고의 찬사군.”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나를 이곳에 안내했던 스태프가 들어왔다. 그러다 앤도 이 대기실에 있다는 것에 살짝 놀란 듯 주춤거리며 말한다.
“촤, 촬영 준비해주세요.”
앤 더글라스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스태프에게 꽂혔다.
“알겠어요. 근데 급한 일이 아니었다면 노크부터 했으면 더 좋았겠네요.”
빙긋 웃는 앤에게 스태프는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에게도.
스태프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앤은 내게 준비 중인 일은 잘 되고 있냐며 물었고, 나는 잘 되고 있으면 여길 나오지 않았을 거라며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러는 동안, 복도 끝에 다다랐다.
“동선은 아까 리허설 하신 대로. 아시죠?”
스태프의 말에 끄덕였다.
이윽고 커튼이 걷히며 사인이 내려지고.
“이따 봐.”
앤 더글라스가 먼저 스튜디오로 들어간다.
방청객들의 박수 소리와 헤일리의 것으로 짐작되는 웃음소리가 스르륵 닫히는 커튼 너머에서 들려왔다.
오디셔닝 때의 생방송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감.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준비하는데, 스태프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행운을 빌죠.”
여전히 표정도 뚱하고.
“아, 괜찮습니다.”
저런 행운이라면 받고 싶지 않으니.
벙찐 스태프의 표정에 빙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번 블루 벨벳 커튼이 화려하게 펄럭이며,
마침내 생방송 무대 위로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