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급이 달라지는 (1)
“어! 나 저 건물 엽서에서 본 것 같은데?”
“그냥 공중화장실인데요, 형?”
“뭐, 공중화장실 사진은 엽서에 있으면 안 되냐?”
“보통은 안 쓰지 않을까요?”
임현택과 엄대한이 투덕거리는 동안, 신예석은 여기서도 책을 펼쳤다. 평소 읽던 시집이나 소설은 아닌, 영어 회화책이었다.
“아, 아브 네벌 어 이매진······.”
아무래도 소감 같은 걸 외우고 있는 것 같지.
옆에 앉은 오승준은 차창문에 바짝 붙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뭘 찍어도 그림이네.”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며.
김지희가 그 모습들을 지켜보며 웃었다.
“애들이 많이 들떴네요. 비행기에서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
이에 가죽 수첩을 꺼내 들고 스케줄 정리에 여념이 없던 이강훈 팀장이 뒤쪽을 슬쩍 보더니 웃는다.
“이동하는 동안이라도 즐겨야죠. 당분간은 스케줄에 파묻혀 살아야 할 텐데.”
“그럼, 우린요?”
“자야죠. 이동하는 동안이라도 얼른 자고 체력을 비축해야죠.”
하루하루 달라지는 몸 상태를 토로하며 의자에 머리를 기대는 둘.
나는 웃으며 핸드폰 유심칩을 갈아 끼웠다.
전원을 켜자 밀린 메시지들이 몰아쳤다. 익숙한 소속 뮤지션들의 이름부터, 낯선 기자들까지.
메일도 마찬가지였다.
업무 관련 메일부터 데모를 보내온 뮤지션들까지 다양하다.
쭉 훑어보다가 손가락을 멈칫했다.
익숙하지만 의외인 이름이 사이에 끼어 있었기에.
‘앤 더글라스? 이 양반은 갑자기 왜 메일을 보냈지?’
내용도 연락 달라는 얘기뿐.
양옆이 어느새 곤히 자고 있어, 곧바로 전화하진 못했다. 설상가상 꿀렁이는 차에서 핸드폰을 노려보다 보니 멀미도 나는 것 같아 이내 머리를 기댔다.
그렇게 잠깐 잠들었을까.
눈을 떠보니 숙소였다.
뉴욕 중심가에 위치한 작은 레지던스 호텔.
여전히 들떠있는 아이들과 벌써 지친듯한 두 사람을 데리고 호텔 앞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그 사이, 현지 직원들이 찾아왔다.
TKM이 해외 진출을 위해 준비한 퍼블리싱 자회사, 월드 TKM.
그들은 아직 소화도 안 된 우리를 납치하듯 뮤직비디오 촬영장으로 데려다 놓았다.
이국적인 도심 속에서, 연일 촬영이 이어졌다.
크로마키가 필요한 촬영들은 이미 한국에서 마치고 온 터라 촬영해야 할 콘티가 많진 않았지만, 그만큼 주어진 시간도 짧았다.
우리가 뉴욕의 전경에 더는 감탄하지 않게 되기까지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지.
당연하게도 막내라인보단 임현택과 정현우가, 그들보단 김지희와 이강훈 팀장이 더 심각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엄대한은 지칠 줄을 몰랐고. 유전자가 달라.
한편, 나는 첫날 이후론 나머지와 전혀 다른 스케줄을 보내고 있다. 차라리 뮤직비디오 촬영을 따라다니고 싶을 정도로 바쁘게.
인터뷰의 연속이었다.
한인 방송국의 소소한 인터뷰였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덕분에 한인들이 발 벗고 나서서 홍보를 도와주고 있다.
뮤튜브에 영어로 댓글도 남기고, 블로그에 포스팅도 하고, SNS에도 던컨에 대해 올리면서 미미하게나마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반응이 오고 있었다.
*“오늘은 저희보다 먼저 안 나가셨네요?”
미국에 도착 한지 꼬박 5일째 되는 날이었다.
간밤에 가위라도 눌린 것 같은 얼굴로 이강훈 팀장이 물어왔다.
나는 커피잔을 한 손에 들고 여유롭게 끄덕였고.
“오늘은 일정이 하나라서요.”
“오······.”
“아 맞다, 오늘이죠? 오차드랑 미팅.”
김지희가 접시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먹어야 산다며 빵을 산처럼 쌓아왔다.
“네. 월드 TKM 이사님이 오후에 데리러 오신다네요.”
“그럼 오전 스케줄은 다 비는 거예요?”
끄덕이자 베이컨 끄트머리 마냥 그을린 얼굴들이 한껏 부러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허겁지겁 포크를 움직인다. 곧 출발할 시간이었거든.
“침대에서 오전을 보내는 거 어때요?”
“저라면 마사지를 받으러 갈 것 같습니다.”
“어머, 그것도 좋겠네요. 아, 쇼핑. 쇼핑센터도 가야죠.”
김지희와 이강훈 팀장의 개인적인 소원이 담긴 추천을 듣다가 손을 휘저었다.
“노래 들으러 갈 겁니다. 근처에 버스킹 자주 하는 곳이랑 음반매장 찾아봐 놨어요.”
“······.”
“······.”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떠나는 둘과.
“다녀올게요!”
던컨.
그들을 배웅하고서 이어폰과 보조배터리 등을 챙겨 나왔다.
버스킹을 자주 한다던 공원에 갔다가 비둘기만 보고.
예상치 못한 거리 노숙자의 기타연주에 감명을 받고.
러프 트레이드와 타임스퀘어 근처 콜로니라는 음반 매장에 들려 LP도 몇 장 샀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서 턴테이블을 사면 되겠네.’
순서가 좀 바뀐 것 같다만······.
그나저나, 이게 얼마만의 여유였나 싶다.
제대로 숨 고르기를 했으니, 이제 다시 일로 복귀해야 할 때.
‘그래서 일상이라고 하나?’
고루한 말장난에 피식 웃다가, 천천히 호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반갑습니다, 대표님!”
호텔에 도착하자 정장 차림의 동양인 남자가 로비를 서성이다 나를 보곤 반색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윤 이사님이시죠?”
“맞습니다. 한국 가면 꼭 만나 뵙고픈 분이었는데, 이렇게 뉴욕에서 뵈니 너무 신기하네요.”
월드 TKM의 윤 이사.
출장을 다녀와 이제야 찾아왔다며 유쾌한 인사말들을 건넨다. 그러다 내 손에 들린 쇼핑백에 관심을 보인다.
“LP를 모으시나 봐요?”
“오늘부터 그래 볼까 생각 중입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턴테이블도 없단 얘길 하자,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 거라며 웃는다. 알고 보니 대단한 LP 마니아라고.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차로 이동했다.
이번에 던컨의 유통 및 마케팅 등을 맡을 유통사이자, 미국 음반 시장을 꽉 잡고 있는 오차드(-소니뮤직 자회사)와의 미팅을 위해서.
빌딩 숲 사이를 요리조리 움직이던 윤 이사의 차가 미국답지 않게 화려한 건물 앞에 멈춰섰다.
차에서 내려 다가가자 나보다 머리 하나가 큰 경비원이 우리의 신원을 확인한다.
그를 지나치자 안내원 한 명이 우릴 3층에 있는 미팅룸으로 안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단정한 차림으로 우리를 향해 인사하는 중년의 남자와 젊은 여자.
“말콤입니다.”
이 사람이 본부장.
“케이트예요.”
그리고, 파트장.
윤 이사가 미리 언질 준 것들을 떠올리며 그들과 인사를 마쳤다.
커피가 나오고, 미팅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한국에서 숱하게 했던 여느 미팅과 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미국 날씨 얘기가 오갔고, 자연스레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말콤이 노래 얘길 꺼냈다.
“장 대표님이 보내주신 음원 잘 들었습니다.”
보내 달래서 보내줬더니, 통 얘길 안 하길래 안 들은 줄 알았다. 아니면, 별로였거나.
옆에 앉은 윤 이사가 작곡한 나보다 더 긴장했는지 침을 꿀떡 삼킨다.
말콤이 느긋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선, 좋았습니다. 댄스곡 다우면서도 미국에 있는 어떤 댄스곡과도 느낌이 달랐어요. 신선했죠. 동시에 강한 중독성도 갖췄고요.”
“전 저도 모르게 흥얼거렸다니까요?”
케이트까지 거들자 옆에서 윤 이사의 안도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말콤이 갑자기 말꼬릴 꺾는다.
“그래서 더 아쉽네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데, 이 사람이 지금 영어가 아니라 한국말을 하나?
갸웃거리자 말콤이 덧붙였다.
“이 노랠 영어로 개사해서, 다른 인지도 있는 뮤지션이 불렀다면 크게 성공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대화의 방향이 샛길도 아닌 역주행으로 흘러간다.
윤 이사가 얼른 끼어들었다.
“하하, 당연히 영어 버전도 앨범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단 얘길 하는 거예요.”
케이트의 한마디에 윤 이사는 몹시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계약도 완료된 마당에 이런 얘길 꺼내니 그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땀을 삐질 흘리는 그를 대신해 내가 말했다.
“그렇다고 다른 뮤지션이 부를 순 없죠.”
내 노래고, 내가 던컨에게 준 노래니까.
말콤이 여전히 느긋한 표정으로 끄덕인다.
“맞습니다. 그냥 던컨의 인지도가 아쉽다는 얘길 한 거예요. 뮤튜브를 통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고, 천천히 미국 내에서도 팬을 만들어 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지만, 아직 뚜렷한 변화는 없으니까요.”
이쯤 되니 정말 의아해진다.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해보자고 마련된 자리에서 저런 회의적인 얘길 하는 이유가 뭘까?
이제 와서 리스크를 더 줄이려고 수작을 부리나 싶어 정색하고 듣는데, 말콤이 빙그레 웃으며 얘길 이어갔다.
“그래서 저희도 생각해봤습니다. 던컨의 성공 확률을 높일 방법에 대해서. 최우선 과제는 역시 인지도. 즉, 유명해져야 한다는 건데······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
“꼭 던컨이 먼저 유명해질 필요가 있을까?”
무슨 소리지? 던컨이 데뷔하는데 그럼 누가 유명해져야 한다는······.
“레드리시의 프로듀서이자 빌 앨런의 작곡가. 그리고 NME가 뽑은 올해의 기대되는 아티스트라면.”
말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던컨보다 더 빠르게 인지도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뮤튜브에 영상이 23개가 올라가는 동안, 구독자 수 변화 추이예요. 아래 빨간 선이 조회수고요.”
던컨 전담팀 직원의 말에 주재윤이 모니터를 살피며 끄덕거렸다.
“쭉쭉 올라가네요.”
“그쵸. 근데 이걸 미국 시청자로 설정하면······.”
클릭 한 번에 그래프가 전혀 다른 모양을 그렸다.
“이렇게 돼요.”
상향 그래프라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완만하다 못해 평지에 가까웠다.
주재윤이 입맛을 다셨다.
“결국, 국내 팬들만 늘고 있다는 거네요.”
“네. 게다가 국내 여론도 계속 변하고 있어요. 응원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는지, 회의론자들이 댓글 창에 득실거려요. 아이돌은 한국에서나 하지, 나라 망신시키는 거 아니냐고 걱정인 척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많고요.”
“하여튼, 아직 데뷔도 안 했는데 이랬다, 저랬다······뮤비는 어느 정도 완성됐어요? 보도자료 낼 게 통 없으니 그거라도 좀 내보려는데.”
“거의 완성 됐어요. 미국 촬영본들도 다 넘어왔고, 편집 중이에요.”
“그럼 뮤비 스틸 컷 잘 나온 거로 한 장 보내주세요. 우리 잘 하고 있다고 광고 좀 해야죠.”
“그걸로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서글프게 웃는 직원에게 주재윤이 보도자료 기깔나게 써보겠다며 위로하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다급한 표정의 여직원이 핸드폰을 손에 들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 있어요?”
주재윤의 물음에 여직원은 핸드폰에 대고 입을 열었다.
“피디님, 재윤 씨랑 전담팀이 같이 듣고 있어요. 다시 한번 말씀해주세요.”
그러더니 핸드폰을 스피커 폰으로 바꾸며 앞으로 내밀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어리둥절한 주재윤과 던컨 전담팀.
이윽고, 장기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헤일리 쇼, 다들 아세요?
끔뻑거리던 주재윤이 끄덕였다. 뒤이어 직원들도.
“네, 알아요.”
“당연히 알죠.”
“그거, 메이저리거 서재구가 출연했던 프로 아녜요?”
“맞아요. 그 사격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나갔었잖아요.”
여배우 헤일리가 각 분야의 유명인들을 초대해 진행하는 토크 쇼.
모를 리가 없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토크 쇼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그건 왜요?”
의문을 갖고 던진 물음에.
-제가 거길 출연하게 됐어요.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네?”
일순 사무실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며 이게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확인하는 눈치.
한참을 멍때리던 주재윤이 핸드폰에 대고 물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피, 피디님이요?”
-네.
“피디님이······헤일리 쇼에 나가신다고요?”
재차 묻는 주재윤의 표정이 점점 격해진다. 뒤쪽에서 전담팀 직원들도 웅성댔다. 이게 무슨 일이냐며.
-그렇게 됐어요.
“갑자기요? 아니, 대체······.”
마침내 주재윤의 얼굴에 경악이 가득 차 넘쳤다.
“대체, 어떻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