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기다림 끝에서 (8)
대기실 문을 열고 슬그머니 나온 키 작은 여자와 우중충한 남자 셋.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이 플라스틱 간이 의자들이 제멋대로 쌓여있는 백스테이지를 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이윽고, 환호성이 잦아들며 백스테이지 쪽이 바빠졌다. 스태프들이 가젤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이, 검은 원피스를 찰랑거리며 고혹적인 이미지의 여성이 걸어 나왔다.
설레는 얼굴로 기다리던 은유란이 그녀를 향해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가뜩이나 작은 키에 허리까지 푹 숙이니 선배님 소릴 들은 여성의 시선이 더욱 내려갔다.
피가 벌겋게 쏠린 얼굴로 은유란이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뒤이어 인사하는 서울의 와인.
여성의 시선이 그들을 주르륵 훑다가 대기실 문으로 향했다. 프린트된 이름을 보고서 다시 은유란에게로 시선을 내린다.
은유란이 앞머리를 정리하며 수줍게 웃었다.
“이성령 선배님, 무지 팬입니다! 작년에, 아 그땐 돈 없어서 못 왔지. 재작년에 선배님 노래 듣고 싶어서 서재페 왔을 정도예요!”
“아, 네.”
찬양한 시간이 무색하게 짧은 단답을 던진 이성령.
은유란이 이상한 분위기에 뻐끔거리자 그녀가 더욱 싸늘해진 눈길로 말했다.
“축하해요. 프로듀서 잘 만난 덕에 이번엔 노랠 부르러 왔으니.”
그리고는 느릿하게 시선을 올려 자신의 대기실로 들어가 버렸다. 매니저인지 스타일리스트인지 모를 여자도 괜히 한 번 째려보고는 얼른 따라 들어간다.
“······.”
“······.”
복도에 한기가 내려앉았다.
방금 이성령의 차가운 말투 때문도 있었지만, 팬심이 사뿐히 즈려밟힌 은유란의 표정도 한몫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싶은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 서울의 와인을 향했다. 거기에 답을 아는 이가 있을 리 없었지만.
“왜 다들 나와 있어?”
커피 캐리어를 들고 나타난 매니저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대답을 갈구하던 은유란의 시선이 매니저에게로 향했다.
“···?”
*“그런 일이 있었어?”
매니저가 되묻자 끄덕이는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
은유란이 분풀이를 하듯 커다란 마카롱을 한입에 욱여넣고 우물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매니저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벽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안에 적힌 수많은 뮤지션들의 이름도.
“뭐,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차례대로 기울어지는 네 개의 머리를 보며 매니저가 포스터를 가리켰다.
“유란이 네 이름이 더 크잖아.”
#“역시 멋지네요.”
“그러게요. 헤드라이너가 아닌 게 이상할 정도로요.”
내가 동조하자 윤태영이 카탈로그 앞장에 붙은 라인업을 훑었다.
“그만큼 이번 라인업이 대단하다는 거겠죠. 우선 메인스테이지 헤드라이너부터가 미셸 루바니이니.”
살아있는 전설. 무려 5년간의 공백기를 깬 첫 무대가 이곳 서재페였다.
물론 꼭 그녀 때문이 아니라도 역대급 라인업이라 불릴 만 하다.
다른 재즈 페스티벌이면 당연하게 헤드라이너로 분류될 뮤지션들이 두 번째, 세 번째 줄에 자리 잡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 와중에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이란 이름이 큼직하게 박혀있다. 미셸 바로 아래.
등수놀이 같아 유치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페스티벌에서 이름의 크기는 뮤지션들에게 그만큼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차트 순위 이상으로.
인기, 인지도, 화제성을 골고루 함축한 척도니까.
‘빌보드 장르별 차트에 진입했던 게 효과가 크긴 컸지.’
한국 재즈 뮤지션으로 몇 번째니, 얼마 만이니, 사람들이 궁금하지 않아도 기자들이 떠먹여 줬으니까.
흐뭇하게 웃으며 카탈로그를 집어넣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은유란 매니저의 전화였다.
-대표님, 어디쯤이세요?
“그쪽으로 가는 중이에요.”
-넵, 알겠······.
페스티벌의 고질병. 데이터 병목현상이 도졌나 해서 화면을 봤는데, 끊어질 정돈 아니다. 뭐지?
“여보세요?”
-···아, 네. 대표님.
“무슨 일 있어요?”
-아뇨. 무슨 일이 있는 건······아니 생길 것 같기도. 대표님 빨리 오실 수 있으세요? 어? 이쪽으로 오는데?
누가 이쪽으로 와?
메인스테이지에 가까워지자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감이 멀다.
“누구요?”
언뜻 들리는 말에 전화를 끊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왜요? 무슨 일 있대요?”
윤태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근데 나도 모르겠다. 이게 뭔 일인지.
“일단,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얼른 메인스테이지 뒤쪽으로 향했다.
스태프들 사이를 통과해 은유란이 있다는 대기실로 다가가는데, 멀리서도 저기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겠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멈춰 서서 그쪽을 보고 있으니까. 심지어 재즈 뮤지션들까지도.
‘이성령이네?’
검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자신의 대기실 앞에 서서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은유란의 대기실 쪽을 노려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문 앞에 웅성대는 사람들을 지나려다 여의치 않아 캡모자를 벗었다.
“잠시만요!”
“어? 기로 프로듀서···!”
길이 열린다. 얼른 문고릴 잡아 돌렸다. 그리고 전화를 통해 들었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상황을 맞닥뜨렸다.
“대표님!”
매니저가 안도하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뒤쪽에선 그 윤태영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 와중에 의문이 든다.
‘왜 벌써 왔지? 아니, 그보다······왜 여깄지?’
악성 곱슬이라 해도 모자랄 것 같은 머리.
구릿빛 피부에 큰 눈과 두툼한 입술.
귀가 아닌 심장을 긁는 허스키한 목소리.
“미셸······.”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재즈계의 거장이 은유란을 끌어안듯 바짝 붙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길래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은유란 씨를 말했어요.”
여전히 이게 뭔가 싶다.
미셸이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도.
그 내용이 은유란을 칭찬한다는 것도.
은유란은 더 작아지다 못해 대기실 바닥 밑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자세다.
뭐가 꿀리냐고 허리 좀 펴라고 하고 싶은데, 내가 남 말할 처지가 아니네.
앤 더글라스를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놀랐다. 예기치 못한 충격이라.
“그리고 두 번째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바로 프로듀서님이었죠.”
“···저요?”
“노랠 정말 인상 깊게 들었거든요.”
싱긋 웃는 그녀를 보며 어쩐지 나도 허리가 굽는 듯하다.
“노랠 듣고, 대체 누가 만들었지? 했는데 내 매니저가 그러더군요. 이 사람 한국의 대중음악 작곡가라고. 흥미로워서 이전의 곡들을 찾아 들어봤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감사합니다.”
“뭘요. 원래 리스너가 감사해야 하는 건데. 아 참, ‘올해에 기대되는 아티스트’에도 선정됐더라고요?”
그러자 은유란이 얼른 알은체했다.
“미셸님의 이름도 들어갔잖아요?”
이에 미셸이 부드럽게 웃으며 끄덕였다.
“맞아요. 부끄러운 일이죠. 뒷방 늙은이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단 이유로, 진짜 거기 올랐어야할 신인 한 명을 밀어낸 셈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감명을 받은 듯, 은유란이 낮게 감탄한다.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마인드.
멋지단 생각이 안 들기가 힘들지.
“사실 제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게, 은유란 씨의 영향도 있었어요.”
“느, 느에?”
은유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상한 소릴 냈다. 뒤이어 통역사의 말을 들은 나머지도 적잖이 놀라는 눈치.
은유란이 귀여운 듯 엄마 미소를 짓던 미셸이 말을 이었다.
“재즈가 꼭 언어 같다던 은유란 씨의 인터뷰를 봤어요. 얼마나 재즈에 애정이 있는진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날 돌아봤죠. 다들 살아있는 전설이니 뭐니 하는데, 사실 활동을 쉰 지 5년째인 거예요.
난 내 언어를 잊고 있었어요. 활동을 안 하는데 무슨 살아있는 전설이겠어요. 그냥 죽은 전설이지. 그래서 공연도 다니고 앨범도 내고 다시 활발히 활동해보려고 해요.”
물론 그녀의 말처럼 저 이유 때문만은 아닐 거다. 하지만 어쨌든 영향을 줬다는 말에 은유란은 행복에 겨운 얼굴이 되었다.
그런 은유란의 모습에 나도 입꼬리를 올리는데, 미셸의 시선이 돌연 나에게로 향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프로듀서님의 곡을 받아볼 수 있을까요?”
#메인스테이지 앞에서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잔소릴 퍼붓던 학준이 형이 자초지종을 듣더니 돌연 인터뷰어로 변했다.
“미셸이 곡을 달라고 했다고?”
“앨범 수록곡으로. 물론 기준미달이면 떨어트리겠지만.”
“그, 그게 어디냐! 21세기 루이 암스트롱이라 불리는 여잔데!”
그러게. 그런 사람이 곡을 달라고 했지. 재즈곡이라곤 은유란 곡 하나가 전부인 나에게. 아직도 얼떨떨하네.
“그래서? 어떡하기로 했어?”
내가 학준이 형을 보았다. 빤히. 불길함을 느낀 그가 오만상을 찌푸린다.
“주름 생겨.”
“그게 문제냐! 너 설마!?”
“형이 내 매니저야? 왜 그래?”
“어, 할게. 내가 너 매니저 한다 오늘부터. 그러니까 다시 돌아가. 가서 한다 해 빨리.”
내가 고갤 돌려 윤태영을 보았다.
“이 사람 되게 이상하다, 그죠?”
“······제가 보기엔 오늘 중 가장 정상 같은데요?”
고로, 내가 이상하단 거군.
윤태영이 날 보며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또 처음이다.
헛헛하게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후회가 되진 않았다.
“하던 거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무리하면 동시에 작업 할 수도 있겠지.
효율적으로.
하지만 그냥 하기만 하는 게 목적이 아니기에, 선택지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던컨에게 시선을 던졌다.
헛바람을 삼키며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다섯.
‘부담 주려던 건 아닌데 말이지.’
학준이 형이 고갤 내젓는다. 윤태영은 말없이 웃었고.
“시간 거의 다 됐는데?”
내가 시간을 확인하며 화제를 돌렸다.
학준이 형의 한숨 소리를 끝으로 우리는 최대한 메인스테이지 앞으로 이동했다.
그래 봤자 아침부터 여기에만 있었을 것 같은 돗자리 족들 때문에 얼마 가까워지지 못했지만.
“보이냐?”
학준이 형이 속삭이듯 물었다.
“뭐가?”
“사람들이 엄청 쳐다보잖아, 애들을.”
그의 말대로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눈이 던컨에게로 꽂히고 있었다.
확실히 저렇게 잘생긴 애들이 다섯이나 뭉쳐 다니니 눈에 띌 수밖에.
내가 끄덕였다.
“뿌듯하네.”
“무슨 아빠냐?”
“아까 보니까 애들 챙기는 게 오히려 형이 아빠 같던데?”
“난 양부. 마음으로 낳았지···.”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란 이상한 소릴 해대길래 윤태영이랑 자릴 바꿀지까지 고민하는데, 마침 무대 세팅이 끝났는지 스태프들이 흩어졌다. 사람들은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이윽고, 환호성 속에 무대 위로 서울의 와인이 나타났다.
당당한 걸음으로 각자의 악기 앞에 다가선다. 그리고 체구보다 훨씬 큰 티셔츠를 펄럭이며 나오는 은유란이 보였다. 길게 늘어트린 여러 겹의 목걸이들이 반짝인다.
매직아워. 해가 막 넘어가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은유란이 마이크를 잡았다.
-스태프분들이 그러시더라고요.
환호성이 일순 잠잠해졌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메인스테이지로 모인 수천 명이 귀를 기울였다.
-이 마이크 스탠드가 이렇게까지 낮게 세팅이 가능한지 오늘 처음 알았다고요.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수천 명이 함께 웃으니 쩌렁쩌렁하다.
노련하네.
연말 콘서트에서 잠시나마 떨었던 모습이 이젠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노련하게 관객들과 호흡한다.
무명시절에 오로지 노래가 하고 싶어서 했다던 소규모 공연들 덕분일까.
그녀는 관객들과 소통하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말할 때뿐만 아니라, 노래 부를 때에도.
‘저렇게.’
보사노바 리듬에 맞춰 그녀가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속도가 빨라진다. 드럼이 삼바로 리듬을 바꿨다.
동시에 달라지는 콘트라베이스와 건반의 주법.
은유란의 간지러운 노랫말이 악기 위를 총총거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작은 몸짓 하나에 사람들이 크게 열광하고 격하게 들썩였다.
기대감 같은 거 예열시킬 필요도 없었다는 듯, 그녀의 노래가 스테이지의 열기를 순식간에 끓는점까지 끌어올려 버린다.
한참 동안 감탄만 하며 무대 위를 보았다. 그러다 학준이 형의 목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잘 봐. 너희도 곧 이런 환호를 받으면서 무대에 설 테니까.”
학준이 형이 웃으며 애들 사이에 불씨를 던졌다.
이 환호가, 비명이, 들썩임과 열기가 모두 자신들에게 향하는 걸 상상이라도 하는 듯, 환호가 커질수록 애들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마치 열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어느새 해외 진출을 위한 교두보라는 생각은 완전히 지워지고, 그냥 저들이 잘됐으면 좋겠단 생각이 가득 채워졌다.
열병이 옮은 것 같지.
앓다 보니 6월을 스치듯 지나쳤다.
그리고, 한여름.
보이그룹 대전이 열리는 7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