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기다림 끝에서 (7)
“······그래서요?”
홍보 담당자, 주재윤이 입술까지 적시며 묻길래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럴 순 없다길래 안될 게 있냐고 했죠.”
“······.”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김지희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맞는 말이네요. 안 될 거 없긴 하죠. 대표님이신데.”
목소리에서 시원함까지 느껴진다. 하긴, 김지희도 황 실장의 방식을 내켜 하진 않았지.
잠시 김지희 쪽을 돌아본 주재윤이 다시 재촉했다.
“그래서요? 그랬더니요?”
“망할 거라던데요? 그것도 처참히.”
말이 끝나자마자 김지희가 어처구니없는 말투로 성을 냈다.
“와, 그 사람 안 되겠네. 처참히라니! 어쩐지 첫인상부터가 별로였어요!”
음······처참히라곤 안 했었나? 뭐, 상관없지.
잠자코 있던 이강훈 팀장이 물었다.
“그러면, 공석은 그때 말씀하신 트레이너가 채우게 되는 건가요?”
“아마도요. 얘길 해보긴 해야겠죠.”
그러자 구석에 있던 직원이 파티션 위로 쑥 올라왔다.
“그분 아직 견적서 안 보내셨더라구요. 제가 전화해볼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저었다.
“아녜요, 내가 할게요.”
*홀을 빙글빙글 돌며 느긋하게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는데, 신호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한동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대표님! 그렇지 않아도 제가 견적서 보내드리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제가 커리큘럼 짜고 돈 받는 건 처음이라 얼마를 적어야 할지 그게 고민이······.
누구한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급하다.
죄송하다며 부가세가 어떻고, 원천징수가 어떻고까지 줄줄이 늘어놓길래 내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게 아니라, 이전에 보조 트레이너 자리 얘기했던 것 때문에 전화했어요. 기억나시죠?”
“아? 네, 네! 해외에 같이 갈······.”
“네. 그거에 대해서 얘길 좀 나눴으면 하는데, 혹시 언제쯤 시간 되시나요?”
말꼬리가 올라가기 무섭게 핸드폰을 박차듯 대답이 들려왔다.
“지, 지금요! 지금 됩니다. 바로 레이블로 가겠습니다!”
이미 다가오는 듯, 점점 커지는 목소릴 내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가 나타난 건 30분이 채 안 돼서였다.
가쁘다 못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타난 그가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지나가는 직원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요.”
“대표님 바쁘시잖습니까.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순 없죠. 하하.”
그가 후줄근한 가방을 바닥에 떨구듯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기대가 솟구쳐 올라오는데 간신히 틀어막고 있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 모습에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트레이너님, 여권은 있으시죠?”
“유효기간까지 넉넉합니다!”
“다행이네요.”
한계가 온 듯 들썩이는 한동휘의 어깨.
“그, 그럼 언제쯤 출발하나요? 아니, 그보다 저 보조 트레이너로 들어가는 게······맞는 건가요?”
정신이 없는지 말도, 생각도 꼬인다.
끄덕이자 애써 막던 기대가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게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아, 아 참!”
갑자기 허릴 숙이더니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원래 이렇게 정신없는 사람이었나 싶어 헛웃음을 짓는데, 그가 테이블 위에 파일을 올렸다. 지난번보단 얇지만, 결코 적은 양은 아닌.
“이건 견적서 보낼 때 같이 보내드리려고 한 건데······대표님께 커리큘럼을 드리고 나니 계속 아쉬운 점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이것 때문에 전 멤버들이랑 당시 트레이너분들도 만났었는데, 수시로 전화 와서 또 생각났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이건 그걸 추가로 정리한 겁니다.”
겉장을 넘겼다.
정리란 말이 무색하게 복잡스러운 내용들이다. 꼭 동창들이 모여서 흑역사를 떠드는 듯한 느낌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래서 더 좋았다.
실패한 사람들의 회고록, 자기개발서 같달까.
“이거 애들한테 필독도서로 지정해줘야겠네요.”
“하하, 근데 TKM 트레이너분이 괜찮아하실지 모르겠네요. 그분 계획이 또 있을 테니······.”
“그건 괜찮을 겁니다.”
“그래요?”
꽃이 만개할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보며 내가 끄덕였다.
“네, 방금 잘랐거든요.”
“···?”
#“여러분의 보조······아니, 보컬 트레이닝을 이어서 맡게 된 한동휘라고 합니다.”
멋쩍은 얼굴로 던컨 멤버들 앞에 선 한동휘. 아직도 자신이 메인으로 트레이닝을 하게 되었다는 것에 적응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아이들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라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넵!”
푸른 눈의 한국인. 엄대한만 빼고.
어설프게 웃은 한동휘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전 이전분하고 방식이 좀 다를 겁니다. 우선 포지션은 그냥 파트를 나누는 역할 정도로만 남게 될 거고요. 경계를 최대한 허물고, 메인이나 리드 보컬의 색을 따라가는 게 아닌, 던컨의 색을 새로 만들 겁니다. 여러분 각자의 색을 잘 조합해서요.”
아이들의 표정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던컨, 자신들의 색이 과연 뭘지 궁금해하는 눈치다.
나 역시 그렇고.
지금 한동휘의 머릿속도 마찬가지로 백지겠지.
섞어봐야 아는 거니까.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말이다.
아직 확신할 순 없어도, 나는 그 역할을 한동휘가 아주 잘 해줄 것 같았다.
“저, 괜찮았나요?”
첫인사를 마치고 나온 한동휘가 여전히 내 눈치를 보며 말한다.
부담스럽네. 뭔가 자신의 동아줄을 지탱하고 있는 지지대를 보는 눈빛 같다.
“네, 잘릴 정돈 아니었어요.”
“헙···.”
“아직은.”
“······.”
“농담이에요.”
하하하. 짧고 뚝뚝 끊어지는 웃음이 한동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푸슬푸슬하게 웃으며 커피머신 앞에 멈춰섰다.
“커피 한 잔 마실래요?”
“넵, 좋습니다.”
위이이이잉···.
반자동 커피머신이 원두를 갈고 내리는 동안, 우리는 던컨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크레마가 진하게 둘러진 커피를 들고 라운지로 자리를 옮겨서도 대화는 계속되었다.
“아, 그리고 이건 보컬과는 상관없는 얘기긴 한데요.”
한참 동안 던컨과 커리큘럼을 어떻게 접목시킬지 설명하던 그가 불쑥 말머릴 돌렸다.
“제가 이번에 예전 소속사 대표님도 만났거든요. 지금은 물론 고깃집 대표님이시긴 한데······.”
저게 연락이 되는 것도 신기하고,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하네. 회사가 엎어질 정도였다면 내부적인 문제도 많았을 것 같은데 말이지.
비록 회사를 제대로 끌고 나가진 못했지만, 그래도 좋은 대표였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궁금증이 그런 생각들을 덮어버렸다.
“그래서요?”
“뭐가 가장 후회되시냐고 여쭤봤더니, 이런 얘길 하시더라고요. 우리가 1집에서 성공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신선함이었는데, 2집에선 신선함이 벗겨진 상태라 문제들이 다 드러났다고. 포지션에 따른 실력의 편차는 그중 하나였고요.”
그의 말에 주억거리며 커피잔을 들어 올리려다 멈칫했다. 이어서 들려오는 그의 말에.
“근데, 정작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던 것 같다고 하셨어요.”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겪어보고, 깨지고 온 사람. 그것도 결정권자로서 있었던 대표의 말이기에.
아주 사소한 말이라도 현재 우리의 개선점이 될 수 있으니까.
물끄러미 바라보자 한동휘가 입을 열었다.
“캐릭터요.”
“캐릭터······?”
“속된 말로, 우리에겐 덕질할 요소가 없었단 거죠.”
#5월의 마지막 날.
나는 오랜만에 설레는 기분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뒤엔 던컨 멤버들을 태우고서.
올림픽 공원에 도착하자, 미리 와서 페스티벌을 즐기고 있던 윤태영이 입장 부스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소속 뮤지션 중 유일하게 일정이 맞은 학준이 형이 얼굴을 꽁꽁 싸맨 채로 손을 휘적거렸고.
“안 더워?”
“이쯤이야, 내가 가면 쓰고 다닌 게 몇 달인데.”
“땀이 줄줄 흐르는데?”
마스크 아래, 자신의 목을 만져본 학준이 형이 이내 실토했다.
“······사실 더워 미치겠어. 해 언제 지냐고 대체!”
해가 부쩍 길어지긴 했지.
되지도 않는 허세를 끝낸 학준이 형이 이번엔 분을 토해냈다.
“안 되겠다. 오늘은 유란 누나한테 제대로 한 턱 쏘라 해야겠어.”
“그게 왜 거기로 튀어?”
“누나 때문에 온 거니까!”
하늘색 스트라이프 티를 펄럭거리며 당당하게 말하는 학준이 형.
본인이 오고 싶다고 해놓고선···.
파렴치한 모습에 혀를 내두르는데, 뒤쪽에서 임현택이 의아한 목소릴 냈다.
“누나요···?”
그걸 들은 학준이 형이 이죽였다.
“유란 누나가 나보다 나이 많거든. 몰랐지?”
당연히 몰랐겠지. 상상이나 했겠나.
그 얼굴과.
저 얼굴이.
한편의 반전 영화를 목도한 애들이 놀라 한다.
“세상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법이지.”
내게 멜로디가 들리는 것처럼.
“잠깐, 그 말은 내가 노안이란 거야 누나가 동안이란 거야.”
“왜 둘 다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
“임마!”
펄쩍 뛰는 학준이 형을 보며 애들이 웃었다.
옆에서 소리 없이 웃던 윤태영은 손에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확인하더니 안쪽을 가리켰다.
“지금 수변 무대에 팻 마티노 트리오 차례인데 가실 분 있나요?”
“팻 마티노 좋죠.”
내가 끄덕거리며 윤태영의 옆에 서자, 학준이 형이 고갤 내저으며 던컨 애들 옆으로 움직였다.
“보컬 없는 노래는 애들 듣기 지루해요. 난 애들이랑 메인 스테이지에서 기다릴게.”
어째, 본인이 지루해서 가는 것 같긴 하지만.
“니네 소세지 좋아하냐?”
“당연하죠!”
“푸드존 들렸다 가자. 내가 다 사준다!”
“오오오!”
피리 부는 사나이 마냥 애들을 이끌고 사라지는 학준이 형을 보며 웃다가, 윤태영과 걸음을 옮겼다.
“근데 좀 의외네요. 형이 팻 마티노 트리오 무대를 보고 싶어 할 줄은 몰랐거든요.”
“왜요?”
“악기 구성에 베이스가 없잖아요.”
“아아, 그렇죠. 사실 그래서 최근까지도 관심 없는 밴드였어요. 그러다 무슨 다큐멘터리에서 처음 봤는데···무슨 연주 하는 것도 아닌 그냥 멤버들끼리 대화하는 거였는데, 그게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그거 보고 바로 연주 영상들을 찾아봤죠.”
“신기하네요. 형은 뭔가 다큐를 봐도 연주 장면만 쏙쏙 골라볼 것 같은데.”
윤태영이 푸스스 웃었다.
“원래 그랬어요. 근데 요즘은 뮤지션들이 가진 생각이나 성격, 그리고 일상 같은 게 궁금하더라고요. 결국, 그런 것들이 모여서 음악으로 표현되었을 테니까요.”
참 윤태영답다고 생각하며 주억거렸다.
그나저나, 생각, 성격, 일상이라······.
한참을 신나게 떠들다 보니 어느새 수변 무대였다. 이미 계단에 많은 사람들이 따닥따닥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빙 돌아 구석 쪽으로 향했다.
“이쪽에 서서 볼까요?”
“그러죠. 음, 아직 세팅 중인가 보네요. 시간이 좀 지났는데.”
검은 스태프 옷을 입은 이들이 오르간과 기타, 그리고 드럼에 붙어 사운드를 체크 중이었다.
팻 마티노 트리오는 바로 저 뒤에서 무대 위에 서길 기다리고 있겠지.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은 어떻게 하고 있을려나.’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은유란의 무대까진 두 시간 남짓.
나는 그때까지 이 기대감을 충분히 예열시킬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