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기다림 끝에서 (5)
그 시각, 아더 레이블.
“안녕하세요.”
“아, 김지희 씨죠? TKM 보컬 트레이너 황동규라고 합니다.”
황 실장이 웃으며 아더 레이블 안으로 들어왔다. 가벼운 시선으로 레이블 안을 쭉 훑어보는 그에게 김지희가 말했다.
“애들은 위층에 있는 라운지에 모여있어요.”
“아, 라운지도 있어요? 좋네요.”
끄덕거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김지희를 따라 3층으로 올라온 그가 옹기종이 모여 앉은 아이들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외국인도 있네?”
김지희가 얼른 말했다.
“혼혈이요.”
“한국말은 해요?”
“네, 잘 해요. 어려운 발음에 한해선 좀 어눌한 게 있는데, 노래할 땐 전혀 문제없을 정도예요. 그, 메일로 보내드린 파일에 아이들 인적사항도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황 실장이 턱을 긁적이며 김지희를 돌아봤다.
“아, 그건 안 봐서······직접 보는 게 빠르죠. 보면 금방 사이즈가 나오니까.”
“아, 네···.”
“아무튼, 제가 애들하고 얘기해보겠습니다. 지희 씨는 내려가셔서 하시던 일마저 하시면 될 것 같네요.”
김지희도 옆에서 계속 지켜볼 생각은 없었기에 끄덕이며 라운지를 떠났다.
그녀가 내려가자 황 실장이 어정쩡하기 서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서 있던 정현우에게 먼저 물었다.
“네가 센터?”
“네?”
“아, 아직 그런 체계는 안 잡혔나? 포지션은?”
“리드 댄서입니다.”
다음으로 임현택에게 질문이 이어졌다.
“넌?”
“서브 보컬입니다.”
황 실장의 시선이 오승준을 지나서.
“리드보컬입니다.”
“그럼 네가 메인?”
신예석에게로.
“아뇨, 전 랩입니다.”
“그래? 안 그러게 생겼는데, 의외네. 그럼 외국인 네가 메인이겠네?”
엄대한이 유쾌하게 웃었다.
“저 혼혈입니다!”
“메인이냐니까. 한국말 서툴러?”
“아뇨! 유장합니다!”
황 실장이 피식 웃었다.
“캐릭터는 괜찮네. 그러면······.”
말꼬릴 늘리던 황 실장이 이내 엄지로 안무실을 가리켰다.
“노래나 일단 들어볼까?”
#한동휘에게 커리큘럼에 대한 견적서를 보내달라고 말하며,
해외에 나가 있을 때 함께 움직일 보컬 트레이너가 필요하니 이 부분에 대해선 TKM에서 온 트레이너와 상의 후에 연락을 주겠단 말도 덧붙였다.
나는 여러모로 한동휘란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확실히 해외에 실패했던 경험이 우리에게 도움도 될 것 같고.
‘스타일이 맞다면 좋을 텐데.’
TKM 보컬 트레이너와 한동휘 말이다.
둘의 교육 스타일이 제대로 맞아준다면 금상첨화다.
업계 탑급으로 분류되는 보컬 트레이너인만큼 실력은 확실하겠지. 한동휘도 아직 보진 못 했지만 짜온 커리큘럼만으로도 보통은 아닌 것 같고.
묵직해진 가방을 조수석에 밀어 넣고 시동을 걸었다. 레이블이 아닌 문래역 쪽으로 네비를 찍었다. 윤태영의 작업실이 있는 곳.
한참을 달리면서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해졌다.
한동휘와의 대화 때문인지, 그가 준 세세한 커리큘럼 때문인지, 운전하는 내내 던컨의 앞으로가 그려졌다.
칼군무와 뛰어난 가창력을 뽐내며 미국에서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모습 말이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삐져나왔다.
던컨과 관련된 모든 일에 관여하고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얘네들이 아더 레이블의 뮤지션처럼 느껴져서.
틀린 소린 아니지. 지금은.
하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TKM의 품으로 되돌아가야 할 그룹인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제작만 아더 레이블에 맡기는 거니까.
쩝.
‘뭐, 계약서상으로 따지면 뮤지션 모두가 엄밀히는 TKM 소속이나 마찬가지긴 하지만······.’
괜히 입이 텁텁해져 언제부터 차에 굴러다녔는지 모를 생수를 들이켰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릴 물다 보니 어느새 윤태영의 작업실 앞에 도착했다.
비척대며 들어가자 한창 작업 중이던 윤태영이 의자를 돌리며 일어났다.
“발소리 들리길래 피디님이겠거니 했어요.”
내가 웃으며 물었다.
“여기 저 밖에 안 와요?”
“그죠. 이제 학생도 없으니까.”
윤태영의 마지막 제자까지 지난겨울 입시에 성공했기에 이제 그는 더 과외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음악에 집중 중이지. 뭐, 언젠 안 했냐 만은.
“아예 아더 레이블로 들어오라니까. 레이블에 작업실 남는 것도 많은데 굳이 월세 낼 필요 없잖아요?”
“괜찮아요. 여기가 편해요. 작업이나 연습도 잘 되고.”
본인이 그렇다는데 뭐 별수 있나.
옆에 의자를 끌어 앉아 윤태영이 방금 전까지 작업하던 화면을 훑었다.
“이거 제가 부탁한 거예요?”
윤태영이 끄덕인다.
던컨 멤버들이 모두 결정된 후, 나는 윤태영에게 리듬을 부탁했다. 멜로디도 안 들리는 마당에 어떻게 해야, 보다 좋은 곡을 뽑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방법을 조금 바꿔봤다. 댄스곡인 만큼 리듬이 잡혀 있으면 멜로디를 만들어내기가 한결 수월할 것 같아서.
윤태영이 마실 걸 가져와 의자에 앉았다.
“위쪽이 베이스라인이고, 아래쪽이 드럼이랑 퍼커션이요.”
“들어볼까요?”
내 재촉에 윤태영이 트랙을 재생한다. 단순하지만 꽉 찬 비트와 함께 이펙터 먹은 베이스 소리가 현란하게 들려왔다.
와. 좋은 곡들은 간단한 악기 구성만으로도 표현해야 할 것들을 모두 표현한다는데······.
‘지금 이 트랙이 딱 그렇네.’
리듬 악기만으로 곡이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니 말 다 했지.
“그냥 여기에 노래 불러서 음원으로 내도 되겠어요. 리듬 악기들만으로 이게 될 줄은 몰랐네.”
허탈하게 말하자 윤태영이 웃었다.
“전 여기에 피디님의 멜로디와 편곡이 들어가면 어떤 느낌일지가 엄청 기대되던데요?”
“너무 기대하지 마요. 그냥 리듬으로만 가자는 소리 나올까 봐 무서우니까.”
걱정 반 농담 반을 담아 웃었다.
파일 가져가도 되겠냐고 묻자 윤태영이 마무리 단계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베이스를 들었다.
베이스를 다이렉트로 연결해 녹음하기 때문에 옆에 있다고 잡음이 들어갈 일은 없었지만, 혹시나 집중에 방해될까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작업을 구경했다.
굵은 현을 잡아 뜯듯 연주하는 윤태영.
그에 따라 트랙에 새겨지는 강렬한 파형.
‘이렇게 남이 작업하는 걸 보는 건 또 오랜만이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괜히 배가 간질간질했다. 놀이동산에 있는 바이킹을 타는 것처럼.
요새 프로젝트 던컨을 준비하느라 통 음악에 손을 못 댔었지.
이러다 금단증상 오는 건 아닌가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윤태영이 작업을 끝냈다. 나는 피드백할 것도 없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USB를 받았고.
“다음 일정은 뭐예요?”
“저야, 뭐······.”
“베이스 연습?”
“그렇죠.”
푸스스 웃는 윤태영.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한동휘 만나느라 커피 마시고, 여기 와서 윤태영이 건넨 음료수 한 병 마신 게 전부였다.
윤태영이야 말할 것도 없을 거고.
작업 한번 시작하면 네 시간이고 다섯 시간이고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있는 양반이니···.
“밥 먹었어요?”
“아뇨.”
거 봐.
윤태영이 건네는 USB를 받으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좀 먹죠, 우리.”
#“그럼 서재페 때 봐요.”
윤태영이 반짝이는 눈으로 끄덕였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와 미셸 루바니란 글씨를 쓸 것만 같다. 밥 먹으면서도 계속 그녀에 관한 얘기뿐이었지.
학준이 형이 항상 나보고 밥 먹을 때 음악 얘기한다며 절레절레 머릴 흔드는데, 나보다 더한 사람이 있다는 걸 좀 알아줬으면 싶네.
사무실에 도착한 건 해가 중천에 뜬 세 시쯤이었다.
중간중간 에어컨을 틀며 여름이 스멀스멀 온다는 걸 실감했다.
‘올여름은 큼직한 이벤트들이 많지.’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의 페스티벌 데뷔.
여름의 끝자락에서 시작될 던컨의 데뷔.
그리고 나와는 상관없지만, 그래서 더 흥미진진한 퀀텀보이즈와 솔라톤 MKO의 차트 싸움.
그래도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가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사무실에 올랐다.
이야기보따리를 맡겨둔 사람처럼 곧장 김지희를 찾았다.
“지금 애들 댄스 레슨 중이죠?”
“네.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요.”
끄덕이며 벽에 기댔다. 그리고 아침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보컬 레슨은 어땠대요? 얘기해 봤어요?”
파티션을 등지고 의자에 앉아 날 올려다보던 김지희가 입술을 달싹인다.
“아뇨, 바로 안무가분들이 오셔서 얘기는 못 해봤는데······.”
못 해봤는데?
“아까 나연이가 궁금하대서 잠깐 올라갔었거든요. 슬쩍 봤는데, 대한이랑 승준이만 레슨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나머지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멀뚱 서 있고. 근데 그게 잠깐만 그런 게 아니라, 다음에 또 올라갔을 때도 그 상태라······.”
미간을 찌푸리며 갸웃거렸다.
엄대한과 오승준만?
“메인이랑 리드만이네요?”
“네, 그렇죠. 일단 첫 수업이니 그런가 보다 하고 내려왔었어요. 일단은 트레이너의 영역이기도 하고요.”
주억거리며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이번엔 김지희가 물어왔다.
“경호 씨가 소개해준 트레이너분은 어땠어요?”
“잘 준비해주셨어요. 전 마음에 들었고요. 이번에 오신 트레이너님이랑 상의해서 보조나 미국 오갈 때 함께 다닐 역할로 섭외를 하고 싶더라고요.”
“그거 좋네요! 황 실장님은 TKM 쪽도 봐야 하니 미국까진 못 가실 거 아녜요.”
“그렇겠죠.”
끄덕이며 벽에서 등을 뗐다.
“일단 제가 시간 될 때 얘기해볼게요. 혹시 앞으로도 계속 레슨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면 저한테 얘기해주세요. 얘기할 때 같이 물어볼 테니.”
아무래도 A&R인 김지희가 물어보는 것보단 내가 낫겠지.
알겠다는 김지희를 뒤로하고 작업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컴퓨터를 켜며 가방에 고이 모셔온 윤태영의 USB를 꺼냈다.
툭, 툭 떠오르는 트랙들과 그 안의 파형.
김지희의 얘길 듣고 찜찜했는데, 비트를 재생하는 순간 그런 것들이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공책을 빠르게 넘기면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처럼, 내 바람과는 다르게 시간은 속도감있게 흘러갔다.
윤태영이 가져다준 사이다 같은 비트에 수많은 멜로디와 화성을 얹었고, 그러다 또 엎었다.
그걸 반복하며 어디선가 냄새를 맡고 온 기자들의 질문에 술래잡기 같은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물론 내가 아이돌을 제작한단 소식은 비밀이 아니었기에 금세 퍼져 또 한차례 열병 같은 실검에 오르기도 했지.
그러다 다시 작업실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고.
그러던 중 김지희가 찾아왔다. 또 보컬 트레이너, 황 실장에 대한 얘기였다. 그는 여전히 엄대한과 오승준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던컨 멤버들에게 물어봤더니 나름의 이유가 있긴 하더라.
아이돌 멤버 전원이 모두, 모든 걸 잘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니 선택과 집중이 효율적이라는 것.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기도 하지만, 글쎄.
‘난 음악하면서 효율을 따지는 편이 아니라···.’
시간이 나서 3층으로 올라가 봤다.
김지희의 말처럼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나머지 멤버들을 보고서 다시 내려왔다. 한 번 얘길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어차피 한동휘에 대한 얘기도 하려던 참이었으니······.
카운터로 다가가 여직원에게 부탁했다.
“황 실장님 레슨 끝나면 제 작업실로 오시라고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