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53화 (153/221)

153. 기다림 끝에서 (4)

“황 실장님!”

장기로와 데뷔조 월말평가를 진행했던 캐스팅 디렉터가 TKM 건너편 카페에 앉아있다가 손을 휘적거렸다.

맞은편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던 캐스팅팀 박 팀장도 고개를 돌렸다.

빵 가득한 트레이를 들고 자리를 잡으려던 남자가 박 팀장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박 팀장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아더 레이블로 지원 나가는 게 저 친구지?”

캐스팅 디렉터가 끄덕이자 박 팀장이 혀를찼다.

“쯧.”

“한번 불러볼까요?”

“불러서 뭐하게?”

퉁명스럽게 되묻는 박 팀장에게 캐스팅 디렉터가 사근거렸다.

“지난번에 같이 지역 오디션 내려가서 얘길 좀 해봤는데, 말이 꽤 통하더라고요.”

“······그래?”

박 팀장이 별말 없이 으쓱거리자 캐스팅 디렉터가 눈치껏 황 실장을 데려왔다.

“아니, 밥도 안 드시고 일하시는 거예요?”

“네, 뭐, 그렇죠.”

캐스팅 디렉터가 박 팀장을 보며 말한다.

“퀀텀보이즈 애들 봐주고 오셨대요.”

“아직도 봐주나 보네?”

캐스팅 팀장의 물음에 트레이를 내려놓은 황 실장이 웃었다.

“네. 부족하다 싶은 게 있으면 계속 연락이 와서요.”

지켜보던 캐스팅 디렉터가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이 퀀텀보이즈를 만드셨네요? 팀장님은 뽑으셨고, 실장님은 가르치셨고.”

박 팀장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따지면 퀀텀보이즈만이게? 제인도 내가 뽑았고, 하서윤도 내가 뽑았는데. 자네도 둘 다 가르쳤었지?”

“그렇죠. 연습생일 때, 잠깐.”

“이제 머리가 크니까 연락 없지?”

황 실장이 끄덕이자 캐스팅 디렉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와, 너무하네. 자기들 만들어준 게 누군진 알아야지.”

그러면서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말을 꺼낸다.

“그럼 아더 레이블은 언제 가세요?”

“다음 주부터요.”

“에고, 이제 힘드시겠네요.”

“···?”

황 실장이 갸웃거리자 캐스팅 디렉터가 옳다구나 하고 술술 쏟아냈다.

“장 대표 일 어렵게 하기로 유명하잖아. 무명을 건들질 않나, 짜바리된 밴드에 손을 대지 않나.”

“일하는 방식이 까다로운 편이라고는 하는데, 그래도 다 성공시켰잖아요.”

황 실장의 대답에 박 팀장이 불편한 듯 들썩였다. 그 와중에도 누가 듣는 이는 없나 카페 안을 빠르게 훑으면서.

“대표는 얼어 죽을. 그리고 걔 본인이 그린대로 그림이 안 나오면 그대로 판 엎는 놈이야. 아마 자네도 가서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게 될걸?”

“제가요?”

황 실장이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디 가서 보컬 트레이너라고 무시 받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헛웃음까지 터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상을 찌푸리며 끄덕이는 박 팀장.

“예전 길 피디, 그 새끼 때도 그랬잖아. 맘에 안 든다고 엎어버렸지. 십수 년 이 바닥에 있는 선배도 받아버리는 마당에 자네라고 다를까.”

황 실장의 눈썹이 꿈틀댄다.

박 팀장이 작게 웃고 있는 캐스팅 디렉터를 슬쩍 보며 쐐기를 박았다.

“조심해.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간 머리채 잡고 휘두르려 들지도 모르니까.”

#던컨 멤버들에겐 때아닌 방학이었다.

잠시 쉬어가는 타이밍이랄까. 본격적으로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데뷔조 때가 그리워질 정도로 훨씬 바빠질 테니까.

그렇게 보내놨더니 딱 하루 쉬고는 며칠째 레이블에 꼬박꼬박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대체 뭘 하냐고 김지희한테 물어봤더니 안무실에 모여 춤 연습도 하고 개인 연습실에서 노래도 녹음하며 하루를 꼬박 보내고 우르르 퇴근한단다.

그게 기특해서 치킨과 떡볶이 같은 것들을 사 들고 올라왔다. 이것도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되면 쉽게 못 먹는 것 중 하나니까.

“피디님!”

안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우렁찬 인사가 밀려왔다.

플로라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땐 피디님 소리가 투호마냥 머리 위로 날아와 꽂히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묵직하다.

내게 인사하며 어느새 시선은 양손에 든 봉지로 모인다. 피식 웃으며 풀어놓자 애들이 우와 거리며 달려들었다. 보이그룹은 식비 항목이 따로 측정되는 이유가 이래서구나 싶네.

“방학 마지막 날인데 오늘은 좀 쉬지 그랬어.”

그러자 애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 나오는 게 더 좋은데요?”

“집에 가자니 부모님 다 일가시고, 숙소에 있자니 심심하고, 근데 여기 다 같이 모이면 뭔가 의욕도 생기고 좋아요.”

내가 피식 웃었다.

“숙소 정해진 거 알아?”

내 물음에 엄대한이 떡볶이를 한가득 머금고 끄덕였다.

새하얗고 큼직큼직한 이국적인 얼굴로 떡볶이를 두 개씩 포크에 꽂아 입에 넣으니 신기하긴 하네.

아예 한국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미국인 혼혈이라 식습관이 그냥 토종 한국인이었다. 선지해장국을 좋아한다고 이강훈 팀장이 기가 차 했었지.

“들었어요! 엄청 넓다고!”

그치. 방이 3개니까.

“이제 다음 주부턴 거기로 들어가게 될 거야.”

설레는 듯한 표정들 사이로 임현택이 입맛을 다신다.

“데뷔조 애들이랑 헤어지게 돼서 서운해?”

“아뇨?”

임현택이 씩 웃는다.

“애들 부러워하는 눈초리가 제법 쏠쏠했거든요. 평소엔 나이만 많다고 은근히 무시하더니. 흐흐.”

내가 너무 순진한 생각을 했구나.

헛헛하게 웃는데, 오승준이 불쑥 물어왔다.

“근데 부모님껜 어디까지 말씀드려도 되나요? 이번에 집에 갔더니 무슨 일이냐고,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라고요.”

“네가 아는 데까진 괜찮아.”

“에? 아는 게······아는 게 별로 없는데요?”

내가 끄덕였다. 그거라며.

“입이 근질근질할까 봐 너희에게도 일부러 천천히 알려주고 있어. 뭐, 그렇다고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니까 걱정 말고.”

우렁찬 대답 소리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핸드폰이 야단이라.

안무실에서 나오며 전화를 받았다.

숙제 아닌 숙제를 받아간 보컬 트레이너 한동휘가 목이 잠긴 톤으로 말했다.

-대표님, 저 한동휘입니다.

“아, 네.”

-내일쯤이면 커리큘럼 정리가 마무리될 것 같아서 연락 드렸습니다.

“벌써요?”

-대표님과 직원분들이 정리해놓으신 파일 덕분에 속도가 좀 붙었습니다.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작업이라 즐겁기도 했고요.

잠긴 목에서 의욕이 둥둥 뜬다. 그게 느껴져서 은근히 기대됐다.

“그럼 내일 댁 앞으로 가겠습니다.”

-네? 아, 아닙니다. 제가 가도 괜찮습니다.

“숙제까지 내드린 마당에 어떻게 그럽니까. 이번엔 제가 갈게요.”

약속을 잡고, 전화를 마쳤다.

통화하다 보니 어느새 테라스까지 걸어 나왔네.

돌아서서 라운지를 통해 다시 안무실로 가려는데, 화장실로 들어가는 복도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애들이 화장실에 있나 싶었는데, 한 명 목소리만 주구장창 들렸다. 게다가 좀 높아진 톤.

‘정현우?’

잠시 멈춰섰다.

“아니, 그게 아니라······아직은 못 말해. 거짓말하는 거 아니라니까?”

정현우가 답답한 듯 목소릴 쥐어짜 내고 있었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주변 눈치를 보는지 목소리가 확 작아졌다.

“여기서도 차차 얘기해주시겠대. 어떻게 바꿔드려. 여기가 무슨 학교야? 정확히는 나도 잘 몰라. 엄마, 그냥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 돼요?”

나도 모르게. 정말 무심결에.

발이 그냥 나갔다.

그대로 지나치는 게 아니라 멈춰섰다.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퉁이에 딱 붙어 입까지 가려가며 애원하던 정현우의 등이 보인다. 전화를 끊은 그가 돌아서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디서 본 것 같은 표정이네······.’

*“어머니셔?”

“네···.”

“뭐라고 하시는데?”

정현우가 우물쭈물했다.

“그냥, 잘 믿지를 못하셔서요. 계속 그만두라고 했더니 그거 피하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고.”

“원래 아이돌 준비하는 거 반대하셨었어?”

“좋아하시진 않았죠. 힘겹게 데뷔를 해도 미래가 불투명하지 않냐면서요.”

“맞는 말씀이긴 하지.”

내가 웃었다.

정현우도 힘없이 따라 웃었고.

“그러다 다치고 데뷔 무산된 이후엔 좀 더 강하게 반대하시기 시작하셨어요. 지금까지.”

내 시선이 자연스레 정현우의 발목으로 향했다. 저것 때문에 포텐업에 발탁되지 못했었다고 했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내가 어머니와 통화를 해봐도 될까?”

“피디님이······직접요?”

내가 끄덕였다.

“그편이 가장 확실할 것 같아서. 네 불안에도, 그리고 어머니 불안에도.”

빙그레 웃으며 눈을 동그랗게 뜬 정현우를 달래 안무실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통화를 시작했다.

예상대로 정현우 어머니는 반대라기보단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 걱정이 뭉치고 뭉쳐 꽤나 단단하고 크게 엉켜있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통화를 했다.

그만큼 정현우 어머니의 불안은 녹이기 힘든 얼음덩이였다.

걱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정현우 어머니와 그저 침묵했던 엄마.

방식은 다르지만, 그게 누구보다 익숙해서.

그리고 나도 그때의 나와는 많이 달라서.

엉킨 실타래를 조금은 능숙하게 풀 줄 알았다.

여전히 찜찜한 목소리로, 하지만 그럼에도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남기는 정현우 어머니.

나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좋았다. 지금의 내가, 예전의 엄마에게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한 것 같아서.

안무실로 다시 돌아오자 애들은 먹을 걸 정리하고 한창 춤 연습 중이었다. 래퍼인 신예석과 연습생조차 아니었던 엄대한에게 그래도 나름 데뷔조였던 오승준과 임현택이 시범을 보여주는 모양새.

혼자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현우에게 다가갔다. 짐짓 긴장한 얼굴로 날 보길래 웃었다.

“조금씩 변하실 거야.”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도 그러자.”

#“원래 있던 커리큘럼 가져오신 거 아니죠?”

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한동휘가 건넨 종이들을 한 장씩 넘기는데, 이렇게 보다간 하루가 다 가겠다 싶었다.

“양이 좀 많죠? 제가 막 정리하고 그런 솜씨가 없어서 예상보다 두꺼워졌네요.”

“확실히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긴 하겠네요.”

웃으며 계속 넘겼다.

발성, 발음, 조음점 잡기, 호흡, 고음······.

“앞부분이라 그런지 포지션보단 전체적인 실력 상승에 초점을 두고 있네요?”

내 물음에 한동휘가 끄덕였다.

“그 부분에 대해선 평소에도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제 실패의 경험도 있고 해서 고민을 좀 해봤는데······그룹이니만큼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어느 정도는 메꿀 수 있지만, 그게 완벽할 순 없겠더라고요.

분명히 빈틈이 보일 수밖에 없어요. 우리나라야 아이돌 그룹 전체에게 발라드 가수만큼의 가창력을 바라지 않지만, 미국은 아니었죠.

색안경을 끼고 쟤네 뭐 하는 놈들이지? 하고 노려보니 더 잘 보이거든요. 빈틈이.”

자신의 경험을 섞어가며 말하던 한동휘가 그때를 상기하는지 조금은 착잡해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이 만든 커리큘럼을 보며 금세 밝아진다. 희망이라도 발견한 듯이.

“이거 만드시면서 어떠셨어요?”

또 한 장을 넘기며 물었다.

문득 궁금해져서.

“즐거웠어요. 과거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했을 텐데, 같은 후회들을 하나씩 고치면서······.”

말꼬릴 흘리던 한동휘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

“오히려 후련해지더라고요. 이제라도 이런 기회가 주어져서 다행이에요.”

그러네.

이 사람은 애초에 자신이 트레이너를 맡게 되리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유명 트레이너와 경쟁할 생각도, 의지도 없다.

단지 과거의 후회를 되짚으며 후련해한다.

그리고 그걸 기회라 말한다.

새삼 내가 엄청난 기회를 쥐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바로잡는 상상만으로 후련해하는걸, 나는 진짜 할 수 있구나.’

분명,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는데 유독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기회와 능력이 나 혼자만의 성공을 위해 사용되어선 안 되겠다고.

어려운 길이 꼭 옳은 길은 아니겠지만.

옳은 길 같다면, 어려워도 꼭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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