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52화 (152/221)

152. 기다림 끝에서 (3)

일에 치여 달리다가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시야가 넓어지며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학준이 형.

난생처음 찍은 음원차트 1위 자리에서 내려온 지는 꽤 됐지만, 아직도 <미스터리 뮤지션>에선 부동의 1위다.

벌써 10주째 1위에 앉아 있는 셈.

이젠 <미스터리 뮤지션>을 보는 시청자라면 누구나 우리 동네 김대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이게 뭐가 미스터리냐며 문제 삼지 않았다.

그가 부르는 다음 노래를 듣고 싶으니까.

한편, 뉴하이는 1위를 줄곧 유지하다가 화력 짱짱한 걸그룹이 컴백하며 2위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퍼니스 엔터테인먼트가 새로운 소식을 알리며 다시 정상을 탈환했다.

이재학의 앨범에 뉴하이가 세션으로 참여한다는 소식이 알려진 것. 분단되었던 팬들이 한데 뭉친 거다.

뉴하이를 신랄하게 까내리던 이재학의 팬들이 지금은 뉴하이의 1위를 힘껏 밀어주고 있는 상황이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한동안은 엎치락뒤치락할 것 같지.

‘좋네.’

내가 벌렸던 일들이 내 손을 떠난 후에도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고 있다는 게.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프로젝트 던컨.

어쩌면 레이블 소속 뮤지션들의 무대를 넓혀줄 수도 있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유재완 대표가 기대하는 바를 제대로 채워준다면.

그리고 성공의 대가로 프로젝트 던컨에 버금가는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낸다면, 그렇게 되겠지.

#박경호를 보고 완전히 얼어버린 아이들을 연습실 밖에서 지켜봤다.

나이도, 키도, 외모도, 그리고 잘하는 것까지도 천차만별.

그런데 내 눈에는 벌써 익었나 보다. 익숙할 정도다.

‘너무 많이 떠올리나?’

저 얼굴들이 한데 모여 춤추며 노래 부르는 장면을 계속 되새김질하긴 했지.

‘멜로디만 들렸다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네.

방법이 없다. 내가 더 노력해서, 아쉬움을 메꿀 수밖에.

예전 같았으면 겁부터 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들려오는 멜로디 없이도 뮤지션에게 필요한 노래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확신 말이 있었다.

‘멜로디만큼은 아니더라도 말이지.’

달콤 쌉싸름한 입맛을 다시며 내려왔다.

바쁜 직원들을 지나쳐 평소엔 비품실처럼 쓰던 방으로 향했다. 지금은 ‘팀-프로젝트 던컨’이란 글씨가 붙어 있는.

“팀장님.”

내가 문을 열며 은근하게 불렀다.

결혼식장에 온 듯 멀끔한 차림의 남자가 팀원들과 얘길 하다가 돌아본다. 이번에 이 팀의 팀장을 맡게 된 이강훈이었다.

그가 가죽 냄새 물씬 나는 수첩을 꺼내 들며 내게 다가왔다.

“회의 중이었어요?”

“네, 간단하게요. 아, 애들 숙소를 추려 놨습니다. 평형대가 큰 걸 원하셔서 학동 사거리와 삼성동 가는 길 사이에서 찾아봤는데 괜찮은 매물들이 좀 있더라고요.”

보통 데뷔조 때 쓰던 숙소를 돌려가며 쓰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고. 너무 좁잖아. 그래서 최대한 큰 공간을 확보할 예산을 받아냈다.

이강훈 팀장과 숙소를 확정 짓고, 다음으론 교육 관련 카테고리로 대화를 넘겼다.

“정수연 안무가님한텐 연락 드렸어요?”

“네. 근데, 아무래도 퀀텀보이즈 작업으로 참여가 어려우실 것 같다네요.”

하긴, 국내 1위인 솔라톤과 제대로 붙을 판이 깔렸으니 영혼을 갈아가며 춤을 만들고 있을 거다.

“대신 TKM 안무가가 다음 주부터 아예 이쪽으로 출근하실 거라고 합니다. 보컬 트레이너도 마찬가지고요. 퀀텀보이즈를 데뷔 전에 연습시키신 분이래요. 확실히, 지원이 다른 때랑은 차원이 다르네요.”

“대표님이 기둥 몇 개 뽑아도 된다고 하셨으니 최대한 요청해 보죠.”

이에 이강훈 팀장이 의욕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아예 미국 스타일에 맞게 보컬 트레이너를 해외에서도 한 명 섭외하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 미국 오갈 때도 이점이 있을 것 같고요.”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그러면 우리나라 아이돌 특유의 느낌이 너무 죽어버릴까 봐서요.”

전부 미국에 맞춰 가면 K-POP이란 이점이 전혀 없어진다. 익숙한 보컬 그룹이 되어 버리겠지. 아시안이란 점만 부각 될 뿐. 근데 그건 오히려 좌충수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내 아이돌들이 해외 진출에 줄기차게 실패한 건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강훈 팀장의 반론도 일리가 있다.

무작정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하고 있다간 똑같은 전철을 밟을 확률이 높지.

우리가 가진 무기를 확실히 보여주면서도, 이전의 실수들은 배제 시켜야 한다라······.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려는데, 사무실 문이 열렸다.

박경호였다.

“어때요?”

내가 성격 급하게 묻자, 박경호가 씩 웃었다.

“피디님이 왜 뽑으셨는지 잘 알겠던데요? 장점들이 확실해요.”

그가 가지고 올라갈 때보다 두툼해진 파일을 내려놓았다. 이걸 보니 그것만은 아니란 걸 알겠다.

“그만큼 부족한 점도 많죠.”

박경호가 끄덕였다.

“트레이너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단 생각을 좀 했어요. 이제 그룹의 색을 잡아야 하니까요.”

“다음 주부터 전문 트레이너들이 TKM에서 지원을 나올 거예요.”

박경호가 반색하며 끄덕였다.

“전혀 걱정 없겠네요. 혹시 필요하시면 보컬 트레이너 한 분 소개해드리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 없겠어요. TKM 분들이면.”

내가 가볍게 되물었다.

“보컬 트레이너요?”

“네. 저랑 이전 학원에서 알게 된 형인데, 아이돌 꿈꾸는 애들 많이 데뷔시켰어요. 물론 TKM 전문 트레이너 분들이 더 대단하시겠지만, 그 형도 실력 있는 형이라서요. 게다가 아이돌 출신이니 애들 마음도 잘······.”

그의 말을 들으며 주억거리다가, 순간 덜컹해서 되물었다.

“···아이돌 출신이요?”

“네. 이름은 잘 모르실 거예요. 완전 옛날이기도 하고, 국내에선 얼굴 없는 가수 수준이었다네요.”

“계속 얘기해줘요. 그분에 대해서.”

“네? 아, 그 형이 있던 그룹이 해외에서 꽤 좋은 반응을 얻었었다고 하더라고요. 막 뉴스에도 났었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국내 반응도 덩달아 좋아지려는데, 거액을 들인 후속 앨범이 크게 실패하면서 회사 자체가······그렇게 된 거죠.”

서늘한 얘기였다.

마침 해외 진출을 준비하고 있으니 더더욱.

이제 막 출발선에서 달리려는데, 달리다 넘어진 얘길 듣는 것 같달까.

하지만 나는 그런 걱정보다 박경호가 말한 사람에 집중했다.

아이돌 출신에 해외 진출 경험까지 있다고?

왠지 흥미가 동한다.

“그분, 바로 연락돼요?”

#마음에 평화······아니, 재즈가 찾아왔다.

둥둥거리는 베이스 소리.

당김음으로 조금씩 빠르게 들어오는 피아노 컴핑.

무심하게 스네어를 쓸며 박자를 툭툭 잡는 드럼.

필요한 느낌만 딱 채워진 스윙 리듬 사이를 은유란의 목소리가 사뿐거렸다.

재즈 특유의 자박자박함을 정말 오랜만에 만끽하고서 나른함에 목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말했다.

“노래로 마사지 받은 것 같네요.”

헤실헤실 웃던 은유란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물었다.

“프로젝트 던컨은 어때요?”

“오늘 처음으로 다 같이 모였어요.”

“오, 두근두근하시겠네요.”

그런가. 다시 애들 얼굴을 떠올리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작게 끄덕이자 은유란이 말했다.

“서로 잘 맞아야 할 텐데요.”

정말 그래야 할 텐데.

담임 선생님이 된 것마냥 이런 걱정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고개를 젓는데.

“잘 맞지 않아도 방법은 있죠.”

서울의 와인 드러머가 말했다.

“리더의 독재.”

그러면서 은유란을 보며 히죽 웃는다.

그걸 느낀 은유란이 도끼눈을 뜨고 서울의 와인을 훑었고. 멤버들이 그런 은유란을 계속 놀려댔다. 나이가 깡패라며. 나이 얘기 엄청 싫어하던데.

그 모습을 보며 낮게 웃었다.

큰 프로젝트에 살짝 눌려있는 느낌이었는데, 한결 가벼워지네.

그러다 문득 합주실 벽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SJF라는 약자가 필기체로 멋들어지게 쓰여 있고, 아래엔 몽환적인 배경에 수많은 뮤지션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 두 번째로 큰 폰트가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이었고.

서울재즈페스티벌.

줄여서 서재페.

“얼마 남지 않았네요.”

시선들이 내가 보고 있는 쪽에 고정되더니 언제 장난쳤냐는 듯 조금 긴장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피디님도 오실 거죠? 너무 바쁘신가···.”

베이시스트의 물음에 끄덕였다.

“당연히 가야죠.”

“역시···!”

“미셸 루바니가 오는데.”

“앗.”

포스터에 떡하니 박힌 가장 큰 글씨.

재즈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미셸 루바니가 올해 서재페의 헤드라이너였다.

덕분에 재즈 팬들이 난리라지. 윤태영도 그중 한 명이고.

쩝, 하고 입맛을 다시던 서울의 와인이 이내 끄덕였다.

“인정. 미셸 루바니면 인정이지.”

“올해 서재페는 미셸 때문에 인원도 늘린다며.”

“미국에서 보러 오는 사람도 있다더라.”

은유란도 마찬가지. 미셸 루바니를 얼른 보고 싶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난, 그 모습들을 보며 불쑥 묘한 마음이 들었다. 날이 서는 것까진 아닌데, 뾰족해진다고 해야 하나. 뭔가 불편하다.

인원 늘리는 이유에 은유란도 껴 있지 않을까?

미국에서 이들을 보려고 오는 사람도 있지 않겠어?

주최 측에 물어볼까?

유치한 생각들이 밀려 올라온다.

하려고 했던 말과 함께.

“여러분도 그렇게 돼야죠.”

그러면 좋겠다고 가볍게 웃어넘기는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을 보며 생각을 고쳤다.

아니, 더 크게 돼야지.

#합주실을 나와 던컨에게 들려 얘기를 좀 하다가, 먹을 것만 사주고 다시 사무실로 내려왔다.

커피를 내리던 이강훈 팀장이 날 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내가 먼저 물었다.

“오셨다면서요?”

“네. 근데 제가 경호 씨를 못 믿는 건 절대 아닌데. 막 덜컥 기용하고 그러시진 않을 거죠?”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말릴 기세네.

“TKM에서 퀀텀보이즈 트레이닝 했던 분을 마다하는 건 아무래도 좀······.”

걱정이 잔뜩 낀 얼굴로 말하는 이강훈 팀장에게 내가 웃어 보였다.

“무턱대고 뽑진 않을 겁니다. 일단 봐야죠. 이번 일에 필요한 사람인지.”

그제야 조금은 안심한 듯한 얼굴이다.

나는 곧장 미팅룸으로 들어갔다.

멀뚱히 앉아 있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알아보니 원조 한류스타라는 칭호까지 받았던 사람이던데, 지금은 그저 영락없는 아저씨다.

“안녕하세요, 한동휘입니다.”

“네, 장기롭니다.”

빠르게 소개를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침을 꿀떡 삼키는 그를 보며 내가 먼저 입을 뗐다.

“경호 씨한테 어디까지 들으셨는지 모르겠네요.”

“해외 진출을 목표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멤버는 모두 정해졌고, 이제 그룹의 색깔을 잡아야 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TKM에서 보컬 트레이너가 올 예정이니 너무 기대는 말아라······정도로 들었습니다.

나는 작게 웃으며 끄덕였다.

저 정도면 전부 들은 거지.

그러면서 책상 위에 올려둔 파일을 펼쳤다.

‘많이 두꺼워졌네.’

프로필과 월말평가 채점지에서 시작된 파일이 어느새 한 손으로 들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두툼해져 있었다.

여기에 김지희, 주재윤, 박경호 그리고 내 시선이 모두 담겨 있으니 그럴 수밖에.

고개를 들어 한동휘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파일 위에 올려져 있었다.

펼친 파일을 슥 돌려, 그대로 한동휘에게 밀었다.

“···?”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멤버들에 대해 적혀있어요.”

한동휘가 파일을 내려다본다. 잠깐 읽는가 싶더니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점점 속도가 붙는다.

그렇게 정현우 부분쯤을 모두 읽었을까.

한동휘가 넘기는 걸 멈추고 날 보았다.

“잘 정리되어 있네요. 아직 본 적도 없는 앤데, 이미 알던 애처럼 느껴질 정도로.”

성공이네. 그러려고 저걸 만들었으니까.

‘파악하기 훨씬 빠르겠네···’라고 중얼거리는 한동휘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유명한 트레이너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것보단 저 파일을 제대로 활용해줄 선생님이 필요할 것 같다고.

거기에 아이돌 때의 경험, 특히나 해외에서의 실패를 몸으로 겪은 사람이라면 더욱 좋겠지.

이 사람이 과연 그런 사람일까?

아직 모른다.

그래서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토대로 커리큘럼 한번 만들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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