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기다림 끝에서 (1)
“아더 레이블에서 연락이 왔어.”
월드덕 레코드사의 CEO, 미하엘의 말에 핸드폰으로 SNS를 확인하던 론 스미스가 고개를 들었다.
“뭐라는데?”
“아직은 적절한 때가 아닌 것 같다고. 곧 다시 연락을 주겠다더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미하엘.
론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안을 약하게 한 거 아니고?”
미하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린 나름 최고 조건이었어.”
“최하였겠군.”
그럼 그렇지라는 론의 표정에 미하엘이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리스크를 생각하면 그 정도가 최고였어. 내가 더 불렀다고 해도 임원들이 반대해서 무산됐을걸?”
“리스크에만 매달리니 그렇지. 뮤지션과 프로듀서를 보고 배팅하라니까.”
론의 말에 미하엘이 웃었다.
“우리도 다 봤어. 다른 사람도 아니라 자네가 강력하게 추천했으니까.”
그가 마지막 결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LA 다운타운의 전경을 등지고 론의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미하엘이 넥타이를 살짝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뮤지션 둘 다 노래 잘하더군. 프로듀서도 레드리시 프로듀서에 빌 앨런의 작곡가, 게다가 NME에 ‘올해 기대되는 아티스트’에 들어갈 정도니 나쁘지 않고.”
“그런데도 리스크가 먼저였다?”
미하엘이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알잖아. NME는 빌보드와는 달리 인디 음악 좋아하는 거. 음악성보단 이게 미국에서 먹힐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어. 턴투더 레이블하곤 사정이 다르지. 그 레이블에 레드리시는 상성이 맞았으니까. 페스티벌의 제왕과 함께 다니는 아시아 최고의 밴드. 거기에 각종 페스티벌을 주최하는 골든 보이스까지. 그림이 딱 그려지지. 근데, 우리는?”
고개를 내젓는 론에게 미하엘이 딱 잘라 말했다.
“팝. 우리는 팝을 주력으로 하고 있잖아.”
턴투더 레이블이 대중적인 밴드 음악을 지향한다면, 월드덕 레코드사는 대중성 그 자체인 팝을 지향했다. 오죽하면 평론가들 사이에서 '팝을 낳는 오리'라고 불릴까.
그렇기에 아더 레이블에 관심이 있고, 소속 뮤지션들에도 흥미가 있더라도 감수할 수 있는 리스크까지 크진 않았던 것.
미하엘이 다시금 차분한 발라드와 간드러지던 재즈를 떠올렸다. 음악성이야 론 스미스가 저렇게 치켜세울 정도로 대단할지 모르지만, 글쎄···.
아시안이 부르는 발라드와 재즈라.
어디까지나 미국 내 작은 시장을 노리는 역할 정도 밖에 못 할 거라고 자신과 임원 대부분이 예상했다.
“어쨌든, 임원들 대부분이 그리 환영하지 않던 사안이라 그쪽에서 지금 결정할 생각이 없다고 하니 보류는 무슨,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난리야. 월급 CEO인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미하엘의 자조적인 말에 론이 마지못해 끄덕였다. 몹시 아쉬워하는 얼굴로.
기로 프로듀서가 빌 앨런과의 작업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 중엔 미국 시장에 대한 얘기도 있었지.
‘그는 흐름을 알고 있었어.’
이 시장이 과거부터 어떻게 흘러왔는지 꿰뚫고 있었고, 현재가 어디쯤 있는지도 정확히 짚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어가는 얘기가 미래를 향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브랜이 뭐라고 했더라.
그래, 같이 있으면 미래를 스포당하는 기분이랬지.
앤 더글라스는 그와의 대화에서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작업실에 틀어박혀 다음 앨범을 준비하고 있고.
허무맹랑한 소리 같지만, 그와 깊은 얘길 나눠봤다면 마냥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거다.
불행히도 미하엘은 그런 기회가 없었다.
‘이래서 선점이 중요했는데······.’
론은 아쉬웠다.
기로 프로듀서가 작정하고 미국 시장으로 진출하려 한다면, 그땐 이미 그만큼 이 시장에 자신이 있다는 소리고.
그때가 되면, 지금 조건의 몇 배를 제시해도 모자를 것 같았다.
#“세 명이에요?”
김지희가 내가 건넨 프로필을 보며 말꼬릴 올렸다.
“TKM 데뷔조에서 추린 건 일단 그 세 명뿐이에요.”
프로필을 순식간에 다 넘겨본 김지희가 내게 물었다.
“한 명은 이제 막 스무 살이고, 나머진······스물다섯, 둘 다 이제 아이돌로 데뷔하기엔 나이가 꽤 많네요?”
“한국에선 그렇죠.”
“아, 하긴······.”
애초에 프로젝트 던컨은 성인으로만 구성되어 있어야 했다.
본격적으로 앨범이 나오고 하면 해외에 있는 시간이 한국보다 많아질 텐데, 미성년자는 그런 부분에서 생기는 문제점들이 많으니까.
게다가 스물다섯이란 나이도 미국이니만큼 의미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김지희가 이번엔 다른 걸 물었다.
“이 세 명만으로 아이돌을 만드실 리는 없고. 그럼 나머지는요?”
“다른 곳에서 데려와야죠. 그 셋에게 부족한 걸 채워줄 수 있는 친구들로.”
김지희가 프로필 파일을 탁, 덮었다.
“어디서요?”
#“왜 가능성이 없어. 3년 전에 다치지만 않았어도···!”
-그래, 말 잘했다. 벌써 그게 3년 전이야. 넌 이제 스물다섯이고. 이제는 무작정 하고 싶단 생각보단 이게 정말 될지를 고민할 때 아니겠니?
“될지 말지를 고민하면 어떻게 하고 싶은 일을 해.”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기 싫은 일도 참아가면서 해! 지금이라도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 헛꿈 그만 꾸고.
“헛꿈?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면서 어떻게 헛꿈이라고 말할 수······!”
숙소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정현우가 방문을 보며 소리를 다시 눌렀다.
“엄마, 1년만요. 1년만.”
애원하듯 말하는 정현우에게 나지막하게 울리는 한숨 소리.
-······손님 오셨다. 이따가 연락하마.
“저 핸드폰 다시 내야 해요.”
-······.
뚝. 전화가 끊겼다.
항상 똑같은 엄마의 반응.
오히려 변하는 쪽은 정현우였다.
지난 통화보다 더 텁텁해진 표정으로 정현우가 핸드폰을 내렸다.
이게 아닌가. 정말 아닌 걸까.
방을 나서는 짧은 걸음에도 찌르르한 질문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차라리······.
‘차라리 정말 방출된다면, 그땐 미련 없이······.’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여는 순간, 임현택이 보였다.
정현우는 민망해졌다. 그렇게 소릴 질렀는데, 방문을 닫았다고 해서 들리지 않을 리가.
걱정하는 표정에 대고 푸석푸석한 웃음을 짓는데, 임현택이 전혀 다른 얘길 꺼냈다.
“그······실장님이 잠깐 나와보라는데?”
“나?”
임현택이 고갤 저었다.
“아니, 우리 둘 다.”
*“뭐야, 형들 어디 가는 거예요?”
연습생 막내가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편의점에서 돌아오는 길에 정현우와 임현택을 보고 묻는 거였다.
거실에 쪼르르 앉아있던 연습생들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실장님이 부르셨데.”
“에, 왜요?”
막내의 말에 연습생들이 고개를 젓는데, 맨 끝에 앉아있던 연습생이 슬쩍 말했다.
“왜겠어.”
고개들이 홱홱 돌아간다.
“뭐 들은 거 있어?”
“아니.”
“그럼?”
“그야 뻔하잖아.”
그러면서 말해선 안 되는 단어인 것처럼 입 모양을 만들어 보인다. 단번에 알아들은 연습생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굳어졌다.
“바, 방출이요?”
막내가 무심결에 입 밖으로 내놓고는 화들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 예민한 눈동자들이 막내에게 향했다.
“그거 여기서 말하지 말랬지?”
뾰족한 시선들을 쏟아낸 연습생들의 관심이 다시 방금 나간 두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밖에 없긴 해.”
“그치? 뭔가 확실한 거 같은데?”
“와, 살벌하다. 이렇게 갑자기 불러내서?”
“다 같이 연습할 때 불러내면 분위기 이상해지니까···.”
자신의 추측을 뒷받침하는 말들에 방출 얘길 꺼낸 연습생이 으스댔다.
“뭐, 사실 시간 문제긴 했지. 성적은 괜찮은 편이어도 나이가 반오십이잖아. 이제 와 데뷔하면 사람들이 웃을걸? 노인돌이냐고.”
*한편, 정현우와 임현택도 비슷한 생각이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섣불리 말은 안 꺼냈지만 거뭇하게 흘러내리는 두 사람의 표정이 이를 대변했다.
그렇게 말없이 걷던 둘은 담당 실장님이 부른 위치에 다 달았다. 그리고 먼저와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연습생을 마주했다.
“어?” “에?”
거의 동시에 둘의 입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승준아.”
임현택의 부름에 하얀 얼굴에 곱상하게 생긴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어, 형들도 오셨네요?”
해맑게 웃는 얼굴에 정현우와 임현택이 걸음을 늦췄다.
임현택이 은근히 속삭였다.
“야, 승준이가 있는데?”
“그러게···.”
“쟤 이제 막 스무 살 됐잖아.”
“그치.”
“성적은 최상위고.”
“···그치.”
“우리, 설마······안 잘리나?”
어느새 둘은 오승준의 옆으로 합류했다. 뭐가 잘려요? 라고 해맑게 묻는 오승준에게 임현택이 아니라고 얼버무렸고.
잠자코 있던 정현우가 불쑥 물었다.
“우리 왜 부르셨는지 알아?”
“아뇨? 형들은 아세요?”
여전히 해맑다.
임현택이 ‘모르니까 물어보지!’라고 얘기하는 동안, 정현우는 TKM 건물이 있는 쪽을 주시했다.
곧 검은색 미니밴 한 대가 서행하며 다가오는 게 보여 애들에게 알렸다. 세 사람이 꾸벅 인사하자 차가 좌회전을 하며 멈춰선다. 창문이 열리며 짧은 머리의 담당 실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애들아, 타자.”
“넵!”
영문도 모르고 올라타는 셋에게 담당 실장이 말했다.
“가깝긴 한데, 걸어가긴 좀 애매한 거리더라고.”
해맑기만 한 오승준 양옆에서 정현우와 임현택이 마른 침을 삼켰다.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유예기간이 필요했······.
“저희 어디 가요?”
오승준이었다.
담당 실장이 백미러로 뒤쪽을 훑으며 피식 웃는다. 그게 오승준을 제외한 나머지에겐 그렇게 섬뜩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가보면 알아.”
저 말도.
청담동 어느 골목에 차량이 멈춰선 건 불과 10분 만이었다.
타라길래 타고, 내리라길래 내린 셋이 담당 실장을 보았다. 음흉하게 웃던 담당 실장이 살짝 당황한 듯 갸웃거렸다.
“왜 이리 팔려온 표정들이야? 너희 여기 몰라?”
정현우가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장 가까운 건물의 1층 카페를 훑던 정현우가 옆에 붙은 현판을 보고 시선이 멈췄다.
혼자 발견한 건 아닌지 임현택이 숨을 벌컥 집어삼켰고, 이번만큼은 오승준도 얼어붙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흐흐흐, 자세한 얘긴 장 대표님께 들어. 사실 나도 잘 모르니까.”
그러면서 차를 한 바퀴 돌리는 담당 실장. 그가 열린 창문에 대고 말했다.
“아 참, 여기 별로면 언제든 TKM 연습생으로 돌아와도 된다?”
벙찐 세 사람을 두고 차 창문이 닫혔다.
미니밴은 떠나버렸고, 남은 세 사람의 눈이 다시 건물 입구로 향했다.
정현우가 먼저 발을 뗐다. 둘이 그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곧바로 깨끗하게 닦인 자동문이 보였다.
그 너머로 보이는 대리석 바닥과 카운터. 녹음실처럼 목제로 된 벽에 붙은 ‘ARDOUR LABEL’이란 글씨. 뒷면에 조명을 달았는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
세 사람이 못 올 곳이라도 온 사람들처럼 살금살금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여직원을 보고는 얼른 홍해 갈라지듯 양옆으로 비켜섰다.
여직원은 그들이 만든 길을 지나가지 않았다. 대신 웃으며 다가섰다.
“TKM에서 오신 연습생들이죠?”
“아, 네, 넵!”
“장 대표님 곧 오시니까. 미팅룸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네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걸음을 옮긴다.
서로를 번갈아 보던 세 사람이 멍청한 표정으로 졸졸졸 뒤따랐다.
#기다란 테이블과 벽걸이 TV가 전부인 미팅룸.
눈알만 굴리며 여직원이 준 주스를 홀짝이던 세 사람이 문 두드리는 소리에 바짝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며 장기로가 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깍듯하게 접히는 허리들.
장기로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앉아요. 얼굴 좀 제대로 보게.”
말 끝나기 무섭게 얼굴들이 내려왔다.
장기로가 한 명, 한 명 유심히 지켜보더니 옅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림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 같네.”
벙벙한 표정들이 장기로를 향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듯한,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들.
이에 장기로가 웃으며 말했다.
“아더 레이블에서 이번에 아이돌을 준비해요. 정확히는 TKM에서 꾸준히 계획해 오던 걸 우리가 넘겨받았죠. 며칠 전에 우리가 월말평가 때 만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요.”
장기로가 말을 이어갈수록, 세 사람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했다.
아더 레이블. 아이돌. TKM. 월말평가.
낱말들이 그들 머리에 박혀 하나의 결론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애초에 걱정했던 방출 같은 게 아니라······.
임현택이 입을 벌렸다.
“저, 저희 혹시······뽑힌 건가요? 아더 레이블에서 만드는 그 아이돌······.”
“던컨.”
“아, 던컨······.”
잊지 않으려는 듯 읊조리는 세 사람을 보며 장기로가 툭 던지듯 말했다.
“우선 난 뽑았어요.”
침 삼키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장기로가 빙그레 웃었다.
“여러분이 원한다면, 이제 뽑힌 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