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누구와 함께 하는지 (4)
<런던에서의 버스킹, 1시간 동안 천 명 넘게 봤다! 대체 어떤 공연이었길래···>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귀국하는 거리 악사의 황금 라인업.>
<영국에서도 쏟아지는 기사들! 거리 악사 과연 얼마나 흥할까?>
“난리네, 난리. 연예란 맨 윗줄이 전부 <거리 악사> 얘기야.”
VMN 예능국. 자판기 앞에 모인 피디들이 저마다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화제성이 엄청나잖냐. 운은 또 겁나게 좋아요. 아주 일이 착착 풀리더만.”
한 피디의 말에 또 다른 피디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쯤되니 솔직히 운인지 모르겠더라.”
“아니면?”
“호재가 계속 겹치는 게 전부 장 대표랑 아더 레이블 쪽이잖아. 그 정도면 그 동네 실력인 거지.”
그 말에 운이라 말했던 피디가 입술을 질겅질겅 씹더니 이내 똥 마려운 얼굴로 끄덕였다.
“끙. 인정하긴 싫지만 맞는 소리 같기도 한게······.”
그러더니 슬쩍 사무실 쪽을 본다.
“그 실력으로 우리 예능국을 발칵 뒤집어 놓으셨지.”
“그치. 박 국장은 사표 내고.”
박 국장이 VMN를 떠난 건 한 달이 조금 안 됐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라면 본인의 몸이 안 좋다는 것. 하지만 직원들 사이에선 TKM와의 알력 싸움이 과해져 VMN 사장이 쳐낸 게 아니겠냐는 소리가 돌고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더 깊은 얘기는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그 밑에서 열심히 샤바샤바 하던 감 피디는 VMN 어워드 시청률 대박치고도 못 웃는 상황이고.”
“어휴, 난 앞으로 아더 레이블이랑은 되도록 안 엮이려고. 무서워서.”
“거기 소속 연예인 짤랐다가 이 지경이 된 건데?”
“아, 그럼 엮여야겠네.”
“그래야지. 엮여서 우린 아군이란 거 사상 검증하고 프로그램 성공시켜달라 부탁해야 할 판이야, 지금.”
잠자코 듣고 있던 다른 피디가 율무차의 가라앉은 부분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장 대표가 선택한 프로는 전부 다 성공했네.”
“뭐, 그래 봤자 오디셔닝이랑 거리 악사 정도밖에 없지 않아? 거리 악사는 아직 뚜껑 따봐야 아는 거고. 아, 다큐멘터리 있구나.”
“듣자 하니 본인 거 말고 소속 연예인들 방송도 직접 검토한다던데? 근데 그 동네 연예인들 타율이 엄청 높잖아.”
“어 그래? 진짜로 장 대표가 일일이 검토를 한 거면 누음소랑 힙합 머니랑 혼자 산다······어 우 씨 뭐야. 소름 돋아.”
“야, 그 정도면 신기 있는 거 아니냐?”
“소설을 써라, 소설을.”
“응, 짤리면 쓸려고.”
“······.”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동료를 보는 피디들.
그중 한 명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급하게 종이컵을 구기며 몸을 돌렸다.
“맞다, 나 국장님한테 컨펌 받아야 할 거 있는데.”
“황 국장님 지금 국장실에 없으셔.”
“그럼?”
짤리면 소설을 쓰겠다던 피디가 검지를 들어 위쪽을 가리켰다.
#VMN 사장실.
벽에 걸린 TV에 포털 사이트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사무 의자에서 일어난 VMN 사장이 자글자글한 주름을 더욱 깊게 만들며 화면을 훑는다. 이에 소파 자리에 앉은 중년 남자의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해졌다.
“황 부장. 아니, 이제 황 국장이지.”
“예.”
VMN 사장의 눈이 이번엔 중년 남자에게로 향했다.
비리 문제로 코너에 몰린 박한철 국장이 사표를 내고, 그 자리에 앉힌 황 국장.
잠시 그를 바라보던 VMN 사장은 뜸 들이는 것을 마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예?”
“저 화면, 어떻게 생각하냐고.”
VMN 사장의 뜬금없는 물음에 황 국장이 화면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연다.
“연예란 윗줄이 전부 거리 악사 얘기입니다.”
원하던 대답이었는지 VMN 사장이 고갤 끄덕이며 천천히 소파 상석에 앉았다.
“그렇지. 우리도 이번에 새로 들어가는 프로가 한두 개가 아닐 텐데 말이야. 근데 이 페이지에 단 한 개가 없어. 뭐 누가 캐스팅되었다, 이런 기사조차도. 이건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예.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깍듯한 사과에 VMN 사장이 손을 휘저었다.
“아냐,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자네가 뭐가 죄송하나. 반년 뒤에도 이 꼴이면 죄송해야겠지만.”
“···명심하겠습니다.”
VMN 사장이 천천히 고갤 주억거린다. 그러더니 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덕분에 황 국장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저거랑 붙는 우리 쪽 프로가 뭐지?”
“<뮤직 키즈쇼>입니다.”
“턱도 없군. 그거 시청률 겨우 소수점 한자리 유지하는 거잖아?”
“예. 그래도 제작진들이 포맷을 바꿔가면서 대비를 하고 있으니-.”
“됐어. 애먼 데 돈 쓰지 마. 이기지도 못할 거. 대신······.”
VMN 사장이 허옇게 올라온 턱수염을 툭툭 건들며 말했다.
“이번에 UBC에서 새로 들어오는 예능 있잖아. 가면 같은 거 쓰고 우스꽝스럽게 노래 부른다는. 그건 꼭 이겨야겠는데.”
“네? 그 프로는 갑자기 왜···.”
“우리 프로 거절한 놈이 거기 나온다더군.”
그의 말에 눈알을 굴리던 황 국장이 눈치껏 맞췄다.
“혹시, 한울······.”
“그래. 그 놈. 그러니까 처참히 이겨. 대표 놈은 방송에 정신 팔려서 유럽 여행 다녀왔는데, 소속 연예인은 죽 쑤면 그건 그거대로 또 자극적인 기삿거리가 될 테니까. 아는 기자들한테 미리 판 깔라고 말해 놨어.”
VMN 사장의 말에 황 국장이 이해했다는 듯 끄덕인다.
지금까지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을 지우고,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프로 망할 것 같다고 소문이 자자하니까요.”
#“피디님 오셨어요!”
공항에서의 취재 열기가 난생처음 겪어본 수준이라 어질어질했었는데, 사무실을 오니 여기도 못지않게 후끈하다.
“저 본방 사수하려고 며칠째 SNS도 안 했어요! 괜히 들어갔다가 퍼진 영상 보게 될까 봐.”
“런던에서 천 명이 넘게 봤다는데 현장 분위기 어땠어요?”
“피디님 정아는요? NME 기자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뮤지션으로 소개해서 꽤 반응이 좋은 것 같던데. ‘대중가곡’이란 장르를 재정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면서.”
쏟아지는 질문에 하나씩 답하며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정확히는 멈춰졌다.
학준이 형의 이번 앨범 포스터······옆에 있는 명단에서.
“어후.”
내가 말문이 막혀 바람 빠지는 소릴 내자 직원들이 쿡쿡대며 웃는다.
보내준 사진으로 봤지만 실제로 보니 더 기가 막히네.
이 빨간 동그라미는 뭐야? 누가 채점했어?
“이거 만드신 분은 어디 가셨죠?”
내가 묻자 김지희가 용의자의 위치를 불었다.
“갑자기 <미스터리 뮤지션> 측 홍보담당자가 연락이 와서 급하게 나갔어요.”
그녀의 말에 내가 벽에 붙은 명단에서 눈을 뗐다.
“왜요? 무슨 일 있대요?”
#<마지막 티저까지 모두 나온 <미스터리 뮤지션>이 보면 볼수록 불쾌한 이유···>
<블라인드 테스트를 위한 가면, 과연 소용이 있을까?>
<기대되지 않는 <미스터리 뮤지션>, 17일, 일요일 방영>
핸드폰을 슥슥 밀어 올리다가 이내 내려놓고 주재윤을 보았다. <미스터리 뮤지션> 측 홍보담당자와 만나고 온 그는 살짝 격양된 표정이었다.
“이거, 굉장히 악의적이네요?”
기사 내용까지 싹 읽어보니 알겠다.
까기 위해 깐다는 걸.
“맞아요. 완전히! 악의적이죠.”
“그쪽 홍보담당자는 뭐래요?”
“우선 대응할만한 보도자료를 만들어 보겠대요. 그쪽도 아주 화가 많이 나셨던데.”
흠······.
방영까지 보름을 앞둔 <미스터리 뮤지션>.
이게 왜 갑자기 타켓이 되었나 의아해하는데, 주재윤이 덧붙였다.
“그리고 그쪽 생각으론 타 방송사 입김이 작용했을 것 같다더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상대를 깎아내려 시청률을 지키려는 건 제로섬 시장인 방송 업계에서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니까.
“만약 그러면 어떤 방송사가-.”
생각을 이어가던 내가 멈칫하며 주재윤을 보았다. 주재윤이 끄덕였다. 내가 뭘 생각했는지 자신도 안다는 듯이.
“VMN일 수도 있다?”
“수도 있다 정도가 아닌 것 같아요. UBC는 거의 확신하고 있던데요?”
그러나, 이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박한철 국장은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누가 우릴 공격했을까?
에라이.
즐겁게 일하고 와서, 잠깐만 좀 머리 비우고 치킨이나 뜯으며 <미스터리 뮤지션>과 <거리 악사>를 차례대로 시청하려 했더니 이걸 안 도와주네.
나는 저 기사들이 프로그램의 성공에 영향을 줄지 고민해봤다.
모르지.
이미 저런 기사들이 나오는 시점부터.
아니, 이 프로그램에 학준이 형이 출연하게 된 순간부터 내가 아는 미래가 아니니까.
‘그렇다고 팔자 좋게 뚜껑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고······.’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다시 한번 기사들을 훑었다. 꼴 보기 싫은 활자조합물이 읽기 참 퍽퍽하다. 그래도 또 읽었다. 이 같잖은 이유들을 반박할 수 있는 걸 찾기 위해.
한참을 읽다가 핸드폰을 덮었다.
“재윤 씨. <미스터리 뮤지션> 쪽에서 메이킹 필름도 만들어 둔댔죠?”
“네. 추석쯤에 특집으로 내보낸다고 그랬었죠.”
끄덕이는 주재윤에게 말했다.
“그거 좀 보고 싶네요. <미스터리 뮤지션> 윤 피디님한테 전화 넣어줘요.”
#UBC 방송국에 도착하자마자 편집실로 향했다. 윤 피디는 회의 중이라 내려오지 못했고, 대신 서 작가와 주재윤과 회의를 했던 홍보담당자가 함께 마중을 나왔다.
편집실에 앉아 2시간째 메이킹 필름에 쓰일 후일담들을 보는 중이다.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우선 가장 많이 걸고넘어지는 게 가면이죠. 계속 보면 불쾌하게 생겼느니, 허접스럽게 만들었다느니.”
내 말에 서 작가가 발끈했다.
“거울 계속 보고 있으면 더 불쾌할 텐데 말이지.”
홍보담당자도 거든다.
“그리고 허접하다뇨. 디자이너분이 한땀 한땀 얼마나 열심히 만드셨는데···!”
나는 작게 웃으며 모니터를 보았다.
그러다 은근하게 물었다.
“이 여성분이시죠? 가면 디자인 하신 분.”
“네. 미국에서 팬시 디자인으로 나름 알아주는 분인데······막, 명품들이랑 콜라보도 하셨었거든요.”
홍보담당자의 말대로 화면 속 디자이너는 정말 정성적으로 가면을 제작하고 있었다. 기계도 없이, 손으로.
VJ가 몇 시간이나 걸리냐는 질문에 디자이너는 하나당 7, 8시간이라며 웃었다. 엄청 빡센데?
이 정도면······
“이 부분 편집해서 짤막하게 올리고, 디자이너님 이력 쭉 뽑아서 반박 기사 쓰면 어떨까요?”
서 작가가 입 모양을 동글게 말며 주억거렸다.
“디자이너가 어떤 사람인지 대중들에게 알려주고, 판단하게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확실히 후광효과에 쉽게 설득당하죠. 특히나 해외 이력에.”
다행히 홍보담당자도 일리가 있다는 듯 끄덕인다.
“다음으론······.”
기자들이 억지로 있는 살 없는 살 다 모아 꼬집은 점들을 하나씩 따졌다. 내가 미래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생각해온 것들도 있었고, 홍보담당자가 준비해온 해결책들도 있었다. 그렇게 하나씩 반박할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새 회의가 거의 끝나갔다. 위에서 하는 회의도 끝났는지 윤 피디가 내려와 동참했다.
“소속사 대표님이랑 이런 걸 준비하는 건 또 처음이네요.”
홍보담당자의 말에 윤 피디가 옆에서 껄껄댄다.
“그러니까. 장 대표는 우리 프로에 출연도 안 했는데, 출연한 느낌이야. 뭔가 프로그램의 동반자랄까?”
“동반자라니. 그게 뭐예요.”
서 작가가 질색했고, 윤 피디는 그게 또 만족스러운지 소리 내어 웃는다.
“그만큼 장 대표가 소속 연예인을 아끼는 거지.”
“그러게요. 그 형도 그걸 알고 절 좀 아껴야 할 테데.”
“왜요. 한울 씨가 장 대표님 엄청 아끼는 거 같던데. 회식 자리에서 대표님 자랑만 했어요.”
“밖에서만 그래요, 밖에서만.”
“뭐야 둘이, 부부 같게.”
서 작가가 또다시 어이없어한다. 윤 피디는 이런 멘트가 취향인지 한참을 웃었고.
옆에서 따라 웃던 홍보담당자가 갑자기 내게 손짓했다. 다급하게. 팔랑팔랑.
“아, 그것도 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어떤 거요?”
“가면 쓰는 게 전혀 소용없을 거라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목소리 들으면 다 알 거라고.”
서 작가와 윤 피디도 그 얘길 듣곤 동조했다.
“맞아요. 그런 얘기 계속 나오고 있어요.”
“내 담당 부장도 그 소리야. 컨셉이 가면인데, 가면이 소용없으면 어쩌냐느니······.”
맞네. 그런 문제도 있었지. 아니, 문제는 아닌가?
“그거, 사실이잖아요.”
내 말에 찔끔한 셋이 어색하게 웃는다.
이미 패널들이 다 얘기해줬겠지.
이거 너무 누군지 티 난다고.
내가 여유롭게 웃으며 덧붙였다.
“근데, 전 그게 딱히 걱정되진 않네요.”
이 얘긴 성공한 미래에서도 똑같이 있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