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누구와 함께 하는지 (3)
<프로듀서 기로, NME가 뽑은 올해의 기대되는 아티스트에 이름을 올려···>
<영국에서도 레드리시 열풍, 덩달아 거리 악사까지 입소문!>
<맨체스터 버스킹에 200명 몰렸다!>
사무실이 살짝 갑갑해져 홀에 나와 노트북을 펼친 김지희가 입꼬릴 올렸다.
“어떻게 이렇게 딱딱 맞아 떨어지죠? 레드리시 빌보드에 이름 올리고, NME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고, 그게 영국에서 꽤 화제가 되면서 버스킹도 점점 화제가 되고.”
쭉 읊던 김지희가 눈을 빛냈다.
“이러다 월드 스타가 되시는 건 아니겠죠?”
“에이, 그건 너무 갔다.”
웃으며 말하는 여직원에게 김지희가 덧붙였다.
“근데 진짜 옆에서 지켜보면 몇 년 뒤에 그럴 것도 같단 말이에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듀서. 뭐 이런 거.”
“몇 년 후? 그 정도면 가능할지도?”
“그죠? 그죠?”
커피를 홀짝이며 끄덕인 여직원이 말했다.
“그때쯤 되면 우릴 뭘 하고 있으려나.”
“딱.”
“딱?”
“딱 이러고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피디님은 그때도 뭐 하나 대박 내시고, 우리는 또 신나서 일하고.”
여직원이 소리 내어 웃었다.
“와, 지금 머릿속에 그려졌어. 지희 씨는 기사 보면서 감탄하고, 나도 따라서 댓글 읽다가 인터뷰 요청 와서···전화···또 전화···.”
신나서 얘기하던 여직원의 표정이 급격히 음울해졌다.
김지희가 웃프다며 쿡쿡댔고.
“다른 사람들은 어떨 거 같아요?”
“지원 씨는 여전히 혼잣말 엄청 할 것 같고, 강훈 씨는 그때도 정장 입고 출근할 것 같아. 행거칩은 좀 안 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재윤 씨는······.”
여직원이 말하다가 문득 입구 쪽을 봤다. 자동문 앞에 선 주재윤이 굳이 센서도 없는 곳에 손을 휘적거리며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저렇게 제 말 하면 오겠지. 저 성미 급한 거 봐.”
“너무 천천히 열려. 근데 왜요? 저 왜요?”
김지희가 빵 터져서 웃다가 그의 손에 돌돌 말려있는 인쇄물을 확인하고 물었다.
“아, 그거 나왔어요?”
“넵!”
주재윤이 두둠칫 거리며 벽에 붙은 다보를 푼다. 그 자리에 포스터를 걸고 다시 다보를 잠그자, 김지희와 여직원이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하얀 사무실 책상 위에 그 올려진 빨간 탁상시계. 옥스퍼드 메모지와 샤프. 그리고 포스터 하단엔 한울이란 글씨가 원고지 같은 빨간 칸 안에 정자로 쓰여 있었다.
“깔끔하니 다시 봐도 좋네요.”
김지희의 말에 여직원도 끄덕인다.
그 사이 주재윤이 주섬주섬 뭔가를 더 꺼냈다. 이번엔 그보다 작은 사이즈의 포스터였다.
“그건 뭐예요?”
“이거 뽑는 김에 같이 주문했거든요.”
“···?”
돌돌돌돌.
사진도 그림도 없이 텍스트만 가득한 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직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시력을 돋구자 주재윤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올해의 기대되는 아티스트 명단이에요.”
“나 보였어. 아주, 잘 보였다구.”
여직원이 당황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걸 보던 김지희가 또다시 빵 터져 눈물까지 흘렸고.
“그걸 뽑았어요?”
“NME에서 발표한 거면 엄청 대단한 거잖아요. 보도자료만 내기 아쉬워서 뽑았죠. 여기 봐요. 제가 피디님 이름에 동그라미 쳐놨습니다.”
“오, 영어로 되어있으니까 뭔가 좀 있어 보이는데요?”
“근데 피디님이 싫어하실 것 같네. 특히 자기 이름에 동그라미 쳐 놓은 거. 튀는 걸 그렇게 싫어하시는 분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주재윤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댔다.
“지금 영국이 몇 시죠? 이거 보내도 되려나?”
여직원이 시계를 슬쩍 보더니 끄덕였다.
“아마 될걸? 한 삼십 분 전에 연락했었는데, 마지막 버스킹 리스트 짜는 중이시더라고.”
주재윤이 톡톡 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두드린다.
그 모습을 보던 김지희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지막 버스킹······그러면 이제 모레 돌아오시네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
마지막 도시, 런던.
마지막 버스킹.
마지막이란 단어가 붙으니 괜스레 욕심이 커간다. 유종의 미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방송의 성공이나, 화제성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어느새 나는 버스킹과 그걸 위한 준비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방식으로 편곡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선 누가 불러야 가장 어울릴까.
버스킹이란 상황이 나를 좀 더 깊은 고민에 빠트리고, 또 그만큼 기대하게 만든다.
‘시간도, 공간도, 사람도 제한적인 이 공연에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나는 모두의 의견이 범벅된 선곡 리스트를 노려봤다. 살짝 위로 시선을 올리니 남원기가 보인다. 핸드폰과 대화 중인.
“확실히 리듬악기가 아예 없는 게 아쉬워요.”
남원기가 옆구리에 통기타를 끼며 말했다.
그의 앞에 세워진 패드에는 도트로 뭉개진 윤태영이 뚝뚝 끊기며 순간이동을 하는 하고 있었다.
-그렇더라고요. 마지막 공연인 만큼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좋은 곡들을 엄선한 건 좋은데, 살펴보니 버스킹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빠른 템포의 곡들이 꽤 많았어요.
“전체적으로 리듬을 바꿀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원림의 ‘여기서 만나’를 보사노바 리듬으로 하면 꽤 괜찮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듯 남원기가 검지와 중지로 기타를 가볍게 잡아 뜯었다. 보사노바 컴핑 리듬에 맞춰서.
윤태영도 베이스가 아닌 통기타를 순간이동으로 들고 와 저음으로 베이스 같은 소리를 만들어내 보였다. 그러다 잠시 뭔가를 고민하더니, 물었다.
“리스트에 Coldplay, Viva La Vida도 있었죠?”
“네.”
-이거 여기서 만나의 브릿지 부분을 대리코드 써서 바꾸면 Viva La Vida 후렴구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 같네요.
“···어?”
남원기가 눈을 크게 뜨며 윤태영의 말대로 연주해보았다. 척하면 척. 두 곡을 물 흐르듯 합쳤다.
-맞아요. 그렇게요.
“이거···괜찮은 것 같아요. Viva La Vida야 워낙 유명하니 사람들이 바로 알아챌 테고. 간주까지 딱 이어진 다음 이렇게···다시 여기서 만나의 도입부로 돌아가면 매끄럽네요.”
윤태영이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화면에는 목이 위, 아래로 뚝뚝 끊겨서 괴기하게 보여졌지만.
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빙글빙글 돌리던 펜대를 멈췄다. 그리고 곡 제목 옆에 필요한 최대한의 악기를 적어 내려갔다.
최소가 아닌 최대한.
“기타는 컴핑을 이런 식으로 하면 될 것 같고, 피디님은······.”
“어택 강한 스트링으로 거기에 맞춰줄게요. 원기 씨가 코드의 3음, 7음을 치면, 내가 나머지 1음과 5음을 받쳐주는 방식으로.”
“아, 넵.”
내가 어떻게 들어갈지를 알려주고 다시 펜을 움직였다. 이번엔 위에서부터 없어도 되는 악기에 사선을 그었다. 사실 없다. 없어도 되는 악기 따위. 그럼에도 쳐내야 했다.
마침내 소거법으로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악기들만 남겼다. 그럼에도 많았다. 대부분의 곡이 피아노와 통기타만으론 원하는 퀄리티의 구현이 어려웠다.
마침 앞에 있는 둘도 비슷한 얘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기타랑 스트링만으로 원하는 그림이 나올지는 솔직히 감이 안 와요.”
-원하는 그림에 완벽히 부합하긴 어렵겠죠. 문제는 마지막 버스킹 장소가 꽤 넓은 광장으로 들었는데, 소리가 힘없이 흩어질 수도 있겠어요.
“후우. 그것도 그렇네요.”
내가 천천히 고갤 들며 말문을 뗐다.
“그러면···.”
남원기가 날 본다. 윤태영은 패드 속에 갖혀 그러지 못했고.
“리듬악기를 넣는 건 어때요?”
“넣으면 좋긴 한데······어떻게요?”
-건반에 런치패드 달려있어요?
“아뇨, 그건 아닌데.”
내가 시선을 돌렸다. 멀찍이 거실에서 옹기종기 모여 ‘난 쟤네가 뭔 소리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제작진들에게.
“롤랜드 사에서 나온 전자 드럼 패드가 있거든요.”
“······.”
“구해다 주실 수 있을까요?”
내 말을 들은 오 피디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린지도 모르면서 뭘 다 모여서 듣고 앉았어. 도움이 되는 걸 해야지. 용선아 얼른 갔다 오자.”
“넵!”
그러자 옆에서. 정확히는 패드 안에서 윤태영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그거 누가 치는데요?
#“나보고 이걸 치라고요?”
하서윤이 곧 뒷목이든 내 멱살이든 잡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그녀의 앞에는 거무튀튀한 드럼 패드가 준비되었다.
“어려울 거 없어요. 한 칸마다 다른 소리를 넣어서 단순하게 칠 거니까.”
“아니, 내 의사는···?”
“없죠.”
“뭐요?”
내가 피식 웃었다.
“제가 프로듀서라서.”
“뭐, 꼬우면 프로듀서 해라 뭐 이런 거예요?”
“그런 말을 한 적은 없고.”
드럼 스틱을 건네며 설명을 이어갔다.
“진짜 쉬울 거예요. 박자에 맞춰서 한 번씩만 치면 돼요. 하서윤 씨 리듬감 좋잖아요?”
“타고났···아니, 이게 아니라···.”
고개를 내젓는 하서윤을 보며 내가 말했다.
“그냥 편하게 쳐봐요.”
내게 눈을 흘긴 하서윤이 드럼 스틱을 조심스레 휘두른다.
툭.
“이렇게요?”
“네. 근데 좀 더 세게. 두더지 잡는다 생각하고 쳐봐요.”
“두더지···.”
하서윤이 갑자기 눈을 빛내더니 드럼 패드를 내리쳤다.
두더지 대신 내 이름을 외치면서.
.다음 방으로 향했다.
어색한 기운이 완벽하게 장악한.
“두 사람 어색하죠?”
내 물음에 두 사람이 동시에 답했다. 다른 대답을.
“네.” “아뇨.”
덤덤히 긍정하는 남원기와 시치미 떼고 부정하는 이재학.
사실 하서윤보다도 여기가 더 걱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재학이 노래를 하는 데 있어선 다른 감정들을 끼워 넣지 않는다는 것. 여전히 시시각각 가면을 쓰고 남들을 대하지만, 곡 얘길 꺼내지도 않고 남원기를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행동도 사라졌다. 물론 가끔 가면이 깨지며 질투 어린 시선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연습한 거 들어볼까요?”
내 요청에 두 사람의 일렉 기타가 잔잔히 울려 퍼진다.
세컨인 이재학은 스트라토캐스터를, 남원기는 텔레캐스터로 연주했다.
그 때문인지 미묘하게 소리가 어긋났다. 어울리지 않은 두 소리가 합쳐져 독특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합주를 들으면 서로의 관계까지 알 수 있다는 말이 아예 뜬구름 잡는 소린 아닌 것 같네.
그리고.
‘듣기 나쁘진 않아. 오히려 독특해서 맘에 들어.’
.이번엔 거실이었다.
최정아가 소파에 웅크려 앉아 통기타를 튕겼다. 그 앞에는 악보들이 타일처럼 쫙 깔려있었고.
지잉지잉 울리는 얇은 쇳소리를 들으며 옆에 앉았다. 슬쩍 내려다보니 악보가 새까맣다.
“뭘 이렇게 많이 메모했어?”
“노래랑 기타랑 둘 다 하려니까 적어둘 게 많더라고요. 제가 기억력이 별로인지 금세 까먹어요.”
“선배 소릴 듣더니 너도 어느새···.”
“네? 아, 아녜요. 저 아직 20대 초반인데.”
“그 말을 하는 순간 중반인 거지.”
최정아가 어이없어하며 기타를 고쳐잡았다.
“얼른 연습한 거 확인해주세요.”
끄덕이며 등을 뒤로 기대자, 옆에서 최정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버징마저 운치 있게 들리는 통기타 소리와 함께.
여기에 밖에서 작게 들려오는 빗소리까지 더해지자 LP판을 틀어놓은 듯한 착각이 든다.
진짜···.
“할 말이 없네.”
최정아가 내 말을 듣더니 씩 웃는다.
농담 좀 할랬더니 안 통하네.
날 너무 잘 알아.
그래도 말은 맺어야지.
“지적할 게 없어.”
#어제 비가 왔던 광장에, 오늘은 노을이 내렸다.
군데군데 모인 물웅덩이가 붉게 물든다.
하늘과 바닥이 온통 붉어진 광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날씨가 좋아서.
목적지가 여길 지나가야 해서.
그 밖의 다른 이유들로.
계속 몰려든다. 그리고 우리들 앞에서 멈춰선다. 모두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우리의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슬슬···.’
나는 멤버들을 훑었다.
하서윤이 스탠드 마이크를 끌어당기며 스틱을 들었다.
남원기와 이재학도 기타 넥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최정아는 옆에 통기타를 기대놓고, 마이크를 스탠드에서 빼내어 양손으로 잡았다.
거기까지 확인하고서, 손을 올렸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시작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