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누구와 함께 하는지 (2)
“인터뷰 준비는 좀 했어?”
오 피디가 다가와 물었다.
“보내준 걸 읽어보긴 했는데 레드리시나 빌 앨런 얘기가 확실히 많더라고요.”
“그래? 그렇군···.”
끄덕이며 다가오는데 표정이 은근한 게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얘길 꺼냈다.
“스텝들이랑 고민을 해봤는데, 인터뷰에 꼭 들어갔으면 좋겠는 게 몇 개 있더라고. 프로그램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야.”
“아, 제가 질문지랑 잘 엮어서 언급할 테니 편하게 주세요. 그쪽에서 기사로 써줄지는 모르겠지만요.”
흔쾌히 알겠다고 하자 오 피디가 히죽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크, 역시 장 대표야. 우리 프로의 마스코트!”
마스···뭐?
“내가 사진 보자마자 우리 프로 견인해주겠다는 느낌이 딱 왔다니까? 무튼, 작가들이랑 얘기한 거 메시지로 넣어줄게.”
두꺼비 같은 손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내가 의문이 들어 물었다.
“근데, 무슨 사진이요?”
“어? 아. 이거 원래 캐스팅 비화로 풀려고 한 건데, 그거 있잖아. VMN어워드에서 장 대표랑 정아랑 서윤이 사진 찍힌 거.”
오 피디가 건달 시늉을 내는 것 마냥 어정쩡한 자세를 만들어 보인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연행짤, 현행짤로 불리는 그 사진을 말한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거 보는 순간 느낌이 왔지. 이 그림대로 캐스팅하면 우리 프로 성공하겠구나.”
“······.”
느낌이 왔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 사진 찍은 기자부터 잡아내야겠다는.
뭐라 대답할 생각조차 들지 않아 그냥 몸을 돌리려는데 오 피디가 손가락을 튕기며 덧붙였다.
“아예, 프로그램 포스터를 어워드 재연해서 찍는 건 어때? 런던에서!”
얼씨구.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그거 재밌겠는데요?”
차분히 설득하려는데 살짝 가쁜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운동복을 입은 하서윤이 땀을 뚝뚝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 피디가 만족스럽게 웃는다.
“그치? 뭔가 성공의 부적 같은 느낌으로 아예 프로그램 포스터에도 박아버리는 거지. 내가 미신 같은 건 안 믿지만 그래도 뭔가 잘 풀릴 것만 같잖아. 런던에서 빅벤을 배경으로 찍어야겠네!”
“오, 괜찮은 것 같아요.”
오늘따라 둘이 쿵짝이 잘 맞는다. 오늘도 난 이 둘이랑 안 맞는 것 같고.
“아, 아쉽구만. 시상식 드레스를 미리 챙기라고 할 걸 그랬네. 그런 거 챙겨 온 사람 없겠지?”
유럽 오는데 캐리어에 그런 걸 챙겨 오는 사람이 있을 리······.
“저 비슷한 거 한 벌 있어요.”
왜지?
하서윤이 씩 웃으며 어떤 드레스인지를 묘사한다. 검은색, 샤넬, 어쩌구. 오 피디가 하서윤더러 준비된 스타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데, 그때 3층 창문으로 최정아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피디님, 저 곡 선정해봤는데 확인을 좀······.”
밝게 내려오던 목소리가 이내 딱딱하게 굳는다. 우박처럼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거기서 뭐 하세요?”
내게 한 말은 아니었다. 오 피디한테 한 것도 아니고.
하서윤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운동하고 돌아오는 길.”
“그럼 마저 돌아오시지 왜 거기 서 있으세요.”
“무릎이 아파서?”
“근데 왜 뛰댕···아니, 곡은 다 정하셨어요?”
그러자 하서윤이 이어폰을 들어 올린다.
“운동하면서 다 뽑아놨지. 나처럼 섹시한 곡들로.”
“······얼른 올라오세요.”
하서윤이 해맑게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그리고 나를 잡아끈다.
“피디님 올라가죠?”
순간 최정아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뭐랄까. 3층에서 뛰어내리거나, 아니면 뭔가를 던지거나 둘 중 하나는 할 것 같은 흉흉한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뒤에서 오 피디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린다.
“다들 의욕적이구만!”
개뿔이.
#이안 웨버는 영국 NME(New Musical Express) 잡지사에서 올해로 4년 차가 되는 기자였다. 원래는 음악평론가였지만, 선배 평론가의 추천으로 기자가 된. 그리고 지금은 그 선배 평론가이자 현 편집장인 상사로부터 지시를 받아 2시간째 기차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작게 투덜대는 이안. 그도 그럴 게, 이 출장이 오늘 아침에 급히 잡혔기 때문이다. 출근하자마자 곧장 이동하는 중이니 유쾌할 리가.
그것도 딱히 이름이 많이 알려진 것도 아닌 프로듀서 한 명 때문에!
“흥미롭지 않아. 전혀.”
마음에 안 드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별수 있나.
선배이자 상사의 명령인데.
물론 이 어중간하게 인지도 있는 프로듀서를 자신이 인터뷰해야 하는 이유도 한두 개쯤은 있었다.
먼저 포크와 일렉트로닉을 넘나드는 빌 앨런의 곡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란 점.
그리고 현재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차근차근 상위권으로 등반 중인 레드리시의 프로듀서라는 점.
그리고 론 스미스가 팬이라며 대놓고 트위터에서 홍보를 한다는 점.
그리고···노래도 잘 만들긴 한다는 점. 다른 건 몰라도 레드리시 곡은 좋더라고.
그리고 또······.
‘큼. 생각보단 많네?’
이안이 헛기침을 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차창 밖 풍경이 목적지가 가까워졌음을 알려주었다.
‘레드리시, 빌 앨런 얘기나 실컷 물어봐야겠군. 그쪽으론 흥미로운 게 꽤 많을 테니.’
그 프로듀서가 어떤 사람이고, 영국에 와서 무슨 촬영을 하는지 따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흥미로운 기삿거리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 뿐.
맨체스터에 도착한 이안이 다시 택시를 타고 <거리 악사> 팀이 묵는 숙소로 향했다.
입구에 다 달은 그가 내심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송 촬영 중이라더니, 생각보단 규모가 있는 프론가 보네?”
여기저기에 서 있는 동양인 스태프들을 보며 두리번거리던 이안은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스태프에게 다가가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그러자 한참 동안 자기 말을 듣고 있던 스태프는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이내 한 남자를 데려왔다.
구릿빛 피부에 수염이 덕지덕지 난···.
‘인상 한 번 더럽군.’
남자의 외모에 순간 찔끔한 이안이 이상함을 느끼고는 갸웃거렸다.
‘가만, 저 사람이 그 프로듀서? 사진에서 봤던 얼굴은 저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다소 험악한 외모의 남자가 유창한 영어로 물어오면서.
“통역사입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이안은 그에게 인터뷰하러 온 기자란 사실을 다시 한번 밝혔다.
잠시 후, 이안의 앞으로 사진 속에서 봤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이안이 영업용 미소를 만들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렇게 순둥순둥한 얼굴이었지.’
#서로 간단한 소개를 나누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레드리시와 빌 앨런의 프로듀서로 유명하시죠.”
“유명한지는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둘을 프로듀싱한 건 사실이고요.”
“하하, 또 특이하게 빌보드 이력을 보면 재즈로 장르별 차트에 진입하신 적도 있어요?”
“맞습니다.”
“자, 그럼 먼저 빌 앨런부터 얘길 해보죠. 빌 앨런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게 된 건가요?”
“아, 그건 턴투더 레이블에서 빌 앨런이란 뮤지션을 캐스팅한 상태였는데······.”
“그러면 레드리시가 턴투더 레이블에서······.”
“빌 앨런이······.”
“앤 더글라스가······.”
“레드리시는······.”
질문이 쏟아진다. 근데 이건 뭐. 내 인터뷰인지, 나는 대변인이고 정작 인터뷰 대상은 따로 있는지 모르겠다.
이럴 수도 있다고 짐작은 했지만······.
이안이란 기자는 아주 빠르게 내게 질문을 이어갔다. 자신이 듣고 싶은 대답만 듣고 다음 질문을 준비했다.
‘이러다간 <거리 악사>에 대한 기사는커녕, 얘기도 제대로 못 하고 끝날 판인데?’
물론 그렇게 둘 생각은 없지.
나는 테이블 한쪽에 놓여진 패드를 힐끔거리며 타이밍을 봤다. 저 안에 들어있는 버스킹 영상들을 소개하고 싶어서.
그때 다음 질문을 이어가려던 기자의 눈이 내 뒤의 무언가로 향하더니 멈칫했다.
“······저분은 누구시죠?”
돌아봤더니 하서윤이 이번엔 아까와 다른 색 운동복을 입고서 숙소를 나오고 있었다.
“저희 버스킹 멤버인데···어디 가요?”
“운동요.”
“아까 다녀왔잖아요.”
“아깐 아침. 지금은 저녁.”
싱긋 웃어 보인 하서윤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담장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다시 앞을 보자 기자가 넋을 놓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다.
“흠흠. 저분도 노래 부르시나요?”
“네. 원래 댄스 뮤지션인데 이번 버스킹에선 노래만 하게 됐어요.”
“노래 실력이 상당한가 보네요?”
“한국 최고 뮤지션들 중 한 명입니다.”
인터뷰용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설명하다가 이거다 싶어 얼른 물었다.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네?”
마침.
아주 신기하게도.
비가 오면 다 젖어서 물이 흥건해질 이 야외 테이블에.
이 비싼 패드가 올려져 있으니.
“어······.”
“리버풀에서 버스킹한 영상이 여기 담겨 있거든요.”
내가 패드를 슥 끌어오자, 이안이 안경 밑을 긁적이며 느릿하게 끄덕였다.
“뭐, 그래요. 한 번 보죠.”
나는 얼른 버스킹 영상을 틀었다.
“······.”
“······.”
처음엔 내가 왜 이걸 보고 있지? 하는 것 같던 기자의 표정이 점점 변한다.
어느새 버스킹 영상에 완전히 집중하는 눈빛이 되어서는.
“제스처가 아주 좋네. 댄스 뮤지션이라 그런가···.”
이렇게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그렇게 한참을 영상에 빠져있던 기자가 고개를 들었을 땐, 얼굴에 흥미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가 이번엔 최정아를 가리킨다.
“이 옆에 앉아계신 여성분도 댄스 뮤지션인가요?”
“아뇨. 원래는 포크 기반의 노래를 하던 뮤지션인데, 요즘엔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요?”
“네. 아, 마침 이 패드에 그녀의 최근 오페라 홀 공연 영상도 있는데. 잠깐 보시겠어요?”
고민이 잠깐이었다.
“···그럴까요? 흥미롭네요.”
#-꽤 오래 걸렸네?
편집장의 물음에 이안이 시간을 확인했다. 무려 세 시간이 넘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애초에 물어볼 것만 딱 물어보고 짧게 끝내려 했던 생각이 무색하게.
“그러게요.”
-어떤 것 같았어?
“프로듀서요?”
-어. 내가 꽤 흥미롭게 지켜보던 프로듀서거든.
이안이 기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에 다가섰다.
“솔직히 아침까지만 해도 별 관심 없었는데···막상 얘기 나눠보니까 꽤 흥미로웠어요.”
-그래?
“지금 도시 돌아다니면서 버스킹하는 방송을 찍는 중이라는데, 거기 멤버들도 하나같이 실력이 상당하고, 편곡을 본인이 했다는데 그것도 꽤 파격적이었고. 실력 있는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건 확실한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말끝을 흐리던 이안이 정리했다.
“확실히 쓸 내용은 많을 것 같네요. 나머진 회사 가서 말씀드릴게요.”
-오케이. 오면 얘기하지.
그렇게 전화를 마치려는데, 편집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 참. 나도 지금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게 있어서 말인데, 한 가지만 더 물어보지.
“네. 물어보세요.”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끄덕이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 던져졌다.
-올해의 기대되는 아티스트로 싣는 건 어떨 거 같아? 그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