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31화 (131/221)

131. 보이밴드 뉴하이 (2)

추위가 한풀 꺾이고, 눈 대신 질척이는 비가 며칠째 내리다가 다시 또 며칠째 날씨가 맑다.

곧 못 보게 될 한국의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밴에서 내렸다. 미리 언질 받은 공항 입구로 다가서자 한 VJ가 달려 나온다.

슬쩍 안쪽을 보니 이미 드라마 촬영 현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스태프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중 몇몇 카메라가 내 쪽을 비추기 시작했다.

“오, 기로 프로듀서님!”

따라붙는 카메라들 사이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살집이 제법 있고, 입술이 두툼한 남자. 개그맨 장영태였다.

“제일 먼저 오셨네.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으로.”

한껏 업 된 톤으로 날 맞이하는 장영태.

이 순간에도 스태프들은 분주하다. 우릴 가운데에 두고 강강술래라도 할 기세.

그래도 방송 몇 번 출연해봤다고 이 상황이 그나마 덜 정신없네.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하고 장영태의 손을 맞잡았다.

“프로듀서님이 제일 일찍 오셨어요.”

능청맞다. 최정아에게 오라고 한 시간을 보니 나랑 다르던데. 애초에 시간순으로 배치를 한 것 같더만.

그러냐고 웃으며 그가 이끄는 벤치에 앉자, 엉덩이가 닿기도 전에 장영태에게서 질문이 쏟아진다.

옷차림부터 캐리어까지, 순식간에 훑으며 개그 소재로 쓰일 수 있는 건 모두 털어갔다.

그렇게 내 행색을 주제로 뽑을 이야기란 이야기는 대부분 뽑았을 때쯤, 그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거짓말처럼 문 쪽에서 두 젊은 남자가 걸음을 재촉하며 들어온다.

“요즘 대세가 오셨네.”

장영태가 가벼운 말투로 반겼다.

꾸벅 인사하며 들어오는 두 남자. 뉴하이라는 보이밴드의 멤버들이었다.

앞장서서 들어오는 꽃미남 스타일의 남자가 뉴하이의 보컬, 이재학이었고, 모델마냥 무표정으로 뒤따라 들어온 멤버가 뉴하이의 기타리스트인 남원기였다.

사람이 늘자 장영태가 더욱 바빠진다.

스캔하고, 멘트 치고. 거기서 꼬리 물어 하나 더 멘트 날리고. 다시 다른 사람 스캔.

별명이 뫼비우스의 입이라는데, 그게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신기해서 넋을 놓고 봤다. 간간이 나를 향하는 물음에 대답도 해주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VJ 두 명이 입구 쪽으로 쪼르르 달려나가는 게 보였다. 장영태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 본 것 중 가장 밝은 표정으로.

“왔어? 오신 거야?”

유리 너머로 하늘하늘한 두 실루엣이 걸어온다. 살짝 거리를 벌리고서.

같이 온······건 아닐 테고. 일부러 시간을 똑같이 알려줬나 보네.

당당한 발걸음이 먼저 입구에 도착했다.

하서윤이 치렁치렁한 머리를 넘기며 능숙하게 카메라를 따라 움직였다. 뒤이어 최정아도 공항 안으로 들어왔다.

“서윤 씨, 정아 씨, 영광입니다! 캐리어 저한테 주세요, 저한테.”

장영태가 마중을 나갔다. 뉴하이의 이재학도 얼른 따라 나가 최정아의 캐리어를 받아온다.

배우 해도 성공했을 (-물론 연기력을 고려하지 않은) 비주얼에 반드시 손꼽히는 두 뮤지션의 등장에 스태프들조차 눈을 떼지 못할 정도.

황토색 배낭을 멘 오 피디가 흐뭇하게 두 실루엣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시청률을 견인해줄 보증수표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거리 악사>를 촬영할 모든 멤버가 모였다.

나는 살짝 떨어진, 장영태의 멘트를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경청하는 최정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최정아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반짝이는 눈을 내게로 돌렸고.

그때, 두드려지는 어깨.

“같이 예능을 하게 됐네요?”

“그러게요.”

하서윤이다. 분명히 왜 나왔냐고 한 마디 던지겠······.

어라. 아닌가.

생글생글 웃고 있다. 기분이 좋아 보일 지경으로. 어째 더 불안한데.

“재밌게 해봐요. 우리.”

얼른 버스킹이나 하고 싶네.

#

무려 존 레논의 이름을 딴 리버풀 국제공항에, 우리는 예정보다 훨씬 늦게 발을 디뎠다. 기상악화로 비행기가 몇 번을 선회하다 내려앉았기 때문.

맑았던 한국의 하늘이 무색하다. 역시 영국은 영국이지.

덕분에 모두가 하늘에 낀 먹구름만큼이나 낯빛이 어두워져 있었다.

가뜩이나 긴 비행시간이 늘어난 데다 시차까지. 티를 안 내려 해도 피곤이 드러날 수밖에.

곧장 공항을 빠져나와 제작진이 빌린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가장 뒷줄에는 나와 장영태. 뉴하이의 이재학과 남원기가 줄줄이 앉았다. 바로 밑 자리 양쪽 끝에 최정아와 하서윤이 앉았고.

카메라가 꺼지자마자, 이재학이 최정아에게 말을 건다.

“정아 씨 The Blower's Daughter 커버 하신 거 엄청 많이 들었었는데.”

“아, 네.”

“데미안 라이스 저도 엄청 좋아해요. 우리가 아일랜드로 갔으면 뭔가 더 좋았을 거 같지 않아요?”

“아, 네.”

오랜 비행시간 때문인지 최정아도 평소와 다르다. 웃고는 있는데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묘하다,

이재학이 입맛을 다시며 다른 대화상대를 찾았다.

“선배님, 누나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뇨. 내가 나이 들어 보이는 거 딱 질색이라.”

그게 하필 하서윤이었고.

국물도 못 찾은 이재학이 이런 모욕감은 처음이라는 똥 씹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말이 하고 싶으면 자기 멤버랑 떠들면 될 텐데, 여기까지 오는 내내 멤버랑 길게 얘기하는 걸 못 봤네.

‘사이가 별로 안 좋나?’

이국적인 풍경이나 볼까 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장영태가 말을 걸어왔다.

“시차 때문에 피곤하실 텐데, 그래도 내색 안 해주셔서 감사해요. 예능 출연 경험이 적은 분들한텐 정말 어려운 건데.”

“제가 애초에 시차란 게 좀 뒤틀려 있어서요.”

“하핫. 맞아요. 음악 하시는 분들은 늦게까지 작업하시는 경우가 많다더라고요.”

껄껄 웃던 그가 조심스레 뒤늦은 양해를 구한다.

“제가 조금 과하게 개그를 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그런 역할로 섭외된 거라······.”

“당연히 이해하죠.”

“프로듀서님도 저한테 막 대해주세요. 저보다 형님이신데 말 편하게 하시고.”

형···님?

“저보다 나이가 적으세요?”

“네? 그럼요! 와, 바로 이렇게 막 대하시는 거예요?”

장영태가 억울해하는 모습에 웃음소리들이 들린다. 피로물질이 내려앉았던 버스가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윽고, 곧 도착한다면서 다시 카메라의 불이 켜졌다.

장영태가 음악 얘기와 개그를 적절히 조율해가며 이야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나도 장영태를 좀 더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학준이 형이랑 대화한다고 생각하니 편하다. 멘트를 받는 수준을 넘어 받아치는 것까지도 가능할 정도.

“피디님. 저긴가 봐요.”

최정아가 굳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날 불렀다.

확 밝아진 표정으로.

손끝엔 무슨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그림 같은 집이 걸려있다.

그녀의 짐작을 뒷받침해줄, 미리 도착한 제작진도 함께.

#

“수철아, 넌 가서 이제 버스킹 어떤 곡 할지 회의하라고 전달해. 용선아 뭐하니? 아, 아냐. 넌 냉장고 정리 계속해. 그게 제일 중요하지. 고추장 얼마나 가져왔어? 잘했네.”

오 피디가 손을 휘적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작가들이 쪼르르 따라와 누구는 바닥에 누구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오프닝부터 숙소 도착까지. 보니까 어떤 거 같아?”

오 피디의 물음에 작가들이 하나, 둘 입을 열었다.

“괜찮게 뽑힌 거 같아요. 일단 오프닝엔 하서윤이랑 최정아가 워낙 비주얼적으로 괜찮다 보니까 딱히 재미가 없어도 됐던 거 같아요.”

“맞아요. 그리고 여기 도착해선 텐션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또 영태 씨가 열일 해줬으니까······.”

“근데, 전 생각보다 장 대표님이 재밌던데요? 뭔가 영태 씨랑 케미가 좀 맞는 것 같았어요.”

턱밑을 매만지던 오 피디가 작게 주억거렸다.

“장 대표가 의외로 여기저기 붙여도 케미가 괜찮을 수도 있을 것 같네. 원래의 컨셉인 음악적인 지주 느낌을 부각시키면서도 중간중간 쉴 때나 여행할 땐 다른 캐릭터들이랑 붙여서 어떤 케미가 나오는지 한번 보자고. 내가 영태한테도 따로 말해 놓을 테니까.”

그때 작가 한 명이 우려 섞인 말을 꺼냈다.

“회의는 알아서들 잘 할까요? 워낙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라······별문제 안 생기려나?”

오 피디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훌훌 털었다.

“장 대표가 어떻게든 잘 해주겠지. 그래서 어렵게 모셔왔는데.”

킬킬거리며 몸을 부엌 쪽으로 기울인 오 피디가 소리쳤다.

“용선아, 배고프다! 라면 좀 끓이자!”

#

<거리 악사>는 사전 연습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합주는커녕, 우리가 영국 리버풀까지 와서 무슨 공연을 할지가 전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걸 지금 하란 거고.

“자, 자. 한 번 모여서 회의를 해보자구요, 우리.”

장영태가 거실에 세팅된 악기들을 요리조리 피해 카펫 바닥에 앉아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이재학과 남원기가 먼저 온다. 여전히 서로 말이 없다.

하서윤은 어디서 났는지 당근 하나를 물고 와 아그작 거리고 있고.

최정아도 내 옆자리에 와서 착 앉았다.

“어떤 곡이 좋을까요?”

장영태가 화두를 던졌다.

이어지는 침묵.

뮤지션들이기에 쉬운 결정일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뮤지션들이기에 자신의 색이 확실하지. 욕심이 있으니 고집도 있고.

아마 그래서 내가 여기 앉아있는 것 같긴 하다만······.

생각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장영태가 다시 오디오를 채웠다.

“제가 뮤지션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겠다 싶은 곡을 몇 개 뽑아왔거든요. 지극히 제 취향이 담긴 곡들인데. 먼저······여기가 비틀즈의 고향이라 불리는 만큼, 역시 비틀즈! 라고 하면 좀 식상하니까 존 레논의 Imagine 어떠세요?”

“괜찮은데요?”

내가 끄덕이자 장영태가 고맙다며, 프로듀서님밖에 없다며 달라붙었다. 첫인상과는 딴판이네.

그때, 짧은 말 외엔 들을 길이 없었던 뉴하이의 남원기가 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영국, 리버풀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여기서 한국의 올드 밴드의 곡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괜찮은데?

그때 이재학이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언어가 다르면 안 듣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걸 사람들이 굳이 서서 뭐하러 감상하겠어?”

의견이 다르다기엔 뭔가, 말투가 까끌까끌하다. 장영태가 얼른 우스갯소릴 해대며 분위기를 중화시켰다.

‘역시, 저 둘은 사이가 안 좋구나.’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는 찰나, 옆에 있던 최정아가 의견을 냈다.

“한국의 올드 밴드······전 괜찮은 것 같은데요? 가람의 거리에서 같은 곡 하면 버스킹이랑도 잘 어울리고-”

오, 저것도 괜찮은······.

“가람의 거리에서보단 선인화 선배님의 거리에서가 더 낫지.”

뾰족뾰족한 말투가 끼어들었다.

원래 그런 말투 그 자체인 하서윤이었다.

내 저럴 줄 알았지.

근데 의외인 건 오히려 최정아였다.

평소였으면 분명 가만있었을 텐데.

“거긴 가사에 나오는 계절이 가을이에요. 지금이랑 안 맞아요.”

오늘 역시 이상하다.

스파크가 튄달까.

장영태가 다시 중화 작업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독소가 너무 짙어.

출발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기사가 뭐라 그랬더라. 뭐, 황금 라인업?

‘개뿔이.’

이러다간 회의도 길어질뿐더러 회의가 회의로 안 끝나고 말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의견에 태클 걸지 말고, 나온 곡들 전부 하죠. 버스킹 한 번 하고 돌아갈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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