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꼬이면 풀면 되고 (4)
며칠 뒤, 홍 작가가 학준이 형 곡의 가사를 보내왔다.
멜로디가 내 머릿속에 꽉 틀어박혀 있어서 그런가, 가사를 읽는데 자연스레 노래가 흘러나온다.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좋다.’
기대했던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직원 사무실을 나오던 김지희가 컵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다 내려진 커피잔을 들어 비켜서며 말했다.
“가사 왔어요.”
홱 돌아보는 김지희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바빠지는 그녀의 눈동자가. 미끄러지듯 읽어내려간 김지희가 다시 고갤 들었을 땐, 웃고 있었다. 아까 내 표정이 딱 저랬을 것 같다, 싶은 표정이네.
“작업실까지 찾아간 보람이 있네요.”
“그러게요. 밥 제대로 사야겠어요.”
“누구요? 홍 작가님이요?”
“아뇨. 정아.”
갸웃거리는 김지희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참, 정아 공연장 섭외는 어떡하실 거예요? 그것도 다른 곳들 리스트업 해놓긴 했는데.”
“아, 안 그래도 부탁하려 했어요. 만약에 안 되면 차선이 항상 있어야 하니까···.”
내키진 않지만.
“만약에요? 잠실에서 못 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랬죠.”
내 대답에 김지희의 얼굴이 더욱 기묘해진다. 못 하는 걸로 결정이 났는데, ‘만약’이 어떻게 붙을 수 있냐는 표정이었다.
내가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그랬는데, 공연장이 좋아도 너무 좋더라고요.”
“네에···?”
최정아도 너무 잘하고.
그래서 가장 자신 있는 거로 풀어 보려고 한다.
혼자 생각을 이어가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참 묘하네.
언제부터 가장 자신 있는 게 음악이 되었냐.
#
“자, 숙제.”
새하얀 강의실에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제론 연륜이 묻어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듣는 이들은 그렇게 느꼈다.
“각자 주제를 정해서 16 마디 정도의 짧은 곡을 하나씩 만들어오자. 스케치 단계여도 좋아. 멜로디만 띡 가져오면 안 되고, 대강의 오케스트레이션이 포함되어 있어야 해. 알겠니?”
“예···.”
목소리들이 집단 떼죽음을 당했는지 바닥으로 툭툭 떨어진다.
“나중에 좀 더 좋은 연주자로 성공하기 위한 밑거름이라고 생각해. 작곡 한 번 안 해본 연주자가 어떻게 작곡가의 마음을 캐치하겠어? 안 그래?”
씩 웃어 보인 여교수가 강의실을 나섰다.
뒤에서 들려오는 절망 어린 한숨 소리에 피식 웃는다.
‘작곡, 어렵지.’
위대한 곡의 거장들도 똑같이 어려웠을 거다. 창작이란 건 고통의 연속이니까.
몇몇, 갑자기 멜로디가 들려왔다고 전해지는 희대의 천재들이 아니고서야.
아니, 그들도 분명 어려웠을 거다. 멜로디만 있다고 곡이 완성되는 건 아니니까.
‘그럼에도 더 나은 연주자가 되기 위해선 꼭 해봐야 하는 게, 작곡이고.’
작곡가의 곡을 연주만 해도 되는, 연주자일지라도.
여교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데, 자신의 연구실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자신과 비슷한 나이 줄에 걸쳐있는 듯 중년 남자.
여교수는 천천히 가까워지는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 순간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군가 했더니···.”
묘한 표정으로 최연석 감독을 지나친 여교수가 문을 열었다.
그 뒤를 최연석 감독이 따라 들어왔다.
여교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많이 늙었네?”
“선배님은 거울 안 봅니까?”
“볼 시간 없어. 바빠서.”
최연석 감독이 화장은 누가 대신해주나, 라고 중얼거리며 주변을 훑었다.
책장에 꽂힌 무수한 책들을 보며 고개를 내젓는다.
“교수 방은, 교수 방이네.”
최연석 감독이 중얼거리는 동안, 여교수는 소파 자리에 앉아 그를 빤히 지켜봤다.
“···오페라 홀 때문에 왔어?”
최연석 감독도 마주 앉았다.
“아시네요?”
“알지. 자네가 현중 필하모닉의 예술 감독직을 맡았다는 것도, 대중화를 위해 콜라보를 기획하고 있단 것도, 그 장소가 잠실 타워의 오페라 홀이란 것도.”
“거기에 선배님이 코를 빠트렸죠.”
“자네란 거 알고 그런 건 아냐. 오해하진 말고.”
최연석 감독이 천천히 끄덕이다가 툭 던지듯 물었다.
“아직도 반대합니까?”
“뭐? 클래식의 대중화? 반대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겨야 우리가 더 의미있어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클래식을 다른 뭔가로 바꾸면서까지 그래야 할까? 그 과정에서 클래식이 훼손되면? 그러면 그 뭔가가 과연 클래식이라 할 수 있을까?”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 되었다.
다시 불이 붙는다.
예전, 서울 시립 교향악단에 함께 있었을 때처럼.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었다. 그들은 이제 50을 훌쩍 넘는 나이라는 것.
불씨는 예전처럼 활활 타오르지 못했다.
쉽게 사그라들어 연기만 내뿜었다.
“30년도 더 된 논쟁을 이제 와서 끝내보겠다고 온 건 아닐 거 아냐? 이런 지휘자도, 저런 지휘자도 있는 거지. 그러다 보면 또, 전혀 다른 사람이 나타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지도 모르고.”
“그걸 받아들일 준비는 되셨고요?”
“뭐, 자네만 아니라면?”
“나라서 공연 못 하게 한 거 맞구만.”
여교수가 피식 웃었다.
최연석 감독도 끓어오르던 성질을 누그러트리며 멋쩍게 웃었다.
어색한 웃음 사이로 침묵을 깬 건 최연석 감독이었다. 그가 핸드폰을 꺼내 유리 테이블 위에 턱 하니 얹었다.
“···?”
“이번 공연, 내가 주도하는 게 아닙니다. 작곡하는 젊은 친구가 하나 있어요.”
최연석 감독이 기억을 되짚듯이 느릿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미팅 때 대뜸 한 손에 잡기도 버거운 악보를 만들어오고, 그 악보엔 마디마다 필기가 되어있었고. 수많은 기로에 서서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정표가 되어 뮤지션들에게 방향을 가리키는, 작곡가인 동시에······지휘자기도 했어요. 포크고, 밴드고, 재즈고, 클래식이고 음악은 그냥 음악으로 향유하는 친굽니다.”
“누군지는 알 것 같네. 그 유명한 프로듀서 얘기하는 거지? 이번에 너와 콜라보하는 가수의 대표.”
최연석 감독이 끄덕였다.
여교수의 입꼬리가 한쪽만 살짝 올라갔다.
“그 친구가 자네에게 날 좀 설득해달라 부탁을 했나?”
이에 최연석 감독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앞에 올린 핸드폰을 가리켰다.
“설득은 이거에 맡기고 나는 배달만.”
핸드폰 화면 속 재생 버튼을 본 여교수가 황당하단 듯이 피식 웃었다.
“곡으로 설득이라니. 자네 많이 감성적여졌네?”
“그런 거로 보입니까?”
최연석 감독의 표정을 본 여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없이 진지한 표정. 살짝, 흥미가 돋았는지 소파에 슬쩍 기대며 팔짱을 꼈다.
어디, 준비해온 걸 해보란 듯이.
재생 버튼을 누르는 최연석 감독의 쭈글진 손가락.
시작은 가느다란 음, 하나였다.
바이올린 하나가 한 음을 집요하게 늘어트렸다. 숨이 헐떡이듯 떨리는 음이 끊어질 즈음에 다음 음이 이어졌다. 다른 바이올린에게서.
클래식에서, 그것도 도입부에서 주로 쓰이는 방식이었다. 사람들에게 긴장감을 채워 넣어주는 동시에, 집중도를 확 높이기 위한.
그 순간, 현악기들이 하나, 둘 채워지기 시작하며 팀파니의 꽉 찬 소리가 양쪽을 뛰어다녔다.
여교수는 자신의 발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모른 채 곡을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
담담했다. 말하는 것에 약간의 음율을 붙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음율이 주선율로의 역할을 해내기 시작했다. 말에서 노랫말로 변하는 게 꼭 오페라를 닮아 있었다. 저마다 날카롭게 치솟던 현악기들이 잔잔히 깔렸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장르를 헤치지 않는 선에서 넘나든다.
향유란 표현이 딱 맞았다.
그 순간, 현악기들 위로 뛰어오르는 가창자의 목소리.
소파에 묻었던 여교수의 등이 툭, 떨어졌다.
#
-나머지 곡들도 들어보고 싶다는군.
최연석 감독과의 전화를 받고서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콘서트에 오를 곡들을 모두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바꾸는 작업. 사무실과 현중 예술의 전당을 매일 같이 오가며 편곡과 수정을 거듭했다.
내가 작업실에서 누른 한 음, 한 음이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악보가 되어 갔다.
부담감과 기대감이 뒤범벅되어 일주일 정도를 가득 채웠다.
100명이 넘는 단원들의 이름을 거진 다 외웠을 무렵, 모든 곡 작업이 끝났다. 우리는 결국 오페라 홀에서 콘서트를 해도 좋다는 소식을 받았고, 축배를 들 새도 없이 콘서트 준비에 착수했다.
그렇게 또 다시 보름이 흘러, 간 보듯 따갑게만 흩날리던 눈이 작정한 듯 펑펑 쏟아지는 오후.
나는 최정아의 단독 콘서트를 지켜보기위해 작업실 책상을 일찌감치 정리했다.
“피디님, 한울 씨 보도자료 모두 뿌렸습니다.”
“반응은 좀 어때요?”
“보도자료 내놓을 시간에 앨범이나 빨리 내놓으라고 성화예요.”
주재윤이 웃었다. 나도 마주 웃었고.
“그럼 이제 전 슬슬······.”
사무실을 떠나려는 차에 여직원이 직원 사무실로 들어왔다.
“피디님. 피아노 잘 치시죠?”
“네···?”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에 대답 대신 눈만 껌뻑이자 여직원이 설명해왔다.
“며칠 전에 정아한테 들어온 예능 있잖아요? 거기 작가님이 물어보길래요.”
“정아를 섭외했는데, 왜 내 피아노 실력을······.”
내 말에 여직원이 왜겠냐는 듯이 말꼬릴 올렸다.
“그거야, 피디님도 섭외하려는 거 아니겠어요?”
내가 눈을 끔뻑였다.
거기에? 날?
#
“오 피디님.”
회의실 문을 두드리며 작가가 들어왔다.
“어. 어떻게 됐어?”
“우선 얘기는 해놨어요.”
“장 대표가 할까? 대표씩이나 돼서 거리에서 버스킹 같은걸?”
“그래도 유럽이니까···.”
“뭐, 유럽 거리라고 금칠을 해놓은 건 아니잖아.”
턱을 괸 오 피디가 며칠째 자르지 못한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눈그늘 짙게 진 두 눈은 노트북 화면에 콱 박혀 있었다.
작가가 그런 오 피디를 보며 말했다.
“근데 전 장 대표도 장 대표지만 솔직히 다른 쪽이 더 어려울 것 같아요. 예능 안 하기로 유명하잖아요? 아무리 장 대표랑 친분이 있다지만 쉽게 나올 것 같지 않아서······.”
작가의 걱정에 오 피디가 주억거렸다.
“유명하지. 예능 안 하기로······.”
“그러니까요.”
“근데, 한다네?”
순간 일시 정지 화면인 것처럼 작가가 굳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되묻는다.
“······네?”
“한데. 방금 매니저한테 연락받았어.”
“아, 매니저랑 잘 안다고 하셨었···아니, 근데 어떻게요? 어떻게 섭외하신 거예요? 이렇게 쉽게 하서윤을!?”
오 피디가 머릴 기울였다.
“어떻기라고 할 것도 없었어. 그냥 이러이러한 예능이고, 이런 사람들에게 섭외 연락을 해놨다고 매니저를 통해 얘기했을 뿐. 심지어 흔쾌히 오케이 했다던데?”
작가가 살짝 입을 벌린 채로 굳어있다가 이내 들뜬 목소리로 방방 거렸다.
“우리 프로가 탐나긴 한 가봐요! 최정아에 하서윤에! 이러다 대박 나는 거 아녜요?”
이에 오 피디가 소리 내어 웃으며 다시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근데 난 장 대표도 꼭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화면엔 VMN 어워드 포토존에서 찍힌 사진 한 장이 떠올라 있었다.
장기로가 가운데에 서 있고, 좌우에 최정아와 하서윤이 그를 연행하듯 붙잡고 있는.
왜 간혹 출연자들이 나란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거 되겠다, 망하겠다가 느껴질 때가 있다고 하잖나.
오 피디가 딱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거 되겠다, 싶은.
“촉이 딱 왔어. 대박의 촉이.”